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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반 ===
김덕령은 [[1567년]](선조 원년) [[음력 12월 29일|12월 29일]] [[전라도]] 광주 무등산(無等山) 아래 석저촌(石底村)(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광주)|충효동]]) 성안마을에서 아버지 김붕섭(金鵬燮)<ref name='gj740'> [http://gjstory.or.kr/sub.html?pid=48&formtype=view&code=740 김덕령 :: 문화역사자원1000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ref><ref name='gj79s'> [http://gjstory.or.kr/sub.html?pid=11&formtype=view&code=79 김덕령 :: 스토리 100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ref><ref name='tn945803' /><ref name='E0008931' /><ref name='duklung' />{{refn | group="주" | 김덕령의 아버지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鵬燮(붕섭)으로 나오는 자료는 조선 정조 때 편찬한 《[[국조인물고]]》<ref name='tn945803' /> 및 《[[서하집]]》<ref name='서하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name='E0008931' />, 광산김씨 허주공파 종중<ref name='duklung' />, 광주문화역사자원<ref name='gj740' /> 등이며, 鵬邊(붕변)으로 나오는 자료는 김충장공옥사사초 소개 웹페이지<ref name='memoryhonam' />이며, 鵬變(붕변)으로 나오는 자료는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ref name='gjsgcc' />, 《광주광역시 북구 문화자원총람》{{sfn|문화자원총람}} 등이다. }}과 직장(直長) 반계종(潘繼宗)의 딸인 어머니 [[남평 반씨]](南平潘氏)의 3남 3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나, 위로는 형 덕홍(德弘)과 누나 3명이, 아래로는 아우 덕보(德普)가 있다.<ref name='E0008931' /><ref name='gjsgcc' /> {{sfn|문화자원총람}}
 
집안이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여 [[:wikt:유업|유업(儒業)]]에 종사하여, 어려서부터 종조부(從祖父) 사촌(沙村) [[김윤제]]의 별장인 [[환벽당]]에서 글공부하며 [[:wikt:유아|유아(儒雅)]]를 쌓기 시작하였고<ref name='gj79s' /><ref name='gjsgcc' />, 14세에 부친을 여의었다<ref name='h380225' />. 17세에 향해(鄕解, 초시)에 합격하고, 18세 때 담양에 사는 [[흥양 이씨]](興陽李氏) 부인과 혼인하였다.<ref name='gjsgcc' /> 20세에 형 덕홍(德弘), 자부(姊夫) 김응회(金應會), 묵재 이귀(李貴) 등과 함께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ref name='서하집' /><ref name='gjsgcc' /><ref name='gjsgcc742'> [http://gjstory.or.kr/sub.html?pid=48&formtype=view&code=742 김덕홍 :: 문화역사자원1000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ref>{{sfnp|오수열|황태섭|2014|p=3~4}} 어려서부터 무등산에서 말타기와 칼쓰기 등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ref name='mchosun'>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708100020 문갑식의 주유천하 〈16〉 취가정과 비운의 의병장(義兵將)들] 월간조선, 2017년 8월호. </ref>{{sfn|문화자원총람}}
 
당시 조정에서는 서인과 동인(東人)의 정권 싸움이 치열하였는데, 이런 가운데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서인의 좌의정 정철(鄭澈)이 위관(委官 : 재판장)으로서 동인의 과격파 [[이발 (1544년)|이발]](李潑) 등 1천여 명을 숙청하는 [[기축옥사]]를 일으키며, 이로 말미암아 동인의 원망을 크게 샀다. 김덕령은 성혼의 제자로서 서인 계열에 속하였고, 정철과는 동향(同鄕)이었으므로, 뒷날 동인 출신 대간(臺諫)들로부터 의병장 김덕령이 군율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여 군사를 죽였다고 탄핵받기도 하였다.<ref name='slwk'>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A%B9%80%EB%8D%95%EB%A0%B9(%E9%87%91%E5%BE%B7%E9%BD%A1) 김덕령(金德齡) :: 위키실록사전]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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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음력 12월 22일|12월 22일]] 담양부사 이경린의 주선으로 전라도 삼례에서 세자 광해군을 만나게 된다. 당시 세자는 무군사(撫軍司)를 이끌고 군인과 백성들을 위로하고 장수를 모집하려고 전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ref name='knb_12612001_002' /> 광해군을 수행한 병조정랑 [[조응록]]의 《[[죽계일기]]》에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ref name='h380627' />
 
[[음력 12월 27일|12월 27일]] 분조의 광해군은 전주 과거시험장에서 주재하였다.<ref>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12001_003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2월 1일 경술 3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세자가 전주에 머무르며 과거를 실시하다] </ref> 문과 시관은 좌의정 윤두수, 호조판서 한준, 세자 우빈객 이항복, 문학 유몽인 등이었고, 무과 시관은 좌참찬 이산보, 동지사 박진, 훈련원 첨정 정사시, 병조정랑 조응록 등이며, 김덕령은 수많은 수험생 앞에서 무예 시범을 보임으로써 국가와 백성들이 인정하는 장수가 되었다.<ref name='h380627' /><ref name='slwk' /> 전주 과거시험에서는 문신 11인과 무신 1천 6백 인이 뽑히었다. 한편 도원수 권율도 무군사의 명령을 받들어 경상도 합천에서 무과시험을 치러 무인 9백 명을 뽑았다.<ref name='h380627' />{{sfn|문화자원총람}}
 
