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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군단(國民軍團) 1914년 6월 하와이 오하후섬 가할루 지방의 아후이마누 농장에서 박용만(朴容萬)의 주도하에 창설되었다. 이는 대한인국민회의 연무부를 확대·개편한 것으로서 항일무력투쟁에 대비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조선총독부에게서는 그에게 남작직과 은사금을 주었지만 모두 거절하고 받지 않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하와이로 건너간 노백린은 박용만(朴容萬) 등과 하와이 오아후가할루 지방에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하였다. 김성옥, 허용 등과 함께 국민군단 별동대 주임으로서 3백여 명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1916년 이승만,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을 의논하기 위해 노백린은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1] 그러나 서재필이나 이승만은 무장독립론을 주장하던 노백린의 견해에 그는 회의적이었다. 1918년 《평양시사신보》를 창간하는데 참여하였다.


대조선국민기(大朝鮮國民旗)
대조선군단기(大朝鮮軍團旗)

1912년 12월 6일 박상하와 함께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1913년 5월 하와이 정부로부터 특별경찰권을 승인받아 대한인국민회 경찰부장을 설치하여 한인자치제를 확립하고, 1913년 12월 Nauuanu YMCA에서 한인지도자급 인사들과의 회합하여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설립에 대해 합의한다. 그 후, 1914년 4월 박종수는 모든 도지권을 군단조직에 정식으로 인계하고, 임응전, 한태경, 한치운 3人은 자농하는 파인애플 농장을 양여하는 등 하와이 한인들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1914년 6월 하와이 가훌루 '아후이마누'지역에 대조선 국민군단이 창설되고,8월 29일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낙성식이 거행된다.

박용만은 대조선국민군단 조직을 확장코자 강원도 출신 李周淵을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하고, 1914년 하와이에 온 장일환을 귀국시켜 먼저 하와이에서 귀국한 강석봉평양숭실대학 학생 등과 1915년 3월 평양에서 국민군단 국내지부 성격의 비밀단체인 조선국민회를 결성하게 한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는 자금을 둘러싼 이승만의 공격으로 1916년 10월 실질적으로 폐쇄된다.

1914년 하와이에서 미주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였고, 국민보주필을 맡는다. 1914년 초반 그는 하와이의 한 농장을 임대하여 동포의 청년들이 공동으로 경작하게 하였다. 또 항일무장 독립운동단체인 대조선 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창설,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130여 명을 독립전쟁에 대비한 인원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2] 이듬해 미국 독립정신을 본받아 대한독립을 이루자는 내용의 《미국 혁명사》를 출판하였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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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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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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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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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시정부의 ‘비밀 공군사관학교’”. 2017년 2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11월 11일에 확인함. 
  2. 네이트 인물정보[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