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 (194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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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nowiki></nowiki>
'''선수 경력'''
*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제일은행]] (실업)
*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
'''코치 경력'''
47번째 줄:
== 생애 ==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으로 국가대표팀 [[포수]]로서 이름을 알렸다.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고]]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 팀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제일은행]]을 거쳤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 [[1977년]]부터 [[1978년]]까지 모교의 감독을 역임하였지만 물러나고 잠깐 야구계를 떠나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제일은행]]의 평범한 은행원으로 7년 간 종사했다.
 
이후, [[1984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의 수석코치로 영입되어 [[김영덕 (야구인)|김영덕]],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감독을 보좌하였는데 당시 삼성은 본인 뿐 아니라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전 롯데 감독을 타격코치<ref>{{뉴스 인용
이후 [[1984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의 수석코치로 영입되어 [[김영덕 (야구인)|김영덕]],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감독을 보좌하였다. [[1989년]]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선임되어 전력이 약화된 팀을 4위까지 올렸고, [[1990년]]에도 정규 시즌 4위로 마감하여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그동안 번번이 삼성의 우승을 가로막았던 난적 [[해태 타이거즈]]를 3연승으로 스윕하고 [[1990년 한국시리즈]]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 [[LG 트윈스]]에게 스윕을 당해 우승에 실패하여 [[삼성 라이온즈|삼성]]의 고질병이었던 [[한국시리즈]] 징크스를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다.(이 징크스는 [[2002년 한국시리즈|2002년]]에 깨졌다.)
| 제목 = 朴永吉(박영길)감독 三星(삼성)코치로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11300329208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1-13&officeId=00032&pageNo=8&printNo=11782&publishType=00020
[[1990년 한국시리즈]] 우승 실패의 책임을 물어 삼성의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미국]]으로 야구 연수를 떠났다가 [[1992년]]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으로 영입되었다. [[1992년]] 6위, [[1993년]] 최하위로 마감했지만, [[1994년]]에는 그동안 부상으로 신음했던 투수들이 복귀하여 정규 시즌 2위로 마감하는 선전을 하였다. 그 해 [[태평양 돌핀스]]가 [[LG 트윈스]]에게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스윕당해 [[LG 트윈스]]가 우승했지만, 그 해 성적은 [[1998년]] [[현대 유니콘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인천광역시|인천]] 연고 야구단 최고의 성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독으로 2번 경험한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모두 [[LG 트윈스]]를 상대로 스윕당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 출판사 = 경향신문
 
| 저자 =
| 쪽 =
| 날짜 = 1984-01-13
| 확인날짜 = 2020-08-09
}}</ref>, 원래 [[MBC 청룡]]에서 투수코치를 맡았으나 [[김동엽 (1938년)|김동엽]]이 [[1983년]] 5월 감독으로 부임하자 야구 철학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해 6월 9일 팀을 떠난<ref>{{뉴스 인용
| 제목 = 청룡팀 감독대행 유백만씨 사표내
| url = https://news.joins.com/article/1697342
| 출판사 = 중앙일보
| 저자 =
| 쪽 =
| 날짜 = 1983-06-10
| 확인날짜 = 2020-08-09
}}</ref> [[유백만]]을 같은 달 27일 투수코치<ref>{{뉴스 인용
| 제목 = 삼성의 투수코치로 유백만 전청룡코치
| url = https://news.joins.com/article/1700136
| 출판사 = 중앙일보
| 저자 =
| 쪽 =
| 날짜 = 1983-06-28
| 확인날짜 = 2020-08-09
}}</ref>, 박창용 대구상고 감독을 2군 코치로 영입하면서 코치들의 수가 늘어면서 발생할 수 있는 코치들간 알력 다툼을 막고 선수들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본인(정동진)을 수석코치로 영입했다.
