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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선조 26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함에 따라, 조정에서는 경상도 서부를 방비할 장병이 부족해지자 호남에서 유능한 장수를 뽑아 경상도로 보내기로 하였다.<ref name='gjsgcc' /> 이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하려고 [[제2차 진주성 전투]] 과정 및 승전 후 진주 사람 수만 명을 죽였기 때문이다.<ref name='slwk' /> 8월에는 진주 전투에서 순국한 의병들의 의(義)로움을 잇다는 [[계의병]](繼義兵)이 일어났다.<ref name='E0003231'>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3231 계의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f>
 
그해 8월 노모마저 세상을 떠났다. 상중임에도 그의 자부(姉夫)인 [[김응회]](金應會)와 종조부 김윤경의 외손자인 송제민이 의병을 일으키라 권하고,<ref name='knb_12612001_002'>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612001_002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2월 1일 경술 2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광주 유생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키다] </ref> 아우 김덕보가 대신 삼년상을 치르기로 하자 거병을 결심한다<ref name='h380225' />. 10월에는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이 천거하여 그에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李廷馣)이 직접 찾아와서 국가의 위급함을 구제하도록 권면하였다<ref name='kna_12612013_009'>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2013_009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 13일 임술 9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전라 감사 이정암이 김덕령의 재주가 뛰어나니 군사를 책임지울 것을 청하다] </ref>.<ref name='gjsgcc' />
 
《[[난중잡록]]》에 따르면, 그해 [[음력 11월 4일|윤11월 4일]] 친구 최담령(崔聃齡) 등 수십 명과 함께 다시 의병을 담양에서 일으키고<ref name='h380225' />, 논밭을 팔아 무기를 마련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군사를 모집하니, 정병(精兵)이 1천여 명이 모였다.<ref name='kna_12701005_003'>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1005_003 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 1월 5일 갑신 3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무군사에서 김덕령에 종사하는 위대기 등에 대한 처리방법을 건의하다] </ref><ref name='h380627'> [http://www.honam.co.kr/detail/etc/380627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74. 세자 광해군, 김덕령에게 익호장군 칭호를 내리다] 무등일보, 2012.05.30. </ref><ref name='kna_12612013_009' />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도 김덕령을 적극 도와주었다. 관내의 병역기피자들을 색출하여 의병에 편입시키었고, 전쟁 물자를 많이 지원하여 주었다. 지역 유지들도 적극 도왔다. 송제민은 제주도까지 가서 말을 가져왔으며, 고봉 [[기대승]]의 아들 함재 [[기효증]]은 김덕령 의병의 도유사가 되어 각 지방에 통문을 보내어 양곡을 모았다.<ref name='h380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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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월 22일|1월 22일]] 김덕령은 1천 명의 전라도 의병을 거느리고 군량미 3천 석을 실은 후 전라도 담양에서 출발하여 순창을 거쳐 남원을 머문다. 남원에 머무는 동안 조방장(助防將) 곽재우의 군대에 합류하여 명령을 받겠다는 서신을 보내었고, 최담령을 별장으로 삼아 한 달 남짓 의병을 훈련 시킨다.<ref name='slwk' /> 2월초에 조정에서는 1593년 12월 27일 전주 무과시험 합격자 등을 김덕령의 군대에 합류시켜, 김덕령의 군대는 관군과 의병의 연합부대 성격을 띈다.<ref name='h381586' />{{sfnp|김영헌|2006|p=138|ps=: {{harvtxt|오수열|황태섭|2014|p=6}}에서 재인용.}}
 
[[음력 2월 2일|2월 2일]] 경상도 함안의 함안루에서 머물렀다.{{sfn|임진기록|p=22~23}}
 
[[음력 2월 7일|2월 7일]] 김덕령의 군대는 경상도 함양에 도착하여 도원수 권율 막하에 가서 도착 보고를 하고 왜적을 토벌할 계책을 논의했다.<ref name='h381586' /> 조정에서는 김덕령에게 진해·고성의 경계에 머물면서 경상도 거제, 진해, 함안 등지에서 노략질하는 일본군을 방어하도록 전교를 내린다.<ref name='h382067'> [http://www.honam.co.kr/detail/etc/382067 호남정신 뿌리찾아-77. 충용장 김덕령, 팔도 의병 총수 되다 - 광주 충장사] 무등일보, 2012.06.20. </ref> 이에 따라 김덕령의 별장인 [[최강 (1559년)|최강]](1559~1614)이 고성에 나아가 일본군을 무찌른다. [[오희문]]의 《[[쇄미록]]》에 따르면, 최강이 고성에서 왜적 90여 명, 창원에서 20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거두었다.<ref name='h3820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