김덕령이 무술 시범을 보고 흡족한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翼虎將)이라는 칭호와 함께 군기를 수여받았다.<ref name='kna_12701005_003' /> 이후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에게 그간의 경과와 군사상황을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권율은 김덕령에게 초승장(超乘將)의 군호와 초승군(超乘軍)이란 표장을 내린다.<ref name='h380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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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2월 27일|2월 27일]] 산음(지금의 산청)에 주둔한다.<ref name='h381586' /><ref name='h382067' /> 경상도에서 머무른 지 한 달이 되자 김덕령 군대는 군량 부족에 시달린다. [[음력 3월 2일|3월 2일]]에 김덕령은 조정에 [[:wikt:치계|치계(馳啓)]]{{refn | group="주" | 치계(馳啓) : 말을 달려와서 아룀. 즉, 보고서를 올림. }}한 뒤, 별다른 전투 상황도 없고 군량도 부족함을 들어, 예하 3천여 병력 가운데 호남 군사로 벼슬한 자 5백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ref name='h382067' /><ref name='E0008931' /> 조정에서도 상황이 심각함을 알고, 위급시만 징병하고 평시에는 둔전을 설치하여 운용토록 한다.<ref name='h382067' />
 
그 무렵 1594년 4월에 선조는 각도의 모든 의병을 혁파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임계영]]의 전라좌의병, [[변사정]]의 적개의병(敵愾義兵) 그리고 [[정인홍]]의 경상도 의병들을 해산하거나 그 일부를 모두 김덕령의 군에 소속시키었고, 그에 따라 김덕령은 나이 28세에28세(만26세)에 의병 총대장에 임명되어,<ref name='tn945803' /><ref name='gjsgcc' />{{sfnp|오수열|황태섭|2014|p=13}} 조방장(助防將) 곽재우와 함께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경상도 서부 지방 방어 임무를 맡았다.<ref name='slwk' />{{sfn|문화자원총람}}
 
[[음력 4월 12일|4월 12일]]에 진주목(대곡면 대곡리)에 군진을 옮겨, 진해, 고성 지방을 방어하였다.<ref name='gjsgcc' /> 진주 월아산 아래 대여촌(지금의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 관방마을) 들판에 진을 치고 둔전을 설치한다. 군인들은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하여 농사를 지었다. 또한 장기전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월아산(月牙山) 정상에 목책을 설치하고 제무소를 만들어 칼과 창 등의 무기도 제조하였다.<ref name='h382067' /><ref name='gjsgc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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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0월 13일|10월 13일]] 장문포 해전을 마친 뒤 권율의 명에 따라 1593년 6월 하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의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제사를 지낸다.<ref name='h383523' />
 
한편 진주에서 주둔한 지 2년이 다 되었건만 전투다운 전투는 하지 못하고 있었고, 명성을 드높일 기회인 장문포 전투에서도 초라한 성과를 거두자, 김덕령에 대한 조정의 신망은 갈수록 추락 일로였으나{{sfn|문화자원총람}}, 《선조실록》 [[1595년]](선조 28년) [[1월 8일]]과 [[2월 6일]]자 기사에 따르면, 선조는 아직도 김덕령을 계속 신임하였다.<ref name='h383523' />
 
==== 살인죄와 옥고 ====
[[1595년]](선조 28년) 지난해 고성 전투의 일로 선조로부터 충용군(忠勇軍)이란 군호를 받았으나,<ref name='kna_12612030_005' /> 아직 공을 세운 일이 없다는 이유로 별다른 기치나 표창은 받지 못했다.<ref name='kna_12612030_005' />
 
같은해[[1595년]] [[음력 1월 27일|1월 27일]]에 선조가 김덕령의 처자에게 식량을 주어 보살피자, [[음력 2월 3일|2월 3일]] 김덕령은 선조에게 사은 상소를 올린다.<ref name='s12802003'>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802003_006 선조실록 60권, 선조 28년 2월 3일 병오 6번째기사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충용장 김덕령이 상소하여 사은하다] </ref> 한편 그 상소에서 김덕령은 군량 부족을 호소하였고, 조정은 그에 답하여 전라도 담양(潭陽) 등 네 고을에서 그 곡식을 계속 운송하여 군량이 떨어지지 않게 하도록 명하였다.
 
