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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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에서 [[신숭겸]]ㆍ[[김락]] 등 고려의 여덟 장수가 백제군에게 죽어 지역의 지명이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바뀌었다하며, 주변 지명엔 왕건의 다급한 상황을 전해주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ref>[[팔공산]] 인근의 지명 및 [[대구지하철]] [[대구 지하철 1호선|1호선]]역의 역명을 참조하라. </ref> 이 전투를 공산 전투 혹은 동수대전이라고 한다. 이 대승리를 통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견훤은 같은 달 대목군([[칠곡군]] 약목)을 탈취하고 곡식을 불사르거나 거두어갔다. 소목군([[구미시]] 인동)에도 역시 마찬가지 일을 다음 달에 행하였다. 11월에는 벽진군(성주)을 공격하여 장군 색상을 전사시킨다. 이렇게 다시금 [[서라벌]]로 가는 길이 확보되었고, 또한 남으로 강주까지 늘어진 고려군의 허리는 잘리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11월 7일에 오월에서 반(班)씨 성을 가진 상서가 도착해 고려와 후백제가 서로 화친할 것을 권하는 오월왕의 조서를 전했는데, 이 조서를 베껴 왕건에게 보내면서 견훤은 따로 왕건에게 보내는 글을 지어 함께 보냈다. 이 글은 [[최승우]]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앞서 고려군을 상대로 거둔 전승들을 열거하면서 승패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는 한편으로 "내 활을 평양성의 문루에 걸고 내 말에게는 대동강의 물을 마시게 할 것이다"라고까지 하는 등 자신감을 드러내는 견훤에게 [[928년]] 정월 왕건은 다시 장문의 답장을 보내 마찬가지로 고려가 후백제를 상대로 거두었던 승전 사실들을 열거하며 "아직 승패는 알 수 없다"며 응수하고 있다.
[[928년]] 1월에 강주를 구하러 가던 고려의 원윤 김상과 정조 직량 등이 초팔성(합천 초계)에서 성주 흥종에게 공격받아 전사했으며, 5월엔 강주의 원보 진경 등이 고자군에 양곡을 운반하러 간 사이에 견훤은 강주를 습격하여 진경의 군 3백여 명이 전사하고, 장군 유문 등은 항복하였다. 왕건은 공격 방면을 전환하려 시도하는 가운데 4월에 [[탕정군]](아산)으로 진출하였고 7월에는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후백제군에 패배하고 청주로 퇴각하였다. [[김훤]], [[애식]], 한장 등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청주를 공격했으나 탕정군에서 지원군을 거느리고 출정한 [[유금필]]의 반격으로 3백여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고 독기진까지 물러났다. 시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려사 [[박수경]] 열전을 보면 왕건은 삼년산성 전투 이후로 추정되는 발성전투에서 견훤군에게 또 포위되어 위기에 몰렸으나 박수경의 사력을 다한 구원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나온다.
[[왕건]]은 8월에 [[충주]]로 이동하여 다시 경상북도 일대의 전선을 노리기 시작하였으며,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장군 [[관흔]]으로 하여금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다. 이에 맞서 왕건은 명지성 원보 [[왕충 (고려 초기)|왕충]]으로 하여금 관흔을 쫓아내게 했으나, [[관흔]]은 퇴각하여 [[대야성]]을 다시 차지하고 대목군의 벼를 베었으며 죽령 인근의 오어곡에 군사를 주둔시켜 죽령을 봉쇄하였다. 이에 왕건은 왕충 등에게 [[조물성]] 일대의 정찰을 명하고 있다.
10월에는 후백제군이 무곡성(군위 악계)를 함락시켰고(《[[삼국사기]]》) 11월에는 견훤 자신이 정병으로 오어곡성(《[[고려사]]》, 《삼국사기》에는 부곡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고려군 1천여명을 죽였으며, 이 무렵에 고려의 장군 [[양지]]와 명식 등 6인이 항복해왔다. 《[[고려사]]》는 이때 왕건이 군사들을 왕궁 구정에 불러모으고 양지와 명식 등 여섯 장수의 처자식들을 군사들 앞에서 조리돌린뒤 저자에서 참형을 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ref name="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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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 [[견신검]]의 정변 ====
[[운주 전투]]후 자신의 한계와 고령의 나이를 절감한 [[이훤|견훤]]은 자신의 뒤를 이를 후계자를 물색해 그의 아들들중 넷째 아들 [[견금강|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빼어나다 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맏아들로 군무에 경험이 많던 [[신검]], 그리고 변방에서 도독직을 역임하여 역시 군무에 경험이 많던 것으로 보이던 [[양검]] · [[용검]]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양검과 용검은 각각 강주도독과 무주도독으로서 군을 이끌고 나가 있었고 신검만 [[완산주]]에 남아 있었는데, 이찬 [[능환]]이 양검 및 용검과 음모를 꾸며 군을 움직였고, 이어 파진찬 [[신덕]] 및 [[영순]]과 더불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935년]] 3월, 견훤의 나이 69세 때의 일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신검의 쿠데타가 일어나던 때의 모습에 대해,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혼미한 상태에서 멀리 대궐의 뜰에서 고함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은 견훤이 "이것이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고, 신검이 견훤에게 "왕께서 연로하시어 군무와 국정에 혼미하므로 맏아들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에 여러 장수들이 축하하는 소리입니다. "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곧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어 파달 등 장사 30명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ref>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왕위 계승 문제 뿐만 아니라, 이후 견훤의 행보를 볼 때 고려와 강화를 하거나 항복을 하자는 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근왕파와 계속 전쟁을 하자는 강경파 사이의 대립이 이 정변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이는 견훤의 발언에도 근거를 두고 있는데, "늙은 아비가 [[신라]] 말년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군사가 북쪽의 고려보다 배나 많은데도 오히려 불리하니, 이는 아마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다. 그러니 어떻게 북쪽 왕에게 귀순하여 목숨을 건지지 않겠는가?"라고 아들들에게 발언하였으나, 신검, 양검, 용검은 모두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미 [[935년]] 음력 6월에 백제를 떠났던 견훤이 시기상 할 수 없는 발언이고, 신검의 정변 이전에 고려에 항복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역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으나, [[934년]] 이후 견훤이 통일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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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견훤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다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신라]]와 [[고려]]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에게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 대중문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