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관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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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혹은 밀정여부: "위키백과에서는 마치 소수의 견해가 다수파의 견해만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분쟁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150여명이 편찬위원회에 참여한 친일인명사전과 대한민국 정부가 발족한 위원회의 보고서가 우선되어야 하며 "소수설"분류는 위키백과 중립정책에서 위반이 아니고 오히려 동등하게 서술하는 게 위반이다. [위키백과:중립적 시각]
→‎친일파 혹은 밀정여부: "적절한 비중으로 작성하고 부적절한 비중으로 쓰지 말라는 이야기는 폭넓게 인정되는 견해나 다수가 지지하는 견해를 극히 적은 사람이 지지하는 의견이나 소수 의견과 동등한 비중으로 많이 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위키백과에서는 마치 소수의 견해가 다수파의 견해만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분쟁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위키백과:중립적 시각 이에 의하면 150명의 합계 결론과 정부 보고서에 반대되는 10명 미만의 학자를 동등하게 서술하는 건 금지다. / 옥관빈에 대한 옹호적인 견해 서술도 마찬가지인데 계파 갈등이란 주장을 서술할거면 무조건 학자의 견해를 서술해야한다. 실제 그런 주장이 존재하는 여부는 상관없음. 무조건 인용해야 서술해야하며 인용이 아니면 옥관빈을 옹호하던 유리한 자료던 상관없이 무조건 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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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학교수이기도 한 [[이순탁]]은 [[1933년]]초 세계일주 당시 상해에서 당시 '40여개국 사람들이 모여서' 번성하는데, 조선인들이 여기 그중에 끼지못해 눈물겹다면서 상해교통대학에서 체육부주임으로 있던 신국권과 함께 옥관빈 두명의 성실성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순탁]]은 귀국후 이들의 성공을 기원하며 동포들의 노력을 촉구하기도 했다.
== 친일파 혹은 밀정여부 ==
=== 친일파정부와 혹은 친일파 밀정여부에 대한대다수학계의 진상규명결과 ===
백범일지에는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이 주장되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ref>김구,도진순, 《백범일지》,돌베개,2002</ref> 대한민국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선 옥관빈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ref>《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ⅱ,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1,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2,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3,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4, 2009</ref>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420</ref>에는 옥관빈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ref>《친일인명사전 1》;《친일인명사전 2》;《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