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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관빈(玉觀彬, 1891년 1월 18일[2] - 1933년 8월 1일)은 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기업인이었다. 1911년 105인 사건 관련자의 한사람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 고문을 당했으나 동료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는 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승훈·임치정 등 6명과 함께 주모자로 몰려 4년의 징역 선고를 받고 복역했다.[3] 그러나 나중에 그는 밀정으로 변질되었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옥관빈
출생1891년 1월 18일
조선 평안도 평양부[1]
사망1933년
중국 상하이
성별남성
국적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별칭옥혜관
직업독립운동가, 계몽운동가, 사업가

1920년대 후반부터는 독립운동에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고 일부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댄다는 것을 자랑삼아 떠벌리며 나라도 되니까 너희에게 돈을 주는게 아니겠느냐며 무시하다가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또한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비방하고 다니기도 했다.[4] 그 뒤 기업을 운영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제에 발설했으며, 1933년 흥사단원인 다른 독립운동가 이모의 부인과 간통하고 나오던 중, 그를 추척하던 엄형순(嚴亨淳) 등의 총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별칭은 '옥혜관'이다.

생애편집

애국 계몽 활동편집

1905년(광무 8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조약 반대 운동에 동참하였다. 그 뒤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예수교회의 전국대회는 구실이었고 그 내실은 '을사 5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5] 이때에 상동교회에 모인 인물은 전덕기(全德基), 정순만(鄭順萬), 이준(李儁), 이동녕(李東寧), 김구(金龜), 최재학(崔在學), 계명륙(桂明陸), 김인집(金仁楫), 옥관빈, 이승길(李承吉), 차병수(車炳修), 조성환 등이었다.[5]

언론, 계몽 활동편집

1906년(광무 9년) 대한매일신보의 총무 운강(雲崗)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매일신보의 집필진의 한사람으로 칼럼을 기고하였다. 당시 매일신보의 편집진은 박은식(朴殷植), 최익(崔益), 옥관빈(玉觀彬), 변일(卞一), 신채호, 장도빈(張道斌) 등이 있었고 영업진에는 양기탁(梁起鐸), 임치정(林蚩正), 안태국(安泰國) 등이 있었다.

신채호는 황성신문이 정간당하자 곧 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겨 박은식, 최익(崔翼), 옥관빈, 장도빈 등과 함께 불을 뿜는 듯한 항일의 붓을 휘둘렀다.[6] 신채호 등의 영입으로 매일신보는 더욱 활기를 띠었고, 그는 수시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조선 침략 야욕을 조롱하는 글을 올려 일제 당국의 감시를 당했다.

1909년(융희 3년) 안창호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고 서기[7]에 취임하였다. 이어 청년학우회흥사단으로 바뀌자 흥사단의 창립 멤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고,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일제 강점기 활동편집

체포와 투옥편집

1910년 안명근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평안남도에서 안태국과 함께 체포되었다.[8] 열차에서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다.

1911년 105인 사건이 발생하자 사건 관련자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 고문을 당했으나 동료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 뒤 보안사건으로 또 재판을 받을 때는 양기탁을 비롯하여 안태국, 김구, 김홍량, 주진수, 김도희, 김용규, 고정화, 정달화, 감익룡 등과 함께 출석했다.[9] 이때 그는 양기탁, 안태국, 김구 등과 함께 2년형을 선고받았다.[9]

그 뒤 2년형을 살고 있던 중 양기탁, 안태국 등과 유배형에 처했던 이승훈 등과 함께 다시 끌려가 심문을 당했다.[10] 1913년 7월 15일에 열린 공소심 최종 공판에서 윤치호, 이승훈, 양기탁, 임치정, 안태국 등 5명에게 징역 6년, 옥관빈에게는 징역 5년이 선고되고, 나머지 99명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다.[11] 그는 4년형을 살고 출소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활동편집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고, 상하이 임시 정부 창립에 가담하였다. 또한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독립신문이 창간되자 독립신문사의 총무로 참여하였다. 1921년 이후 임시정부에 대해 창조파와 개조파, 고수파가 논란이 벌어지자 그는 임정 고수파의 한사람으로 잔류하였다. 국민대표대회는 이런 저런 요구를 임정에 하였고, 그는 임정 고수파의 한사람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안창호, 신익희, 김구, 원세훈, 김규식, 오영선, 이탁, 이동녕, 여운형, 조소앙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12] 그러나 시사책진회는 제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그해 8월 11일 해산된다.

1922년 6월 19일 옥관빈은 유호청년대회 앞으로 보낸 건의서에서, 1 의정원 의원 모두를 사퇴시키고, 2 각지에 통보해 의원 및 명사를 (새로) 선출하게 하여 의정원을 충실하게 하며, 3 헌법제도를 수정하여 시의에 맞도록 하고, 4 대통령의 임기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3] 또 의정원이 충실해져 시국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청년대회에서 선출한 위원이 국무원의 사무직권을 수행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13]

옥관빈의 명성을 보고 직접 함께 활동해본 도산 안창호는 여러번 옥관빈을 찾아가 자신의 흥사단에 가입할 것을 권고했다. 옥관빈은 처음에는 주저하였으나 흥사단에 가입하게 된다. 그러나 임시정부 문제를 놓고 안창호가 개조론에 섰을 때는 개조론에 서지는 않는다.

