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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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esen.jpg|섬네일|[[화신 (청나라)|뇨후루 허션]]]]
[[1774년]](건륭 39년) 당시 감숙성은 가난한 지역으로 매년 북경의 군기처나 호부로부터 구호 자금을 받아서 사무를 처리하였다. 그리고 감숙 순무인 [[왕단망]](王亶望)이 매년 그러하듯 건륭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구호 자금을 얻었으나 돈은 정작 구호에 쓰이지 않고 왕단망의 창고로 넘어갔다. 그러나 왕단망은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구호 내역을 조작하여 건륭제에게 올렸고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건륭제는 왕단망을 절강성 순무로 바꿨으나 후임자에 이르러 뇌물수수 사건이 밝혀졌는데 [[1774년]](건륭 39년)에서 [[1781년]](건륭 46년)까지 7년 동안 왕단망 개인이 착복한 돈은 2백만 냥이 넘었고 감숙성의 전체 관리가 축적한 돈은 1500만 냥이나 되었다.<ref name="검찰일보"/> 순무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안 건륭제는 대노하여 왕단망을 비롯한 2만 냥 이상을 빼돌린 감숙성의 관리들은 모조리 사형에 처하는 등 강수를 두었다. 그 이후 건륭제는 군기처에게 각 성의 총독·순무가 제대로 보고를 올리는지 그 작년의 것과 대조하라 지시하였으나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하지는 않았기에 흐지부지되었다.
 
그리고 건륭제는 자신의 재위 후반기 내내 큰 영향력을 행사한 [[화신 (청나라)|뇨후루 허션]](和珅)에게 절대적 신임을 보냈다. 화신은 금군의 삼등시위로 시작하여 27세인 [[1776년]](건륭 41년) 호부시랑이 된 이후로 계속 호부를 장악하며 국고를 책임졌고 왕단망의 뇌물수수사건을 철저히 밝혀내어 그 돈을 국고로 환수하는데 일조하였다. 이에 힘입어 [[1780년]](건륭 45년)에는 불과 31세에 호부의 수장인 호부상서가 되면서 각지의 총독·순무에게 일정한 돈을 지불하면 대역죄를 제외한 모든 죄를 사면하는 방식으로 돈을 모아 자신의 창고에다가 쌓아두었으나 호부상서의 직분을 게을리하지는 않아 국고가 비었을 시에는 자신의 창고를 열어 국고에다가 돈을 보내어 메꾸었다. 한편으로는 황제에게 바쳐지는 1등급 진상품을 빼돌려 자신의 집에 보내고 건륭제에게는 2등급을 대신 바쳤다.<ref>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331쪽</ref> 허션은 백성들의 세금을 대폭 올리고 관리들에게 자주 뒷돈을 받아서 반대파 대신들에게는 중상모략을 일삼는 부정부패의 원상이었으나 [[중국어]], [[만주어]], [[몽골어]], [[티베트어]]등 4개 국어에 능통하여 건륭제가 내리는 국서를 직접 번역하여 보내는 등 업무처리능력이 뛰어나 수상급인 영시위내대신, 수석군기대신과 여러 문관과 무관의 관직을 겸직하며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강희제와 옹정제 내내 크게 위축되어 온 신권을 다시 강화하였다. 또한 화신의 장남인 [[풍신은덕]]이 건륭제가 65세에 얻은 가장 총애하던 막내딸인 [[고륜화효공주]]와 혼인함으로써 황실의 인척이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와 더불어 건륭제 자신도 재위 초반기에 옹정제의 기풍을 이어받아 관리들을 잘 단속한 것과 달리, 말년에는 재산의 축적에 크게 집착하여 자신의 생일 때에 황금 불상 1만 개를 받았다.<ref>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332쪽</ref>
 
부정부패가 계속되자 반청 세력이 계속 나타났는데 [[1774년]](건륭 39년) [[왕륜]](王倫)이라는 자가 관리들의 부정부패, 무거운 세금 등으로 사람들을 규합하고 이미 쇠망한 [[백련교]]를 다시 일으켰으나 건륭제의 대처로 손쉽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백련교를 비롯한 다른 반청 세력들도 은밀히 세력을 규합하는 등 건륭제 말년까지 계속 지방에서 산발적인 분쟁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