그 뒤, [[유백만]] 투수코치가 [[1985년]] 1군-2군을 별도로 분리함에 따라 2군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긴 데다<ref>{{뉴스 인용
| 제목 = 「타석」에 들어선'85프로야구 國內外(국내외)서 힘찬「스윙」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5021300209209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02-13&officeId=00020&pageNo=9&printNo=19497&publishType=00020
| 출판사 = 동아일보
| 저자 =
| 쪽 =
| 날짜 = 1985-02-13
| 확인날짜 = 2020-08-09
}}</ref> 다음 해 MBC로 돌아오자 한동안 투수코치까지 겸임했으며 삼성은 이 같은 부담감을 덜기 위해 원년 개막전 선발투수 [[황규봉]]을 [[1986년]] 시즌 뒤 투수코치로<ref>{{뉴스 인용
| 제목 = 삼성 황규봉, 코치로
| url = https://news.joins.com/article/2076459
| 출판사 = 중앙일보
| 저자 =
| 쪽 =
| 날짜 = 1986-11-27
| 확인날짜 = 2020-08-09
}}</ref> 승격시켰다.
이후, [[1988년]] 시즌 뒤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감독 후임 물망에 한때 거론됐으나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감독직을 고사했고 그 대신 [[백인천]] 전 삼미 플레잉코치를 추천했지만 구단의 반대로 무산됐으며<ref>{{뉴스 인용
| 제목 = [삼성라이온즈18년 .4] 정동진감독
| url =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19990305.00000009.000010
| 출판사 = 영남일보
| 저자 = 최영호
| 쪽 =
| 날짜 = 1999-03-05
| 확인날짜 = 2020-03-22
}}</ref> 난항 끝에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감독 후임으로 최종 발탁됐고 [[백인천]]은 [[1996년]]이 되어서야<ref>{{뉴스 인용
| 제목 = [삼성라이온즈18년 .7] 백인천감독
| url =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19990316.00000009.000010
| 출판사 = 영남일보
| 저자 = 최영호
| 쪽 =
| 날짜 = 1999-03-16
| 확인날짜 = 2020-03-22
}}</ref> 삼성 감독을 맡을 수 있었으며 [[1986년]] [[11월 24일]]부터 3년 계약 형식으로<ref>{{뉴스 인용
| 제목 = 미니인터뷰 朴永吉(박영길)감독 三星(삼성)라이온즈프로야구단 새 사령탑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11250009921201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6-11-25&officeId=00009&pageNo=12&printNo=6380&publishType=00020
| 출판사 = 매일경제
| 저자 = 송하칠
| 쪽 =
| 날짜 = 1986-11-25
| 확인날짜 = 2020-09-06
}}</ref> 삼성 감독에 취임한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감독은 부임 첫 해인 [[1987년]] [[니우라 히사오|김일융]]의 일본 복귀, [[황규봉]]의 코치 승격 등의 이유 탓인지 투수력이 붕괴되어<ref>{{뉴스 인용
| 제목 = '87프로야구 絕對强者(절대강자)는 없다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30300209209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3-03&officeId=00020&pageNo=9&printNo=20127&publishType=00020
| 출판사 = 동아일보
| 저자 =
| 쪽 =
| 날짜 = 1987-03-03
| 확인날짜 = 2020-09-06
}}</ref> 한국시리즈에서 스윕을 당했고 다음 해 플레이오프에서 3패로 탈락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성적부진을 선수 탓으로 돌리는 발언을 했는데 이 말은 선수들의 집단항명 사태를 불렀으며 결국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감독은 임기를 1년 남겨두고<ref>{{뉴스 인용
| 제목 = [삼성라이온즈 18년 . 3] 박영길 감독
| url =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19990302.00000009.000010
| 출판사 = 영남일보
| 저자 = 최영호
| 쪽 =
| 날짜 = 1999-03-02
| 확인날짜 = 2020-09-06
}}</ref> 도중하차했다.
우여곡절 끝에 [[1988년]] [[11월 15일]]부터 3년 계약 형식으로<ref>{{뉴스 인용
| 제목 = 프로야구 삼성감독 정동진씨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11600289109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1-16&officeId=00028&pageNo=9&printNo=160&publishType=00010
| 출판사 = 한겨레신문
| 저자 =
| 쪽 =
| 날짜 = 1988-11-16
| 확인날짜 = 2020-09-06
}}</ref>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에 선임되어 전력이 약화된 팀을 4위까지 올렸으나 큰 기대를 건 이적생 [[최동원]]이 고작 1승에 그친 데다 [[성준 (야구인)|성준]] 김훈기 두 선수의 부상으로<ref>{{뉴스 인용
| 제목 = 프로야구 '89大長征(대장정) (4)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40500329211003&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4-05&officeId=00032&pageNo=11&printNo=13393&publishType=00020
| 출판사 = 경향신문
| 저자 =
| 쪽 =
| 날짜 = 1989-04-05
| 확인날짜 = 2020-08-09
}}</ref> 투수력이 붕괴되어 준플레이오프에서 대구 2차전만 승리했을 뿐 인천 원정(1차전 3차전)에서 패배하는 수모를 겪었다.
