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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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열(2004)에서는 정리소조의 의견을 인용해서 패군 차현, 김용찬(2007)에서는 정리소조의 의견을 반박하고 남양군 찬현으로 보는데, 어느 게 옳을지 판단하기 어려워 둘 다 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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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蕭何, ?~[[기원전 193년]])는 [[진나라|진]](秦) 말기에서 [[전한]] 초기에 걸쳐 활약한 정치가이다. [[전한 고제|유방]]의 참모로서 그가 천하를 얻도록 도왔으며, 전한의 초대 상국을 지냈다. [[한신 (회음후)|한신]], [[장량]]과 함께 한의 삼걸(三傑)로 꼽힌다. [[시호]]는 '''차문종후찬문종후'''(酇文終侯) 또는 차문종후다.
 
==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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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06년]], 진이 멸망하고 유방이 항우에 의해 한왕(漢王)에 봉해지자, 소하는 승상으로서 내정 일체를 맡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후영]]이 한신을 천거해 오자, 소하는 그를 유방에게 천거하지만, 자신이 받은 한미한 직책에 불만을 품고 도망치려는 한신을 잡아두기 위해 소하는 "이번에도 제대로 중용되지 못한다면 나도 한을 떠나겠다"고까지 유방을 설득해, 끝내 한신이 유방 진영의 대장군 지위에 오르게 한다. 한신이 이렇다 할 출신 배경이나 전장에서 세운 특별한 공적이 없었을 뿐더러 [[서초 (초한)|초나라]] 일개 잡병(雜兵)에 불과했고 , 한에서도 하급 무사에 지나지 않았으나 유방이 그를 크게 중용한 데에는 유방이 평소 소하를 얼마나 신뢰하고 의지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유방이 군세를 거느리고 관중(關中)에 입성할 때 소하도 함께 했다. 초한전쟁이 격화되면서 유방이 전쟁터로 나가 관중을 비운 동안에 소하는 태자 [[전한 혜제|유영]]을 보좌해 그곳을 지켰다. 관중에서도 소하의 행정 수완은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며, 관중에서 유방이 있는 전장으로 식량과 병사가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후방에서 지원했으며, 관중의 백성을 괴롭히는 일도 없어 명승상으로까지 칭송받았다. [[기원전 202년]], 마침내 유방 진영의 승리로 초한 전쟁은 끝났고, 전공을 논하는 자리에서 전장에서 활약한 여러 장수들을 제치고 소하가 제일 공신으로 천거된다. 소하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군수물자 보급, 근거지인 관중 땅의 안정 없이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라는 유방의 이해와 판단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이때 소하는 당시 [[남양군 (중국)나라의 내사지에|남양군]]에 있는 (酇) 땅(지금의{혹은 허난성양나라 융청시내사지에 서쪽에있는 있음차(酇) 땅}을 영토로 삼는 [[열후|후]](酇侯, 또는 차후)로 봉해지고 식읍 7천 호를 하사받았으며, 그 일족 수십 명도 각각 식읍을 받았다.
 
=== 한의 상국으로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