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보수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LKMAION1000(토론)의 28065794판 편집을 되돌림. 토론 및 합의를 거치지 않은 문서 되돌리기 발생. 문서 훼손 및 문서 사유화를 중단하시고 토론에 참여하세요. |
ALKMAION1000 (토론 | 기여) 독자 연구, 중립적 서술 미비 부분을 삭제 |
||
2번째 줄:
{{보수주의}}
{{중립 필요|날짜=2020-10-25}}
'''대한민국의 보수주의'''(大韓民國의 保守主義)는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사상을 말한다.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우파]]에 속하며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 [[사유재산|사유재산권]], [[국가안전보장|국가안보]], [[반공주의]], [[법치주의]], [[점진적 개혁]]을 핵심적인 가치로 여긴다. 이 외에 민족문화, [[전통]], 애국심, 애향심, 예절, 부모공경, 경로사상, [[일부일처제]], 낙태반대, 동성혼인반대 등 기존 가족제도도 옹호하는 입장이다.<ref name=":
오늘날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의 계보를 잇고 있는 주요 세력에는 [[대한민국의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는 "자유민주주의나 시장경제 이념이 해방 후 미군정 당국에 의한 친미정권 수립을 계기로 비로소 한반도에 도입됐다거나 오늘날 한국의 보수세력이 지킬 가치와 이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등의 일부의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바탕이 되는 [[공화제]](공화주의 이념)가 [[안창호]] 등 개화파 3세대가 주축이 돼 190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된 [[공립협회]]나 1907년 국내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인 [[신민회]] 등을 통해 제기된 뒤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상하이 임시 정부]]에서 채택된 데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남 교수는 덧붙였다.<ref name=":122">{{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1&aid=0001969195&sid1=001|제목=“한국 보수세력 뿌리는 19세기말 개화파”|성=|이름=|날짜=2008-10-24|웹사이트=|출판사=문화일보}}</ref>
'[[반공주의]]가 곧 [[보수주의]]'라고 잘못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실제 대한민국 국민들의 인식도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는 곧 [[반공주의]]'로 박혀있는데 이는 근대 역사관이 왜곡된 결과이다.<ref>{{웹 인용|url=http://ipm.hallym.ac.kr/interview/7454|제목=<'自由人' 인터뷰 1>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성=|이름=|날짜=2011-05-04|웹사이트=|출판사=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ref><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32&aid=0002069326&sid1=001|제목=자유주의, 민주주의하 국가권력 견제 이념|성=|이름=|날짜=2010-06-11|웹사이트=|출판사=경향신문}}</ref> 대한민국의 반공주의는 개화기까진 없다가 공산주의 사상이 소개된 [[일제 강점기]] 1920년대로 소급된다는 것이 통설이다.<ref>{{웹 인용|url=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1438|제목=반공(反共)|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ref> [[자유시 참변]] 등을 계기로 많은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배척하게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987|제목=자유시 참변을 아십니까?|성=|이름=|날짜=2016-07-29|웹사이트=|출판사=미래한국}}</ref><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82&aid=0000259924&sid1=001|제목=[이 주일의 역사] 자유시 사변(1921.6.28)|성=|이름=|날짜=2010-06-28|웹사이트=|출판사=부산일보}}</ref><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2&aid=0003346928&sid1=001|제목=[세계와우리] 진정한 민족주의란 무엇인가|성=|이름=|날짜=2019-03-14|웹사이트=|출판사=세계일보}}</ref> 이후 이승만 정부 수립 전후로 좌익과 우익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제주 4·3 사건]]과 [[여수·순천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자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고,<ref name=":7">{{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9_1948_11_16_0160|제목=제1회 105차 국회본회의, 申翼熙 국회의장의 국가보안법 상정과정 설명과 찬반 토론|성=|이름=|날짜=|웹사이트=
== 역사 ==
=== 개화기 ===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의 시작을 1870년대에 태동한 [[개화파]]로 본다.<ref name=":
[[1896년]] 7월 2일 한성부에서 [[서재필]]·[[이상재]]·[[이승만]]·[[윤치호]] 등 개화파가 주도하고 [[안경수 (1853년)|안경수]]·[[박정양]] 등 정부 고위관료와 [[남궁억]]·[[안창호]] 등 지식인이 참여한 [[독립협회]]가 결성, 조직되었다. [[이완용]]도 몸 담았던 적 있으나 제명당하였다. 독립협회의 결성을 주도한 개화파는 [[청나라]]가 종주권을 주장하던 시기에 반청(反淸) 입장에 섰으며, [[미국]]·[[러시아]]·[[프랑스]]·[[일본]] 등에 우호적이며 서구의 문물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이들은 '정동파' 또는 '외국인파'로도 불렸다. 당시 개화파는 '진보'라는 말을 좋아해 기회 있는 대로 진보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다.<ref>{{웹
=== [[일제 강점기]] ===