게다가, 원년 선수 출신의 코칭스태프가 경험 부족으로 본인(정동진 감독)을 보필하기 어렵다고 구단 측에서 판단하여<ref>{{뉴스 인용
| 제목 = 90년대 승리 향한 포석 끝냈다... 8개 구단 지휘부 개편 거의 완료
| url = https://news.joins.com/article/2411129
| 출판사 = 중앙일보
| 저자 = 권오중
| 쪽 =
| 날짜 = 1989-11-14
| 확인날짜 = 2020-08-09
}}</ref> [[유백만]] 전 MBC 감독을 [[1989년]] 시즌 후 수석코치로 영입하기도 했다.
그 뒤, [[1990년]]에도 정규 시즌 4위로 마감하여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그동안 번번이 삼성의 우승을 가로막았던 난적 [[해태 타이거즈]]를 3연승으로 스윕하고 [[1990년 한국시리즈]]에 올리는 데 성공했으나 쓸만한 좌완 선발투수가 [[성준 (야구인)|성준]] 밖에 없어<ref>{{뉴스 인용
| 제목 = 프로야구'90패권 수비·주루플레이에 달렸다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101800329210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90-10-18&officeId=00032&pageNo=10&printNo=13867&publishType=00020
| 출판사 = 경향신문
| 저자 = 박건만
| 쪽 =
| 날짜 = 1990-10-18
| 확인날짜 = 2020-08-09
}}</ref> [[윤덕규]] [[김상훈 (1960년)|김상훈]] 등 좌타자가 대거 포진한 [[LG 트윈스]]에게 스윕을 당해 우승에 실패하여 [[삼성 라이온즈|삼성]]의 고질병이었던 [[한국시리즈]] 징크스를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다.(이 징크스는 [[2002년 한국시리즈|2002년]]에 깨졌다.)
아울러, [[1990년 한국시리즈]] 우승 실패의 책임 뿐 아니라 사생활 문제로 물의를 일으켰던 [[황규봉]] 1군 투수코치의 2군행을 요구한 편송언 사장과의 마찰 탓인지<ref>{{뉴스 인용
| 제목 = [삼성라이온즈18년 .4] 정동진감독
| url =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19990305.00000009.000010
| 출판사 = 영남일보
| 저자 = 최영호
| 쪽 =
| 날짜 = 1999-03-05
| 확인날짜 = 2020-03-22
}}</ref> 계약기간을 1년 남겨둔 채<ref>{{뉴스 인용
| 제목 = [with 라이온즈 30년] (18) 옷 벗은 감독들
| url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211350
| 출판사 = 매일신문
| 저자 = 최두성
| 쪽 =
| 날짜 = 2011-10-03
| 확인날짜 = 2020-03-25
}}</ref> [[1990년]] 시즌 후 삼성의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미국]]으로 야구 연수를 떠났다가 [[1992년]]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으로 영입되었으며 [[황규봉]] 코치는 [[1989년]] 말 외국 유학을 떠나면서 구단과 작별했고 그 이후 프로야구계와 인연을 끊었으며 은퇴 후 개인사업을 했으나 잇따른 사업 실패 때문에<ref>{{뉴스 인용
| 제목 = ‘원조 불사조’ 삼성 원년 에이스 황규봉 별세
| url =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028&aid=0002304256
| 출판사 = 한겨레신문
| 저자 = 권태호
| 쪽 =
| 날짜 = 2016-01-20
| 확인날짜 = 2020-03-25
}}</ref> 가족과의 불화가 겹쳐 부산에서 홀로 지낸 데다 경상중학교 때부터 같이 선수 생활을 한 [[이선희 (야구인)|이선희]] 외엔 대부분의 야구계 인사들과도 연락을 끊었고 이 와중에 병을 키워 허리가 너무 아파 [[2015년]] [[11월]] 중순 병원을 찾은 결과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으며<ref>{{뉴스 인용
