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로쿠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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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eiroku Zasshi No10 1874 Cover.jpg|섬네일|《[[메이로쿠잣시메이로쿠 잡지]]》제10호(1874년)]]
'''메이로쿠샤'''({{llang|ja|明六社, めいろくしゃ}}, 명육사)는 [[메이지 시대]] 초기에 설립된 일본 최초의 [[계몽주의|계몽]] [[학술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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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6년이던 [[1873년]] 7월 [[미국]]에 공사로 나갔다 돌아온 [[모리 아리노리]]가 [[후쿠자와 유키치]], [[가토 히로유키]], [[나카무라 마사나오]], [[니시 아마네]], [[니시무라 시게키]], [[츠다 마미치]], [[미츠쿠리 슈헤이]], [[스기 코지]], [[미츠쿠리 린쇼]] 등과 함께 철학 활동을 목적으로 같은 해 가을에 결성하였다. 모임의 이름은 메이지 6년('''明'''治'''六'''年, '''메이'''지 '''로쿠'''넨)에 결성되었다는 의미에서 메이로쿠샤로 지었다. 정기 모임은 매월 1일과 16일에 열렸고 회원으로는 옛 [[막부]]의 관료, 에도 시기 관학이었던 [[카이세이죠]](開成所) 관계자, 1858년 설립된 사립학교인 [[게이오기주쿠 대학|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게이오 의숙)의 학생 등을 모아 "관민조화"(官民調和 , 정부와 민간의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구성하였다. 또한 학식을 갖추었다고 인정받던 옛 [[다이묘]]나 일본 불교 [[정토진종]]의 한 갈래인 정토진종 본원사파의 승려, [[일본은행]]이나 신문사의 직원, [[가쓰 가이슈]]와 같은 옛 사족 등도 받아들여 당대 일본에서 쟁쟁하다할 만한 사람들이 회원이 되었다.
 
1874년 3월부터 기관지인 《[[메이로쿠잣시메이로쿠 잡지]]》(오늘날 [[이와나미 문고]])를 발간하여 개화기 계몽주의 활동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875년 당시 정부인 [[태정관]]이 [[중상 및 비방 금지법]]과 신문조례를 포고하여 언론을 탄압하자 《메이로쿠잣시메이로쿠 잡지》는 43호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그 이후 메이로쿠샤는 메이로쿠카이(明六会)로 이름을 바꾸고 후쿠자와 유키지를 초대 회장으로 선임하여 [[도쿄 학사회원]]과 [[제국학사원]]에서 강의를 열었고 이는 훗날 [[일본학사원]]의 기반이 되었다.
 
== 연혁 ==
주미 공사로 부임하였던 모리 아리노리는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느끼고 일본으로 돌아가 인재육성을 시급히 추진하였다. 그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적인 향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유럽의 학회와 같은 것을 일본에서도 만들어야 하겠다고 결심한다. 모리 아리노리는 니시무라 시게키와 당대의 명사를 소집할 방법을 의논하고 당시 27세였던 후쿠자와 유지키를 회장으로 하여 니시 아마네와 같은 인사들을 규합하였다. 최초 결성 당시 회원은 10여 명이었다. 회원은 정회원과 교신회원, 명예회원, 초대 객원 등으로 구분하였고 창립한 해 4월 11일 회보 제1호를 발간하여 논문을 실은 잡지 발간을 시작하였다. 《메이로쿠잣시메이로쿠 잡지》는 메이지 초기의 시대상을 살필 수 있는 사료로 당시 발간 부수는 호당 평균 3200부 정도였다. 신문조례 등으로 발간이 중지 된 이후 논문의 발간은 무부성 직할의 도쿄학사원이나 제국학사원에서 수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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