==== 살인죄와 옥고 ====
 
[[1595년]](선조 28년) 말까지 진주에 둔전의 설치 등 전쟁에 대비하였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적었고, 의병 진영에서 장기전의 대비에 따른 피로의 누적으로 군율의 기강 해이되는 사건이 빈발하였다.<ref name='knb_12902001_004' /><ref name='gjsgcc' /><ref name='k1488812400599033249'> [http://www.kwangju.co.kr/article.php?aid=1488812400599033249 <nowiki> [전라도 들여다보기]</nowiki> 김덕령과 충장사 - 김형주] </ref> 그 해이해진 군사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군율을 엄하게 시행하여 도망치는 부하 몇 사람을 붙잡아 처벌하자, 막료와 군사들 사이에서는 불평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ref name='h384002'> [http://www.honam.co.kr/detail/etc/384002 호남정신 뿌리찾아-81. 김덕령, 살인죄로 옥에 갇히다] 무등일보, 2012.07.18. </ref> 비변사에 이것이 보고되자 서인과 동인을 막론하고 의병 대장 김덕령에 대한 비난을 쏟아 냈다. 그 뒤 윤근수가 체포하여 투옥할 때 서인은 그를 비난하였으나 동인의 재상들이 그를 옹호하였다. 이에 선조는 김덕령을 석방하였고, 이를 “제1차 김덕령 옥사”라고 부르기도 한다.<ref name='slwk' />{{refn | group="주" | 김덕령은 서인의 수장인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제자이며, 송강 정철의 동향 사람이다. 그런데 제1차 옥사 때 유성룡 등 서인은 그를 탄핵하고 동인은 그를 옹호하였다. 제2차 옥사 때는 동인과 서인 모두 그를 구명하지 않았고, 중립을 지키던 [[정탁 (정간공)|정탁]]·김응남 등이 김덕령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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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정조 12년) [[음력 11월 16일|11월 16일]]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마을에 [[광주 충효동 정려비각|‘증 병조판서 충장공 김덕령 증 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비석(충장공 정려비)]]을 세우게 명하였고, 이듬해 [[1789년]] 그 비가 세워졌다. 1792년에 처음 세워진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ref name='h386447' /><ref name='kva_11211016_002'>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211016_002 정조실록 26권, 정조 12년 11월 16일 갑술 2번째기사 1788년 청 건륭(乾隆) 53년 김덕령·김덕홍의 고향에 그들의 업적을 적은 비석을 세우게 하다] </ref><ref name='E0058260'>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8260 충효동정려비각(忠孝洞旌閭碑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f>
 
[[1789년]](정조 13년) 1월 11일 김덕령 부인의 직함(職啣)은 종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이고, 김덕령의 증직은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로 서로 어긋남을 이조판서 이갑(李𡊠)이 아뢰자, 그 청대로 [[wikt:자급|자급(資級)]]{{refn | group="주" | 자급(資級) : 가자(加資)의 등급. 곧, 벼슬아치의 위계(位階).}}을 종1품 [[좌찬성|의정부 좌찬성]]에 추증토록 [[wikt:하비|하비(下批)]]{{refn | group="주" | 하비(下批) : 인사 임용(人事任用)에 관한 임금의 재가(裁可). 곧 관원의 임용에는 3인의 후보자를 천거하여 그 중 한 사람의 낙점(落點)을 받아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나, 경우에 따라 단일 추천으로 임명하거나 혹은 특명으로 제수하는 경우에 내린 비지(批旨).}}하고<ref name='kva_11301011_005'>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01011_005 정조실록 27권, 정조 13년 1월 11일 무진 5번째기사 1789년 청 건륭(乾隆) 54년 이조 판서 이갑의 청으로 김덕령의 자급을 종1품으로 하다]</ref>,{{refn | group="주" | 《정조실록》과 《일성록》에서는 김덕령의 자급을 종1품으로 한다고 밝혔을 뿐 벼슬이름은 나타나 있지 않다.<ref name='kva_11301011_005' /> }}{{sfn|문화자원총람}} 김덕령의 제사를 영구히 지내고 절대로 신주를 옮기지 말라는 부조특명(不祧特命)을 내렸다.<ref name='gjsgcc' /><ref name='h386447' /><ref name='E0008931' />{{refn | group="주" | 여러 기록에서 부조특명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광주 의열사가 철폐되었기 때문에 그 신빙성이 의심스럽다.}} 장군이 태어난 마을 이름도 생계(牲繫)에서 오두(烏頭)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1789년]](정조 13년) 조정의 명령으로써 방손 한 사람을 선택하여 공의 제사를 받들어 대대로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는데, 그 사람은 김덕보의 아들 김거(金璩)의 7세손 김홍기(金洪基)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04006_002 정조실록 27권, 정조 13년 4월 6일 임진 2번째기사 1789년 청 건륭(乾隆) 54년 김덕령의 옛 신주의 매안 문제 등 상언한 19건을 판하하다]</ref><ref> [http://www.gjsgcc.or.kr/ko/29/view?SEQ=1610 김덕령-형조좌랑증좌찬성충장김공신도비명]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