| 제목 = 삼성 ‘원년 에이스’ 황규봉, 별이 지다
| url =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382&aid=0000442613
| 출판사 = 스포츠동아
| 저자 = 이재국
| 쪽 =
| 날짜 = 2016-01-20
| 확인날짜 = 2020-03-25
}}</ref> 결국 [[2016년]] [[1월 18일]] 별세했는데 [[황규봉]] 전 코치의 빈소를 찾은 야구인은 드물기도 했고 본인(정동진)의 삼성 후임 감독으로는 [[1988년]] [[9월 10일]]부터 3년 계약 형식을 통해<ref>{{뉴스 인용
| 제목 = 태평양,코치 진영 정비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00700289109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0-07&officeId=00028&pageNo=9&printNo=126&publishType=00010
| 출판사 = 한겨레신문
| 저자 = 연합
| 쪽 =
| 날짜 = 1988-10-07
| 확인날짜 = 2020-09-06
}}</ref> [[태평양 돌핀스]] 감독을 맡았으나 소위 "임호균 각서 파동" 탓인지<ref>{{뉴스 인용
| 제목 = 역대 논란이 됐던 감독교체 사례는?
| url =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109&aid=0002167094
| 출판사 = OSEN
| 저자 = 이상학
| 쪽 =
| 날짜 = 2010-12-31
| 확인날짜 = 2020-09-06
}}</ref> 계약기간을 1년 남겨둔 채 물러난 [[김성근 (야구인)|김성근]]이 [[1990년]] [[11월 2일]]부터 3년 계약으로 부임했는데 부임 첫 해인 [[1991년]]에는 본인(김성근)의 스파르타식 훈련 때문에 부상선수가 속출하여 3위로 떨어진 데 이어 [[1992년]]에는 4위로 간신히 진출한 준플레이오프에서 2패로 탈락하여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자 임기를 1년 남겨둔 채<ref>{{뉴스 인용
| 제목 = [삼성라이온즈 18년 .5] 김성근 감독
| url =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19990310.00000009.000030
| 출판사 = 영남일보
| 저자 = 최영호
| 쪽 =
| 날짜 = 1999-03-10
| 확인날짜 = 2020-09-06
}}</ref> 도중하차했으며 본인(정동진)이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감독의 삼성 후임으로 추천되기도 한 [[백인천]]이 [[김성근 (야구인)|김성근]] 감독 후임 물망에 한때 거론됐으나<ref>{{뉴스 인용
| 제목 = 프로야구 감독'희생양'인가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100300289111004&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2-10-03&officeId=00028&pageNo=11&printNo=1354&publishType=00010
| 출판사 = 한겨레신문
| 저자 = 이봉현
| 쪽 =
| 날짜 = 1992-10-03
| 확인날짜 = 2020-09-06
}}</ref> [[김성근 (야구인)|김성근]] 감독과 마찬가지로 스파르타식 훈련<ref>{{뉴스 인용
| 제목 = 프로야구 "자율 야구냐 관리야구냐"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22600209116010&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02-26&officeId=00020&pageNo=16&printNo=23122&publishType=00010
| 출판사 = 동아일보
| 저자 = 윤희상
| 쪽 =
| 날짜 = 1996-02-06
| 확인날짜 = 2020-09-06
}}</ref> 신봉자라 좌절됐다.