22번째 줄: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상해 임시 정부]]가 설립되었다. 같은 해 9월 11일에는 [[경성부|경성]]의 [[한성 임시 정부]]과 [[프리모르스키 변경주|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등 각지의 임시 정부들을 통합하여 상하이에서 단일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하였다.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입법·행정·사법의 [[권력 분립|3권 분리]] 제도를 확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되었다.[[파일:Rhee Syngman and Lee Donghui.jpg|섬네일|1920년 상하이에서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환영회(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장붕)]][[1920년]] [[임시 정부]] 인사들이 [[이승만]] 임시 대통령의 현지 부임을 요청하자 [[이승만]]은 중간 기착지 [[하와이주|하와이]]에서 기회를 엿보다 11월 16일 [[상하이시|상하이]] 직행 화물선에 몰래 탔다. 1920년 12월 5일 [[푸둥 신구|푸둥]]에 도착한 이승만은 1921년 5월 29일까지 [[상하이시|상하이]]에 머물렀다. 대한민국 보수주의의 양대거목인 [[이승만]]과 [[김구]]의 만남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3&aid=0003436849&sid1=001|제목=1920년 12월, 상하이로 건너간 이승만… 김구를 처음 만나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조선일보}}</ref>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수립 초기부터 독립운동의 방법론(외교독립론 대 실력양성론 대 무장독립론), 이념([[민주주의]],[[민족주의]] 대 [[사회주의]],[[공산주의]]), 지역(기호파 대 서북파)에 따른 갈등과 대립이 존재했다. 1919년 4월경에는 임정 내부에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서의 내용이 알려지자 무장독립론자들([[박용만 (1881년)|박용만]], [[신채호]], [[이동휘]] 등)은 외교독립론자들([[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등)을 맹비난하였다. 1919년 9월 10일, 제1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으로 인해 사회주의 세력 내의 임정 내 [[고려공산당]] [[고려공산당 (상하이)|상해파]]와 같은 당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이르쿠츠크파]]가 대립하게 되었고, 1921년 1월, 제2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으로 인해 임정 내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대립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1921년 6월 28일, [[소련]]의 [[붉은 군대]]가 한인 무장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였다. [[고려공산당]] [[고려공산당 (상하이)|상하이파]]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이르쿠츠파]]와 간의 공산주의 권력다툼에 의해 [[민족주의]] 세력인 [[김좌진|김좌진·]][[홍범도]]·[[지청천]] 등의 [[대한독립군단]]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결국 와해되었으며, 이에 다수의 [[민족주의]] 세력이 [[공산주의]] 세력에 등을 돌리고 [[반공주의]]를 갖게 되었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이동휘]]가 가담하고 있던 적기단도 적대시하였다. [[김창숙]]·[[박은식]]·[[원세훈]] 등 독립운동가 15인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분열을 봉합하고자 1921년 2월부터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시도하여 1923년 1월 3일에 어렵사리 개막하였으나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는 또다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수립 초기부터 독립운동의 방법론(외교독립론 대 실력양성론 대 무장독립론), 이념([[민주주의]],[[민족주의]] 대 [[사회주의]],[[공산주의]]), 지역(기호파 대 서북파)에 따른 갈등과 대립이 존재했다. 1919년 4월경에는 임정 내부에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서의 내용이 알려지자 무장독립론자들([[박용만 (1881년)|박용만]], [[신채호]], [[이동휘]] 등)은 외교독립론자들([[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등)을 맹비난하였다. 1919년 9월 10일, 제1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으로 인해 사회주의 세력 내의 임정 내 [[고려공산당]] [[고려공산당 (상하이)|상해파]]와 같은 당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이르쿠츠크파]]가 대립하게 되었고, 1921년 1월, 제2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으로 인해 임정 내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대립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1921년 6월 28일, [[소련]]의 [[붉은 군대]]가 한인 무장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였다. [[고려공산당]] [[고려공산당 (상하이)|상하이파]]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이르쿠츠파]]와 간의 공산주의 권력다툼에 의해 [[민족주의]] 세력인 [[김좌진|김좌진·]][[홍범도]]·[[지청천]] 등의 [[대한독립군단]]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결국 와해되었으며, 이에 다수의 [[민족주의]] 세력이 [[공산주의]] 세력에 등을 돌리고 [[반공주의]]를 갖게 되었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이동휘]]가 가담하고 있던 적기단도 적대시하였다. [[김창숙]]·[[박은식]]·[[원세훈]] 등 독립운동가 15인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분열을 봉합하고자 1921년 2월부터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시도하여 1923년 1월 3일에 어렵사리 개막하였으나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는 또다시 임정고수파, 개조파, 창조파로 분열되었다.[[파일:김구-이승만 1928년 서신.PNG|섬네일|1928년 11월 20일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서신. 추운 겨울에 털옷 조차 입지 못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어려운 자금 사정을 호소하였다.]]
