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황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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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당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서로마 제국의 후신격인 신성 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의 유일한 후신이 되었다. 투르크인들은 슈타이어마르크와 케른텐 등지로 침공해왔으나 제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허약했던 프리드리히로써는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습 영지가 자신의 가문과 유럽에서 이슬람의 공격을 방어해야 하는 1차 방어선임을 자각하고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시작했다. 4년 뒤에는 헝가리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보헤미아의 수도인 프라하로 도망쳐 온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가 17세의 의문의 죽음에 가깝게 요절하자하자 프리드리히는 서둘러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에 대한 요구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의회는 각자 자신의 국왕을 선출해버렸다. 보헤미아는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를, 헝가리는 [[후녀디 야노시]]의 차남인 [[마차시 1세]]를 선출하였고 결과적으로 동생 알브레히트 6세와 더욱 골이 깊어졌다. 1년 뒤에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서부 영토인 린츠 일대를 분할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이후 1463년 알브레히트가 죽자 그가 분할했던 영지들을 재통합한다. 1477년 프리드리히는 부르고뉴 용담공 샤를의 딸 마리를 막시밀리안과 결혼시켜 부르고뉴의 영지 대부분을 획득, 합스부르크 가의 영지를 결혼 동맹으로 늘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1480년대 헝가리 국왕인 [[마티아슈 1세 코르비누스]]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1485년 빈이 함락당할 때 프리드리히는 굴욕을 감내하며 도망쳐야만 했다. 1년 뒤 그는 아들 막시밀리안을 독일 왕이자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고 이는 국정 전반에서 점차 역할이 축소되었다. 그러나 1490년 마티아슈 1세가 사망함에 따라 막시밀리안은 오스트리아를 탈환하는데 성곰함으로써 아버지의 근심을 덜게 했다. 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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