한편, 본인(정동진)의 삼성 감독 시절과 마찬가지로 태평양 감독 시절 전임자이자 [[1990년]] [[11월 3일]]부터 4년 임기 형식으로 태평양 감독을 맡았던<ref>{{뉴스 인용
| 제목 = 태평양 새감독 박영길씨 취임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110400289111010&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0-11-04&officeId=00028&pageNo=11&printNo=766&publishType=00010
| 출판사 = 한겨레신문
| 저자 =
| 쪽 =
| 날짜 = 1990-11-04
| 확인날짜 = 2020-09-06
}}</ref> [[박영길 (야구인)|박영길]]은 기존 코치진 유임을 밝혔으나<ref>{{뉴스 인용
| 제목 = 프로야구 무원칙'감투바꿔쓰기'성적부진·구단불화 빌미 4구단 물갈이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110300289111005&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0-11-03&officeId=00028&pageNo=11&printNo=765&publishType=00010
| 출판사 = 한겨레신문
| 저자 = 정의길
| 쪽 =
| 날짜 = 1990-11-03
| 확인날짜 = 2020-09-06
}}</ref> 전임 [[김성근 (야구인)|김성근]] 감독이 길러놓은 사람들이라 원만한 팀운영이 의문시된다는 지적이 있었으며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감독 부임과 함께 물러난 기존 코칭스태프는 박용진 2군감독이<ref>{{뉴스 인용
| 제목 = 프로야구 코칭스탭윤곽 거의 드러나
| url =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001&aid=0003425110
| 출판사 = 연합뉴스
| 저자 = 연합
| 쪽 =
| 날짜 = 1990-12-03
| 확인날짜 = 2020-09-06
}}</ref> 유일했고 [[성기영 (야구인)|성기영]] 전 롯데 감독이 박용진 후임 2군감독으로<ref>{{뉴스 인용
| 제목 = 전(前)롯데감독 성기영(成基泳)씨 태평양 2군감독맡아
| url =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2152219910121m1133&set_date=19910121&page_no=13
| 출판사 = 조선일보
| 저자 =
| 쪽 =
| 날짜 = 1991-01-21
| 확인날짜 = 2020-09-06
}}</ref> 발탁됐다.
게다가, [[김진영 (야구인)|김진영]] 감독이 [[1989년]] [[11월 9일]]부터<ref>{{뉴스 인용
| 제목 = 巨人(거인)—金振榮(김진영)감독 정식 계약 기간 2년에 연봉 5,000만원 수비코치엔 權斗祚(권두조)씨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111000209212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9-11-10&officeId=00020&pageNo=12&printNo=20957&publishType=00020
| 출판사 = 동아일보
| 저자 =
| 쪽 =
| 날짜 = 1989-11-10
| 확인날짜 = 2020-09-06
}}</ref> 2년 계약 형식을 통해 롯데 감독을 맡으면서 같은 달 30일부터 1년 계약으로 롯데 투수코치를 맡았지만<ref>{{뉴스 인용
| 제목 = 장명부,롯데 투수코치로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120100289109003&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89-12-01&officeId=00028&pageNo=9&printNo=479&publishType=00010
| 출판사 = 한겨레신문
| 저자 =
| 쪽 =
| 날짜 = 1989-12-01
| 확인날짜 = 2020-09-06
}}</ref> [[김진영 (야구인)|김진영]] 감독이 [[1990년]] 초반 한때 상위권을 질주했음에도 팀 순위 다툼이 치열해지자 당초 구상과는 달리 중반 이후 서서히 등판시키겠다던 [[박동희 (야구인)|박동희]]를 선발-마무리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투입시켰고 이 때문에 정작 승부처인 후반기 이후부터 힘을 쓰지 못하여<ref>{{뉴스 인용
| 제목 = 올 시즌 하위 3개팀 태평양·롯데·OB 코칭 스태프 물갈이로 "재정비"
| url = https://news.joins.com/article/2503582
| 출판사 = 중앙일보
| 저자 = 권오중
| 쪽 =
| 날짜 = 1990-10-14
| 확인날짜 = 2020-09-06
}}</ref> 시즌 도중 해임된 데다 같은 해 말 [[강병철 (야구인)|강병철]] 감독이 재부임하면서 소위 '김진영 라인' 지우기에 따라 퇴출된<ref>{{뉴스 인용
| 제목 = 프로야구 무원칙'감투바꿔쓰기'성적부진·구단불화 빌미 4구단 물갈이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110300289111005&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0-11-03&officeId=00028&pageNo=11&printNo=765&publishType=00010
| 출판사 = 한겨레신문
| 저자 = 정의길
| 쪽 =
| 날짜 = 1990-11-03
| 확인날짜 = 2020-09-06
}}</ref> [[후쿠시 히로아키|장명부]] 투수코치 영입도 구단 측의 반대로 무산됐으며 [[김진영 (야구인)|김진영]] 감독은 [[1990년]] 이후 프로야구계에 돌아오지 못했고 [[이선덕]] 전 OB 2군감독을 1군 투수코치로 영입했다.