임시정부 각료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내 좌-좌, 좌-우 계파간 갈등이 극에 달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가 파탄 지경인데도 [[이승만]]이 상하이가 아닌 미국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는 점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은 대통령제 임시 정부 제4기까지 유임되었으나 그 도중인 1925년 3월 23일 대통령직 탄핵 및 면직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74287.html|제목=‘이승만 탄핵’ 내용 담긴 독립신문 호외 최초 발견|날짜=2018-12-13|언어=ko|확인날짜=2020-09-11}}</ref>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는 이승만의 측면 지원세력으로 분류되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위원부]]에 대한 철폐령도 내렸으나 이승만 등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위원부]]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1925~1926년 무렵 국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연락망인 연통제가 완전히 와해되면서 [[김구]]는 독립운동의 자금 중 상당부분을 미국의 [[이승만]], [[안창호]] 등과 미국 교민들의 성금에 의존하였다. 1928년 11월 20일, 김구는 [[이승만]]에게 서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자금의 일부를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로 보내주었다. 이후 1932년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어 세계에 조선의 상황을 알렸고, 1933년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각료로 복귀하였다.
줄 34 ⟶ 33:
=== 해방 후 [[한국의 군정기|미군정기]] ===
[[1945년]] 8월, [[일본 제국]]의 항복과 동시에 중도좌파 성향의 [[여운형]]과 중도우파 성향의 [[안재홍]]이 협력해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건준의 본질적인 중도적 정치노선 성향은 [[박헌영]]의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권을 잡아 주도해 나아감에 따라 변질되어갔고, 그 상태로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됐다.<ref>{{웹 인용|url=
[[1945년]] 9월 16일, [[김병로]]·[[김준연]]·[[백남훈]]·[[송진우 (1890년)|송진우]]·[[원세훈 (1887년)|원세훈]]·[[조병옥]] 등 국내 독립운동가들과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장덕수]]·[[윤보선]] 등 자본가 및 지주층 중심의 극우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이 결성되었다.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정당으로, [[자유주의]]·고전적 자유주의·[[보수주의]]·[[반공주의]]를 이념으로 삼았다. [[한국민주당|한민당]]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도 막연히 [[공산주의]]에 반대했기 때문에 잠시 합류했던 것 뿐, 약 1년만에 대부분 탈당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0_08_0390|제목=한민당총무 원세훈, 합작7원칙 등에 대한 이념相違로 탈당 성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0_09_0160|제목=한민당 청년부장 朴明煥 등 16명 탈당|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0_10_0210|제목=李順鐸, 한민당 탈당|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0_21_0050|제목=김약수, 손영극외 89인 한민당 탈당성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 name=":5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kn_058_0040_0050_0010|제목=1. 한국민주당의 탈당사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이 대량 탈당 사태로 인해 당은 왜소화됐지만, 오히려 당론이 통일되고 당내 결속이 강화되고 일원적인 당운영이 가능하게 되어서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1955) 때까지 극우노선을 꾸준히 견지하게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0_13_0040|제목=한민당, 당원 탈당을 인정하고 당내 결속 위해 기구개혁 결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1185|제목=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kn_058_0040_0060|제목=해방 직후 한국민주당 구성원의 성격과 조직개편(박태균) > 맺음말|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5년]] [[10월 23일]] 각 정당·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이승만]]을 정점으로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승만]]은 좌익, 우익, 임정 요인이 총망라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으로 미군정을 인수하고자 하였다.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에 [[조선공산당]]의 참여를 요구하였으나, [[박헌영]]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의 집행부가 [[한국민주당]]과 [[국민당 (1945년)|국민당]]의 반동적이고 친일적인 인사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꺼려하였다. [[이승만]]이 그러한 인사들을 배제하겠다고 약속하자 [[조선공산당]]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에 참여하였다. (USAFIK G-2, Periodic Report #34, 3 Nov. 1945, p.3.)<ref name=":4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husa_002r_0010_0020|제목=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성=|이름=|날짜=|웹사이트=