상하이 임시정부 내의 파벌 다툼과 독립운동계 내부의 세력 다툼에 염증을 느낀 그는 이후 독립운동에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임정 이탈 이후편집

1921년부터 그는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임정 이탈 이후에도 그는 임정과 관계하려 하였다. 옥관빈은 안창호를 통해 임정과 인성학교에 대한 경제적 후원을 제의해왔다.[14] 그러나 중론에 따라 인성학교는 그 돈을 받았고 임정은 받지 않았다.[14] 그해 12월 무역회사인 합명회사배달공사(合名會社倍達公司)를 개업하고 총경리(總經理)가 되었다. 그 뒤 그는 상하이에서 독일과의 무역을 하는 삼덕양행과 의약품 제조 업체 불자약창을 개설 운영하는 자본금 30만원 규모의 자산을 모아 거상으로 성장했다. 당시 각종 사회사업에도 돈을 투자하여 명성을 날렸으며 상하이 한인 교민사회의 저명인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옥혜관'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졌다.

1923년 3월 16일부터 3월 18일까지 '수공업진흥책에 대하여(전 3회)'라는 주제로 조선일보에 칼럼을 기고하였다.[15]

그러나 임정과 인성학교 등에 자금을 지원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독립운동가들을 비웃는 말을 하게 된다.

인성학교에 돈을 준 옥관빈은 우리나라 신문을 이용하여 자기를 과대선전하고 독립운동가를 비방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14]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를 했다.[16]

상하이 임시정부가 자금난에 쪼들리자 그는 김구에게 아편같은 마약 밀매로 돈을 벌어보는 것은 어떤지를 물었다. 아편장사를 하던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를 불쾌하게 여겼던 김구는 그의 제안에 분노하였다. 그는 이승만에게도 임정에서 미국에 마약밀매를 해보면 어떻냐는 제안을 했다. 이승만은 대답도 하지 않고 연락을 끊어버렸다.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갈등편집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자랑과 허영을 못마땅하게 봤던 그는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14]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했다.[16] 이는 그대로 김구임시정부, 의열단, 아나키스트들의 귀에도 그대로 들어갔다. 임정에서 탈퇴한 뒤로 옥관빈은 흥사단 활동 등 일부를 빼고는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고 때로는 일본 기업인들과도 교류를 했다. 더구나 옥관빈의 형 한명은 불조계에서 형사로 취직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무역업으로 매상을 올려 재산이 계속 늘었다.

임정의 처지가 딱해진 것을 알게 된 안창호는 임정 창립 멤버의 한사람으로, 역시 임정 창립멤버 그의 도움을 받아들이자고 여러번 권고하여 임정에서는 난처해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상하이에서 유명 인사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수백 명의 제약회사 노동자를 거느리고 있고, 많은 돈을 써서 신문사를 포섭하여 상하이의 고급 관리는 물론 재계와 종교단체까지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6] 호화스러운 저택과 고급 승용차에 거만한 언동 등 그의 위세는 너무나 당당했다.[16]

어느 날 이를 보다못한 김구정화암을 찾아갔다.[16] 김구는 즉석에서 정화암에게 옥관빈을 죽이자고 제의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한 그 언동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16] 정화암은 동의하였고, 백범하고 정화암과 안공근 셋이서 이야기를 했다.[16]

생애 후반편집

일제에 대한 협력 의혹편집

1933년 7월 22일~7월 23일 경 옥관빈이 일본 군대를 위하여 약 2만원의 재목을 제공하고 일본 관헌에게 혁명운동에 관한 밀정행위를 한 사실이 포착되었다.[17] 이에 오면직엄형순정화암과 연락을 취하면서 옥성빈(玉成彬, 옥관빈의 형)의 집 맞은 편 중국인의 집 2층에 수일간 잔복하며 사살할 기회를 엿보았다.[17]

간통과 최후편집

상해삼덕양행(三德洋行)을 운영하며 일본인들과도 교류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댄다는 것을 자랑삼아 떠벌리며 나라도 되니까 너희에게 돈을 주는게 아니겠느냐며 무시하다가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그 뒤 기업을 운영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제에 발설했으며, 1933년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근처에 살던 흥사단원인 다른 독립운동가 이모의 부인과 간통하고 나오던 중, 그를 추척하던 엄형순(嚴亨淳) 등의 총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정화암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정화암의 사촌동생의 뒷집에 살던 다른 흥사단원 이모의 처와 불륜관계에 있었다.[18] 흥사단원인 이모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작은 세발 자전거 생산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가 공장 일을 보러 가는 사이 그의 부인과 간통을 한 것이다.