더군다나,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감독이 기존 '김성근 사단'의 일원이었던 [[신용균]] 수석코치와 불화를 빚어<ref>{{뉴스 인용
| 제목 = 太平洋(태평양)감독 丁(정)동진씨 3년임기 계약금·年俸(연봉) 1億(억)2千萬(천만)원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10150032911101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1-10-15&officeId=00032&pageNo=11&printNo=14199&publishType=00010
| 출판사 = 경향신문
| 저자 =
| 쪽 =
| 날짜 = 1991-10-15
| 확인날짜 = 2020-09-06
}}</ref> 태평양 전체 코칭스태프가 동요했으며 이 과정에서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감독은 계약기간을 3년 남겨둔 채 물러났고 본인(정동진)이 후임으로 부임하는 과정에서 [[이선덕]] 1군 투수코치가 2군감독, [[성기영 (야구인)|성기영]] 2군감독이 1.5군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김성근 사단'의 또다른 잔류 멤버인 [[신용균]](수석코치) [[최주억]] (1군 수비) [[이종도]] (주루) [[박상열]] (2군 투수코치) [[김대진 (야구인)|김대진]] (2군 타격) [[이근식 (1959년)|이근식]] (타격보조) 코치 등이 팀을 떠나야 했다.
아울러, 정동진이 태평양 감독으로 부임하는 과정에서 정동진 감독과 함께 대구상고-제일은행 시절 선수생활을 같이 한<ref>{{뉴스 인용
| 제목 = 돌핀스, 수석코치에 柳永洙씨 내정
| url =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001&aid=0003516941
| 출판사 = 연합뉴스
| 저자 = 연합
| 쪽 =
| 날짜 = 1991-10-24
| 확인날짜 = 2020-09-06
}}</ref> [[류영수]] 삼성 2군감독을 수석-투수코치, [[오대석]] 전 롯데 선수를 1군 수비코치, 앞서 본 것처럼 [[김진영 (야구인)|김진영]] 감독이 [[1989년]] [[11월 9일]]부터<ref>{{뉴스 인용
| 제목 = 巨人(거인)—金振榮(김진영)감독 정식 계약 기간 2년에 연봉 5,000만원 수비코치엔 權斗祚(권두조)씨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111000209212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9-11-10&officeId=00020&pageNo=12&printNo=20957&publishType=00020
| 출판사 = 동아일보
| 저자 =
| 쪽 =
| 날짜 = 1989-11-10
| 확인날짜 = 2020-09-06
}}</ref> 2년 계약 형식으로 롯데 감독을 맡아 이 팀 코치로 현장에 돌아왔지만 [[김진영 (야구인)|김진영]] 감독이 [[1990년]] 초반 한때 상위권을 질주했음에도 팀 순위 다툼이 치열해지자 당초 구상과는 달리 중반 이후 서서히 등판시키겠다던 [[박동희 (야구인)|박동희]]를 선발-마무리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투입시켰고 이 때문에 정작 승부처인 후반기 이후부터 힘을 쓰지 못하여<ref>{{뉴스 인용
| 제목 = 올 시즌 하위 3개팀 태평양·롯데·OB 코칭 스태프 물갈이로 "재정비"
| url = https://news.joins.com/article/2503582
| 출판사 = 중앙일보
| 저자 = 권오중
| 쪽 =
| 날짜 = 1990-10-14
| 확인날짜 = 2020-09-06
}}</ref> 시즌 도중 해임된 데다 같은 해 말 [[강병철 (야구인)|강병철]] 감독이 재부임하면서 소위 '김진영 라인' 지우기에 따라 퇴출된<ref>{{뉴스 인용
| 제목 = 프로야구 무원칙'감투바꿔쓰기'성적부진·구단불화 빌미 4구단 물갈이
| url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110300289111005&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0-11-03&officeId=00028&pageNo=11&printNo=765&publishType=00010
| 출판사 = 한겨레신문
| 저자 = 정의길
| 쪽 =
| 날짜 = 1990-11-03
| 확인날짜 = 2020-09-06
}}</ref> [[김무관]] 전 롯데 코치를 2군 타격코치로 영입했으며 이 과정에서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감독 부임과 함께 영입된 [[이선덕]] 1군 투수코치가 2군감독, 역시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감독 부임과 함께 영입된 [[성기영 (야구인)|성기영]] 2군감독이 1.5군 감독으로 옮겨갔고 [[정진호 (1956년)|정진호]] 2군 수비코치가 1군 주루-작전코치, [[정영기 (야구인)|정영기]] 플레잉코치가 2군 수비코치로 보직을 변경했다.