▲[[1945년]] [[10월 23일]] 각 정당·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이승만]]을 정점으로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승만]]은 좌익, 우익, 임정 요인이 총망라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으로 미군정을 인수하고자 하였다.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에 [[조선공산당]]의 참여를 요구하였으나, [[박헌영]]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의 집행부가 [[한국민주당]]과 [[국민당 (1945년)|국민당]]의 반동적이고 친일적인 인사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꺼려하였다. [[이승만]]이 그러한 인사들을 배제하겠다고 약속하자 [[조선공산당]]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에 참여하였다. (USAFIK G-2, Periodic Report #34, 3 Nov. 1945, p.3.)<ref name=":4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husa_002r_0010_0020|제목=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그러나 이후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 회담에서 논의된 친일파 배제문제가 공전하자 [[박헌영]]이 반기를 들었다. 좌파의 정당·단체들은 그 최고사령탑인 [[박헌영]]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유연성을 보이던 기타 좌익단체들까지 [[1945년]] 12월 13일과 14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에서 모두 탈퇴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news.joins.com/article/4104344|제목=[강준식의 정치비사] 대통령 스토리 이승만②|성=|이름=|날짜=2010-04-10|웹사이트=|출판사=중앙일보|확인날짜=}}</ref><ref name=":20">{{웹 인용|url=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7991|제목=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ref> 한편 임정 세력도 임정 인사들을 독촉에 참여시킨 후 임정을 해산한다는 이승만의 계획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별정치위원회]]라는 독자적인 조직화 방안을 모색했다.<ref name=":20" />
[[1945년]] 12월 17일 이승만은 [[한국방송공사|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담화문을 발표하여 민족을 분열시키는 친소 반민족주의 극좌세력에 대해 통렬히 비판하였다.
<blockquote>'''"...우리가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오 공산당 극렬파들의 파괴주의를 원치않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으로 말하면 원래에 [[공산주의]]를 아는 동포가 내지에는 불과 몇명이 못되었다니 공산문제는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그중에 공산당으로 지목받는 동포들은 실로 독립을 위하는 애국자들이요 공산주의를 위하여 나라를 파괴하자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중략) 불행히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명목을 빙자하고 국경을 없이하여 나라와 동족을 팔아다가 이익과 광영을 위하여 부언위설(浮言僞說)로 [[인민]]을 속이며 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군기를 사용하여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제|공화국]]이라는 명사를 조작하여 국민전체에 분열상태를 세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다가 지금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이들이 [[공산주의|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민주주의자]]라 하여 민심을 현혹시키니...''' (중략)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의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의 조국에 들어가서 저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조직을 더 지체할 수 없이 협동하는 단체와 합하여 착착 진행중이니 지금이라도 그중 극렬분자도 각성만 생긴다면 구태어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파괴운동을 정지하는 자로만 협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에 이 문제를 우리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우리나라도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절분(切分)으로 나누어져서 동족상쟁의 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노릇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ref
[[파일:Rhee Syngman and Kim Gu 1945-December-1.jpg|섬네일|1945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개선대회에 참석한 이승만과 김구]]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3상회의)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미·소·영·중 4개국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를 협의하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승만]], [[김구]] 등 우익 인사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벌였다. 반면 [[한국민주당|한민당]] [[송진우 (1890년)|송진우]]는 신탁통치 불가피론을 역설했는데 이것이 [[김구]] 세력의 반감을 샀다. [[1945년]] 12월 30일, [[송진우 (1890년)|송진우]]는 자택에서 [[한현우]] 등에 의해 암살되었다. 사건 전날의 정황상 [[한국민주당]] 측도 김구를 배후로 의심하였고, 그래서 사건의 진실과 무관하게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측과 [[한국민주당|민주당]] 측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1946년]] [[4월 9일|4월 8일]] 경기도경찰부는 [[송진우 (1890년)|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을 체포하였다. 경찰은 [[한현우]]가 [[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서 [[송진우 (1890년)|송진우]]를 돕고 있던 자인데 그의 지휘하에 유근배, 김의현이 권총을 발사하여 [[송진우 (1890년)|송진우]]를 암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ref name=":0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4_09_0010|제목=경기도경찰부, 송진우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 체포|성=|이름=|날짜=|웹사이트=
