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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설: '친일파 변절'이란 서술한 73)자료에 옥관빈 친일이란 주장없음. 25 자료에도 옥관빈 친일이란 주장이 없음. 인용이 아닌 독자연구임에도 "인용"이라고 자료날조를 하였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에서 정화암 증언이 검토됐다는 증거. 검토결과 옥관빈이 제외됐다는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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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임시정부 내의 파벌 다툼과 독립운동계 내부의 세력 다툼에 염증을 느낀 그는 이후 독립운동에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 임정 이탈 이후 ====
[[1921년]]부터 그는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임정 이탈 이후에도 그는 임정과 관계하려 하였다. 옥관빈은 [[안창호]]를 통해 임정과 [[인성학교]]에 대한 경제적 후원을 제의해왔는 증언이 있다.<ref name="hoi404">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4페이지</ref> 그러나 중론에 따라 [[인성학교]]는 그 돈을 받았고 임정은 받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다.<ref name="hoi404"/> 그해 [[12월]] 무역회사인 합명회사배달공사(合名會社倍達公司)를 개업하고 총경리(總經理)가 되었다. 그 뒤 그는 상하이에서 독일과의 무역을 하는 삼덕양행과 의약품 제조 업체 불자약창을 개설 운영하는 자본금 30만원 규모의 자산을 모아 거상으로 성장했다. 당시 각종 사회사업에도 돈을 투자하여 명성을 날렸으며 [[상하이]] 한인 교민사회의 저명인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옥혜관'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졌다.
 
[[1923년]] [[3월 16일]]부터 3월 18일까지 '수공업진흥책에 대하여(전 3회)'라는 주제로 [[조선일보]]에 칼럼을 기고하였다.<ref>역사비평 편집위원회 저,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역사비평사, 2009) 68페이지</ref>
 
 
== 정화암의 주장에 대한 학계 검토 ==
=== 생애주장 후반요약 ===
[[1921년]]부터 그는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임정 이탈 이후에도 그는 임정과 관계하려 하였다. 옥관빈은 [[안창호]]를 통해 임정과 [[인성학교]]에 대한 경제적 후원을 제의해왔는 증언이 있다.<ref name="hoi404">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4페이지</ref> 그러나 중론에 따라 [[인성학교]]는 그 돈을 받았고 임정은 받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다.<ref name="hoi404"/> 그해 [[12월]] 무역회사인 합명회사배달공사(合名會社倍達公司)를 개업하고 총경리(總經理)가 되었다. 그 뒤 그는 상하이에서 독일과의 무역을 하는 삼덕양행과 의약품 제조 업체 불자약창을 개설 운영하는 자본금 30만원 규모의 자산을 모아 거상으로 성장했다. 당시 각종 사회사업에도 돈을 투자하여 명성을 날렸으며 [[상하이]] 한인 교민사회의 저명인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옥혜관'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졌다.
 
그러나 임정과 인성학교 등에 자금을 지원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독립운동가들을 비웃는 말을 하게 된다는 증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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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인성학교]]에 돈을 준 옥관빈은 우리나라 신문을 이용하여 자기를 과대선전하고 독립운동가를 비방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ref name="hoi404"/>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를 했다.<ref name="hoi405">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5페이지</ref>}}
 
 
====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갈등 증언 ====
{{참고|흥사단}}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자랑과 허영을 못마땅하게 봤던 그는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ref name="hoi404"/>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했다는 증언이 있다.<ref name="hoi405"/> 이는 그대로 [[김구]]나 [[임시정부]], [[의열단]], [[아나키스트]]들의 귀에도 그대로 들어갔다. 임정에서 탈퇴한 뒤로 옥관빈은 [[흥사단]] 활동 등 일부를 빼고는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고 때로는 일본 기업인들과도 교류를 했다. 더구나 옥관빈의 형 한명은 불조계에서 형사로 취직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무역업으로 매상을 올려 재산이 계속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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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이를 보다못한 [[김구]]가 [[정화암]]을 찾아갔다.<ref name="hoi405"/> [[김구]]는 즉석에서 [[정화암]]에게 옥관빈을 죽이자고 제의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한 그 언동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ref name="hoi405"/> [[정화암]]은 동의하였고, 백범하고 정화암과 [[안공근]] 셋이서 이야기를 했다.<ref name="hoi405"/>
 