백범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우리는 작전을 세웠지요. 양여주, 다른 이름으로는 오면직, 그리고 엄형순이 옥관빈 살해의 책임을 맡았지요. 옥관빈의 동정을 살피기 두 달 뒤 우리는 이놈이 제 사촌동생 집 뒷쪽 정자칸방에 사는 흥사단원 이 아무개의 처와 불륜관계에 있음을 알아냈지요.[18] 이 아무개는 한구(漢口)의 조그만 세발자전거 공장을 열고 있어 집에 없었던 겁니다. 1933년 8월 1일 밤 열두 시가[18] 넘은 깊은 밤, 정을 통하고 나오는 옥관빈을 엄형순이 그냥 쏘아 죽였지요.[19] 즉사지요.

8월 1일 밤 12시(8월 2일 0시 경) 불조계의 이모씨의 처와 간통하고 나오던 중 이모의 집 근처에 숨어있던 엄형순의 총격을 받았다. 총소리에 놀란 동네 주민들과 경찰관들이 '강도야! 도적이야!' 소리치며 몰려오자 엄형순은 '강도가 저 쪽으로 뜁디다'고 말하고는 유유하게 나왔다.[19] 정화암은 곧 옥관빈의 죄상이 이러이러해서 서간단이 죽였노라고 발표하였다.[19] 신문에는 그가 간통하고 나오다 암살되었다고 보도하지 않고, 그 근처에 있던 친척집을 방문하다가 암살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옥관빈의 사촌 옥성빈의 집도 근처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 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가 일제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근거는 불확실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당시 소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윤치호 역시 그를 일제의 밀정으로 지목했다. 독립운동가들을 도와주는 듯 하면서 그 정보를 일제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그해 12월에는 그의 친형 옥승빈, 사촌 형 옥성빈 등도 역시 밀정 혐의로 남화한인연맹 단원에 의해 암살당했다.

불조계 공부국에서 형사로 근무하던 옥관빈의 형 옥성빈은 독립운동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1933년 12월 18일 김해산(金海山, 金文熙)의 집 입구 노상에서 저격했[17]던 것이다.

사후편집

시신은 철도를 통해 육로로 운구되어 신의주를 거쳐 그해 10월 평양에 도착, 중화군에 안장되었다.

옥관빈 살해 사건은 그가 기독교계 실력자이던 관계로 상하이 한국인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20] 옥관빈이 동료 흥사단 단원 이모의 처와 간통한 사실이 상하이 교민사회에 알려지면서 일부 독립운동가나 기독교인사들에 대한 야유와 조소가 가해졌다. 또한 안창호조병옥 등의 열성적 활동으로 널리 알려졌던 흥사단 역시 싸구려 친목단체로 격하, 폄하당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상해연맹에서는 8월 9일[20] 한인제간단의 명의로 '역도 옥관빈의 죄상을 선포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각 방면에 살포하여 옥관빈의 주구적 죄상을 만천하에 폭로하였다.[17] 옥관빈의 죄상으로 지목된 것을 6개조 죄목으로 만천하에 폭로했다.[20]한인애국단과의 합작하에 이루어졌던 이 사건이 한인제간단의 명의로만 발표됨으로써, 이후 김구측과 상해연맹의 관계가 틀어져 1933년 11월 김구에 의해 오면직이 소환당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17][20]

평가편집

정화암은 그를 '그는 원래 청년 독립운동가였는데, 어느 새 매국노가 되어 거부(巨富)가 되었습니다.[21]'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교수이기도 한 이순탁1933년초 세계일주 당시 상해에서 당시 '40여개국 사람들이 모여서' 번성하는데, 조선인들이 여기 그중에 끼지못해 눈물겹다면서 상해교통대학에서 체육부주임으로 있던 신국권과 함께 옥관빈 두명의 성실성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순탁은 귀국후 이들의 성공을 기원하며 동포들의 노력을 촉구하기도 했다.

참고편집

옥관빈이 등장하는 대중문화 작품편집

각주편집

  1. 上海의 中央에 朝鮮人大商會 동아일보, 1931년 1월 5일 작성
  2.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3.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한길사, 2009) 35페이지
  4.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399페이지
  5. 신용하, 《백범 김구의 사상과 독립운동》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21페이지
  6. 송건호,《송건호전집 15》 (한길사, 2002) 381페이지
  7. 청년학우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8. 김구 저, 《백범일지》 (배경식 역, 너머북스, 2008) 336페이지
  9. 김구 저, 《백범일지》 (배경식 역, 너머북스, 2008) 361페이지
  10. 김구 저, 《백범일지》 (배경식 역, 너머북스, 2008) 374페이지
  11. 김구 저, 《백범일지》 (배경식 역, 너머북스, 2008) 376페이지
  12. 시사책진회
  13. 유영익,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224페이지
  14.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4페이지
  15.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저,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역사비평사, 2009) 68페이지
  16.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5페이지
  17.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저, 《1930년대 예술문화운동》 (국학자료원, 2003) 273페이지
  18.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8페이지
  19.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9페이지
  20. 이호룡, 《절대적 자유를 향한 반역의 역사》 (서해문집, 2008) 94페이지
  21.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399페이지

관련 서적편집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소명출판, 2008)
  • 김구, 《백범일지》 (배경식 역, 너머북스, 2008)
  • 유영익,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224페이지
  •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