다만, [[류영수]] [[오대석]] [[김무관]] 코치 영입 문제를 놓고 세 사람의 전 소속인 [[삼성 라이온즈|삼성]]과 [[롯데 자이언츠|롯데]] 측으로부터 반발을 사야 했으며<ref>{{뉴스 인용
| 제목 = <프로야구 화제>-코칭스태프 재정비 활발
| url =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001&aid=0003554772
| 출판사 = 연합뉴스
| 저자 = 연합
| 쪽 =
| 날짜 = 1991-11-18
| 확인날짜 = 2020-09-06
}}</ref> 한때 [[김시진]](당시 롯데 선수) 투수코치 영입설이 있었으나 대구 출신 코치들이 많다는<ref>{{뉴스 인용
| 제목 = 다이아몬드 쌍방울,투수成영재등 2차지명
| url = http://211.43.216.33/search/totalSearchView.do?news_id=01100501.19921124025507102
| 출판사 = 문화일보
| 저자 =
| 쪽 =
| 날짜 = 1992-11-24
| 확인날짜 = 2020-09-06
}}</ref> 이유로 좌절됐다.
어쨌든 [[1992년]] 6위, [[1993년]] 최하위로 마감했지만, [[1994년]]에는 그동안 부상으로 신음했던 투수들이 복귀하여 정규 시즌 2위로 마감하는 선전을 하였다. 그 해 [[태평양 돌핀스]]가 [[LG 트윈스]]에게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스윕당해 [[LG 트윈스]]가 우승했지만, 그 해 성적은 [[1998년]] [[현대 유니콘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인천광역시|인천]] 연고 야구단 최고의 성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독으로 2번 경험한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모두 [[LG 트윈스]]를 상대로 스윕당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1995년]]에는 정규 시즌 7위로 마감했고, [[태평양 돌핀스]] 야구단이 [[현대그룹]]에 매각되었을 때 잔여 계약 기간 1년을 남긴 시점에서 팀 개편에 따라 수석코치 [[김재박]]에게 감독직을 넘겨 주고 물러났다.
 
이후 야구 해설가, [[한국야구위원회|KBO]] 규칙위원, [[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감독관으로 일하고 있다.
이후 야구 해설가, [[KBO (단체)|KBO]] 규칙위원, [[KBO (단체)|KBO]] 경기감독관으로 일하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재임 시절에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팀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태평양 돌핀스]] 시절에는 [[김시진]]을 투수코치로 영입, 투수 조련에 힘써 [[태평양 돌핀스]] 때부터 "투수 왕국"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1990년대 후반 태평양을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 전성 시대의 기초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데 [[김시진]]은 [[1992년]] 본인(정동진)이 감독으로 부임할 때부터 투수코치 영입설이 나돌았지만 태평양 구단 측에서<ref>{{뉴스 인용
 
| 제목 = 다이아몬드 쌍방울,투수成영재등 2차지명
[[삼성 라이온즈]] 재임 시절에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팀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태평양 돌핀스]] 시절에는 [[김시진]]을 투수코치로 영입, 투수 조련에 힘써 [[태평양 돌핀스]] 때부터 "투수 왕국"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1990년대 후반 태평양을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 전성 시대의 기초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 url = http://211.43.216.33/search/totalSearchView.do?news_id=01100501.19921124025507102
| 출판사 = 문화일보
| 저자 =
| 쪽 =
| 날짜 = 1992-11-24
| 확인날짜 = 2020-06-17
}}</ref> 대구 출신 코치들이 많다는 이유로 반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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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46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대구수창초등학교 동문]]
[[분류:대구중학교 동문]]
[[분류:대구상업고등학교 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