=== 생애 후반 ===
==== 일제에 대한 협력 의혹 ====
[[1933년]] [[7월 22일]]~[[7월 23일]] 경 옥관빈이 [[일본]] 군대를 위하여 약 2만원의 재목을 제공하고 [[일본]] 관헌에게 혁명운동에 관한 밀정행위를 한 사실이 포착되었다.<ref name="inlgun00273">한국민족운동사학회 저, 《1930년대 예술문화운동》 (국학자료원, 2003) 273페이지</ref> 이에 [[오면직]]과 [[엄형순]]은 [[정화암]]과 연락을 취하면서 옥성빈(玉成彬, 옥관빈의 형)의 집 맞은 편 중국인의 집 2층에 수일간 잔복하며 사살할 기회를 엿보았다는 증언이 있다.<ref name="inlgun00273"/>
 
==== 최후 ====
상해삼덕양행(三德洋行)을 운영하며 일본인들과도 교류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댄다는 것을 자랑삼아 떠벌리며 나라도 되니까 너희에게 돈을 주는게 아니겠느냐며 무시하다가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그 뒤 기업을 운영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제에 발설했으며, [[1933년]]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근처에 살던 [[흥사단]]원인 다른 독립운동가 이모의 부인과 간통하고 나오던 중, 그를 추척하던 [[엄형순]](嚴亨淳) 등의 총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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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형 옥성빈 등도 역시 밀정 혐의로 [[남화한인연맹]] 단원에 의해 암살당했다. 불조계 공부국에서 형사로 근무하던 옥관빈의 형 [[옥성빈]]은 독립운동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1933년]] [[12월 18일]] 김해산(金海山, 金文熙)의 집 입구 노상에서 저격했<ref name="inlgun00273"/>던 것이다.
=== 친일인명사전 편찬측의 논의 결과 ===
친일인명사전 "주요전거" 중 정화암의 증언이 포함되었다.<ref>《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 1035~1037</ref> 159여명의 학자들이 편찬위원을 맡은 친일인명사전 편찬 측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ref>《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 1038~1042</ref> 그 결과 옥관빈은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
 
증거가 없음으로 판결났다.
=== 계속된 살인사건과 살인미수사건 ===
[[1933년]] [[8월 17일]] 석현구(石鉉九)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됐다. [[상해한국인친우회]] 위원장 [[유인발]](柳寅發)은 일련의 암살 사건이 [[상해대한교민단]]에 의한 것으로 보고 [[상해대한교민단]] 산하 의경대 대장 박창세(朴昌世)를 찾아가 항의하였다. 박창세의 집엔 이수봉도 있었는데, 박창세와 이수봉은 '옥관빈 피살 사건은 [[안공근]]·[[박찬익 (1884년)|박찬익]]·[[엄항섭]] 등이 무정부주의자들과 제휴하고 감행한 것' 그리고 '김구 일파는 [[유인발]]도 암살할 계획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유인발]]에게 '이러한 상황이므로 귀하([[유인발]])는 우리들과 합동하여 그들(김구파)을 전부 보는대로 암살하면 어떠냐'고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쌍방은 김구파에 항쟁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ref name=":34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8_0010_00860|제목=86. 上海 韓國人親友會 위원장 柳寅發 저격사건 보고|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그러나 이것은 [[상해대한교민단]] 내 김구·[[안공근]]파인 박창세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유인발]]을 안심시키기 위한 속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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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소속으로서 위원장 1명, 상임위원 1명, 위원 9명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는데<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418</ref>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규명결과에서 옥관빈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ref>《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ⅱ,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1,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2,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3,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4, 2009</ref>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420</ref>에는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ref>《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 1038~1042</ref> 편찬결과물에 옥관빈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ref>《친일인명사전 1》;《친일인명사전 2》;《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ref>
 
대한민국 정부의 보고서와 전문연구자 150여명이 참여한 조사와 진상규명결과에 의해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은 근거가 없다고 결론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