[[1945년]] 12월 30일 임정과 공산진영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점에 있어서 의견이 전부 일치하였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30_0160|제목=조소앙 임정 외무부장,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의 성격과 운영방침 천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그런데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공화국]] 등 좌익진영은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3상회의]] 직후인 [[1946년]] 1월 2일을 기점으로 신탁통치 찬성(찬탁)으로 일제히 돌변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03_0140|제목=조공, 3상회의결정지지 담화문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02_0080|제목=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03_0070|제목=반탁대회가 친탁대회로 취지변경|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로써 좌익과 우익의 분열이 노골화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05_0010|제목=각정당, 조공과 인공의 2일의 찬탁대회 반박성명서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좌익의 찬탁표명에 대해서는 모스크바와 평양으로부터의 지령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kn_025_0080_0020|제목=Ⅱ. 해방후 정당의 난립과 권력투쟁|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민족진영은 외세를 적이라고 보았고, 공산진영은 동족을 포함한 지주·자본가를 적이라고 보았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pdfViewer.do?levelId=nh_049_0020|제목=.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성=전명혁|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45년]] 12월 30일 임정과 공산진영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점에 있어서 의견이 전부 일치하였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30_0160|제목=조소앙 임정 외무부장,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의 성격과 운영방침 천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
[[1946년]] 1월 14일 이승만은 정례기자단회견에서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3상회의]] 지지 즉 찬탁으로 급선회한 공산주의자들을 다음과 같이 친일파와 다름없는 매국노라고 단정하고 결별을 선언하였다.<blockquote> '''"...파괴자와 건설자가 어떻게 합동되며 애국자와 매국자가 어떻게 한 길을 갈 수 있을까.''' (중략) '''이후에 우리가 국권을 회복한 후에는 이 분자들에게도 친일분자와 같은 대우아래 우리 민족의 재판마당에서 우리가 이 사람들에게 물을 말이 있을 것이다."'''<ref
민족진영을 필두로 한 반탁진영이 활발히 갖춰졌다.
[[1946년]] 2월 9일, 북한은 남한과의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사실상의 북한 단독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토지 무상분배와 생산시설 [[국유화]] 등 공산화를 진행하였다. 이는 북한주민 상당수가 [[월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조선인민당]]과 같은 [[공산주의]] 좌익세력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이승만]], [[김구]] 세력에 들어가거나 [[장덕수]]의 [[한민당]]에 들어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1946년 11월 30일에 월남자들을 중심으로 [[서북청년단]]이 발족하기도 하였다.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국 측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중심으로 임시정부(과도정부)를 구성하자고 주장했고, 소련 측은 반탁세력을 협의대상에서 제외하자고 제안했다.<ref name=":2">{{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3&aid=0009744033&sid1=001|제목=[광복 75주년] ⑩두 차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분단의 길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뉴시스}}</ref> [[1946년]] 4월 18일 과도정부 수립에 참여할 정당과 단체는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는 선언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 즉 '공동성명 제5호(제5호 코뮤니케)'가 발표되었고,<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4_18_0070|제목=미소공위 공동성명 제5호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고 외교전을 통해 38선 이북에서 소련군을 내쫓아 통일하자고 주장해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7_17_0070|제목=한국여론협회, 초대 대통령과 식량정책 등에 대한 여론조사결과|성=|이름=|날짜=|웹사이트=
종로4가 등 3개소 행인 6,671인을 대상으로 조사
이승만 1916인 (28.7%), 김구 702인 (10.5%), 김규식 694인 (10.4%), 여운형 689인 (10.3%), 박헌영 84인 (1.3%), 기타 110인 (1.6%), 모르겠다 2476인 (37.1%)</blockquote>[[1946년]] 7월 25일 중도좌파 [[여운형]]과 중도우파 [[김규식]]이 좌우합작위원회를 수립하고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때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
[[1946년]]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대구 10·1 사건|대구 10.1 사건]]이 발생되었다. 정국이 극좌파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좌우합작운동]]의 대중적 동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ref name=":3" /> 결국 좌익세력이 우세한 한반도에 통일정부가 수립될 경우 우익세력은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외면하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1946년 12월 12일,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은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였지만, 통일정부 수립이 아닌 입법의원 설치의 토대 정도로 의미가 격하되었다.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해리 S. 트루먼|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더욱 위축됐고,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한지근]]에게 피살되기까지 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사실상 좌초되었다.
