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쿠 다 가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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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항로 개척 ===
[[파일:Spain and Portugal.png|썸네일|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한 영토 경계설정 (보라색 실선)]]
[[희망봉]] 발견(1488년)으로 인해 인도로 향하는 신항로는 곧 열릴 듯했다. 그러나 1491년 7월 아폰소 왕세자가 낙마사하자, 후계자 문제<ref>송동훈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p153~156 외동아들이었던 아폰수 왕자가 1491년 낙마사고로 사망하자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귀족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후계자를 왕위계승자로 만들고자 소리없는 전쟁을 벌였다. 물론 현시점에 왕위계승 서열 1순위자는 사촌동생이자 매제인 마누엘(훗날 마누엘 1세)이었다. 그러나 주앙 2세는 마누엘이 군주로서 자질이 너무 부족해보였다. 그래서 서자이지만 총명한 조르즈(Jorge)를 교황의 허락을 통해 적자로 만든후 왕위를 계승시키고자 했으나 왕비(마누엘의 누나)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만일 서자인 조르즈를 즉위시킬 경우에 자신(주앙 2세)의 사후에 정통성 시비로 인한 내전이 벌어질 확률이 높았다. 결국 주앙 2세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ref>로 정국이 어수선해진 가운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콜럼버스]] 탐험(1492년)의 결과로 인해 발생한 스페인과의 영토분쟁은 해양탐사 사업이 정체되는 원인이 되었다. 1494년 6월에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함으로 영토분쟁은 해결되었으나 이듬해 1495년 10월에 국왕 [[주앙 2세]](1455~1495)가 사망함으로 다시 추진력을 잃고 말았다.
 
포르투갈의 신항로 개척은 종제(從弟)의 자격으로 즉위한 [[마누엘 1세]]에 의해 적극적으로 재추진되었다. 그는 선왕의 충신이였던 바스쿠 다 가마를 인도 원정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후 신항로 개척을 명하였다. 막중한 사명을 부여 받은 바스코 다 가마는 2여년간 항해에 대한 정보를 꼼꼼하게 수집하고 치밀하게 원정준비를 했다. 출발하기 전날은 일행들과 함께 [[주앙 1세]](1357~1433)가 세운 산타 마리아 성당<ref>[네이버 지식백과]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벨렘탑 [Monastery of Hieronymites and Tower of Belem] (두산백과)....마누엘 1세가 증개축하여 제로니무스 수도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이곳에는 마누엘 1세와 바스쿠 다 가마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ref>에서 기도로 밤을 보냈으며<ref>Centro de eLearning do Instituto Politécnico de Tomar (2011), p1.</ref><ref>Frederic Pedro Marjay (1972). Lisbon and Its Surroundings. Livraria Bertrand, Sarl. pp. 9–10</ref> 드디어 1497년 7월 8일 리스본의 벨렝항을 출발하였다. 그의 함대는 170명의 선원과 4척의 함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