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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한국외대]] [[반병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 (1880년)|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 (1880년)|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ref name="han21515"/> [[박노자]]는 이를 두고 '동족 테러'라고 비판했다.<ref name="han21515"/> 그에 의하면 자금 문제를 놓고 그 뒤에도 우파 민족주의자들에게 '동족 테러' 가 빈번히 이용됐다는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무장 독립운동의 비극적인 이면<ref name="han21515"/> 이라는 것이다.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김립 (1880년)|김립]]이 사치, 향락을 하고 광동인 첩을 사서 즐겼다고 하였으나, [[김립 (1880년)|김립]]이 축첩을 했다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 김구 부하의 옥관빈 암살(1933)
[[파일:옥관빈.JPG|썸네일|왼쪽|120px|[[옥관빈]]]]
옥관빈이 암살당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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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인성학교]]에 돈을 준 [[옥관빈]]은 우리나라 신문을 이용하여 자기를 과대선전하고 독립운동가를 비방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ref name="hoi404">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4페이지</ref> 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를 했다.<ref name="hoi405">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5페이지</ref>}}
어느 날 이를 보다못한 김구가 [[정화암]]을 찾아갔다고 주장한다.<ref name="hoi405"/> 김구는 즉석에서 [[정화암]]에게 [[옥관빈]]을 죽이자고 제의하였으며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한 그 언동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거 주장했다.<ref name="hoi405"/> [[정화암]]은 동의하였고, 백범하고 [[정화암]]과 [[안공근]] 셋이서 이야기를 하며<ref name="hoi405"/> 이어 [[옥관빈]] 암살을 지원하였다고 주장한다. [[옥관빈]]은 그해 [[8월 1일]] 불조계에 살던 다른 [[흥사단]]원 이모의 처를 만나 몰래 간통하고 나오던 길에 남화한인동맹원 [[엄형순]] 등의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고 주장한다.<ref>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8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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