[[1947년]] [[2월 10일]] [[김구]]는 김규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해당 회의([[좌우합작위원회]])를 취소한다 하여서 합작공작을 위하여 진심으로 노력한 몇분에 대한 우리의 경의는 감할 바 아니어늘 일시 감정상 충동으로서 그들에게 굴욕을 가하려 하는 것은 천만부당한 것이다. 더구나 [[좌우합작위원회]]를 영도하던 '''김규식은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생을 희생하였고 탁치반대자로는 누구보다도 철저한 터인데 그를 찬탁자로 몰아넣으려는 것은 일종의 공심을 떠난 모략으로 밖에 인정할 수 없다.''' 우리는 격별히 이런 점에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또 한가지 부언할 것은 근일에 세간에서 운위하는 바 중앙노선은 정치이상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을 이상으로 하는 중간당도 있는 것이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2_10_0100|제목=반탁독립투쟁위원회위원장 김구,국내외 제반문제에 관해 성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
[[1947년]] 3월 1일 이승만이 도미 외교를 하는 동안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로 개칭하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는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를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법통으로 봉대하고, 같은 날 우익계 청년단체인 [[반탁전국학생연맹]]도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봉대를 결의하였다. 그리고 3월 5일 김구는 미군정 브라운 소장에게 정부를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에게 이양해달라고 했지만 거부 당했다. 4월 21일 귀국한 이승만도 임정법통론이나 임정봉대론은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일시보류하자고 하였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다. [[1947년]] 7월 8일 [[소련]]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때와 마찬가지로 반탁세력을 과도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된다고 주장해서 [[미국]]과 이견을 보였고 결국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07_08_0020|제목=공위 39·40차 본회의, 구두협의 대상문제로 격론|성=|이름=|날짜=|웹사이트=
이 당시에는 좌익과 우익 간에는 물론이고 우익 스펙트럼 내에서도 신탁통치 찬반문제와 단독정부수립 찬반문제 등으로 인한 각종 갈등과 분열이 있었다. 그럼에도 우익세력들 간에 합작하려는 노력은 꾸준히 있었다. 그렇지만 [[김구]] 세력과 [[한국민주당|한민당]] 간의 관계는
[[파일:김구 재판 장면.jpg|섬네일|1948년 3월 김구 재판 장면]]
[[1947년]] 12월 2일, [[장덕수 피살 사건]]이
[[1948년]] 1월 23일 [[유엔 한국 위원회|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유엔 [[소련]]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거부했다는
[[1948년]] 3월 8일 김구가 [[장덕수 피살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정에 출석하자, 이승만은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관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 "김주석 부하에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범죄로 김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ref name=":30">{{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3_08_0060|제목=이승만, 김구의 장덕수살해사건 관련설 일축|성=|이름=|날짜=|웹사이트=
[[1948년]] 4월 19일~21일, [[김구]], [[김규식]]은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남북연석회의) 참가를 위해 북한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남한 내 우익의 분열과 남북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하여 우익세력의 맹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먼 훗날인 1994년에 '레베데프 비망록'이 공개되면서 연석회의의 배후에 [[테렌티 시티코프|스티코프]], [[니콜라이 레베데프|레베데프]] 등 소련군정 핵심인사들이 깊숙히 개입했던 것으로 드러나 조선인들간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주체적 노력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오늘날에는 [[김구]]가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에 참여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중도주의]]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 김구는 초지일관 반일주의자였음은 물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김구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일종의 독재체제로 이해하였다. 1947년 발표한 '나의 소원'이란 글에서 김구는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며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비판하였다.<ref>{{웹 인용|url=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1065000/2004/05/001065000200405101843248.html|제목=좌우구도 굳힌 반탁운동에 반공·반소로 일관한 김구 : 토론과 논쟁 : 여론칼럼 : 인터넷한겨레|확인날짜=2020-08-21}}</ref>
줄 103 ⟶ 98:
이 시기에는 좌익과 우익 간의 대립이 극에 달하여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4월에는 단정단선론에 반대하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김달삼]]의 주도 하에 [[제주 4·3 사건]]이 발생됐고, 같은 해 10월에는 [[제주 4·3 사건|제주 4.3 사건]] 진압을 명령 받은 [[대한민국 국군|국군]] 제14연대가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김지회]], [[지창수]]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되었다. 그 이전부터 공산진영과 비공산진영 간의 갈등과 무력출동은 잦았지만, 공산당이 동족을 대상으로 [[여수·순천 사건]]이라는 대규모 군사반란까지 일으키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는 좌우익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사회질서를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반공주의]] 정책을 내세웠다. 그리고 [[1948년]] 12월 1일에는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단체를 구성하는 등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각종의 행위를 처벌할 목적으로 [[국가보안법 (대한민국)|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다.<ref name=":7" /><ref name=":8" />
이러한 가운데 [[1948년]] [[8월 19일]] [[반민족행위처벌법]] 초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국회 내의 공기는 찬반 양론으로 대립하였다. [[반민족행위처벌법]] 국회 통과시 타격을 면치 못할 [[한국민주당|한민당]]은 '동 법안([[반민족행위처벌법]])이 필요는 하나 민중의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고, 또 동 법안은 너무나 추상적이니 법제위원회로 회부하자'는 의견을 냈다.<ref name=":19">{{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08_19_0170|제목=韓國民主黨의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대한 태도 주목|성=|이름=|날짜=|웹사이트=
[[1948년]] 9월 22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제헌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였다. 1949년 1월 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본격적으로 사무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1949년 5월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하자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는 [[노익환]], [[서용길]] 등 반민특위 위원과 독립운동가 출신 국회 부의장 [[김약수]]를 비롯한 국회의원 13명을 구속하였다. 이 때 구속된 의원들 다수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서 활동하거나 반정부 성향의 소장파 의원들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체포된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6.25 전쟁 와중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1949년 6월 6일에는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 소속 [[특별경찰대]]를 습격하였다. 1949년 7월 6일 [[이인]]은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특위법]] 공소시효를 1950년 6월 20일에서 1949년 8월 말일까지로 단축하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 개정안을 제출하였고, 이는 재석의원 136명 가운데 찬성 74표, 반대 9표로 가결되었다. 이에 위원장 [[김상덕 (1891년)|김상덕]]을 비롯한 반민특위원들이 일제히 사임하였다. 1949년 7월 14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우여곡절 끝에 [[이인]]을 위원장, [[송필만]]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하여 활동을 재개하였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된 뒤 폐지될 때까지의 [[친일파]]의 처벌 상황을 보면, 처음엔 반민족행위자 7천여명을 조사대상으로 파악해 놓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688명만을 조사하여 그 가운데 599명의 혐의자를 [[특별검찰부]]로 송치했고, [[특별재판부]]는 송치된 599명 가운데 293명을 기소하고 306명을 불기소처분했다. 기소된 293명 가운데 [[특별재판부]]의 판결을 받은 사람은 78명이었다. 그리하여 임시특별부의 판결을 받은 1명을 합쳐 7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10명뿐이었다. [[이인]]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한마디로 해서 용두사미였다"고 회고하였다.<ref>{{웹 인용|url=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306100062|제목=孫世一의 비교 評傳 (110)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성=|이름=|웹사이트=|출판사=|언어=ko|확인날짜=2020-08-29}}</ref> 1949년 10월 4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가 모두 해체되었다.
반민특위 실패의 일차적인 원인은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의 방해와 친일세력의 이념공세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2_1949_06_18_0060|제목=金泰善 서울시 경찰국장, 金尙德·金相敦·盧鎰煥·金明東 등 반민특위 위원 4명을 가택침입 등 혐의로 고소|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8년]] 12월 12일 [[유엔]]은 [[유엔 총회 결의 제195호|총회 결의 195(III)호]](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에서, [[대한민국 정부]](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가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하였다.
[[1948년]] 초 남한 단독 총선거와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 문제로 인해 틀어졌던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의 관계는 [[유엔 총회 결의 제195호]] 이후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1948년 12월 15일 민족진영 3영수의 합작운동이 태동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9_1948_12_15_0070|제목=李承晩·金九·金奎植 3영수 합작운동 태동|성=|이름=|날짜=|웹사이트=
그러나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승만은 이날 저녁 9시가 넘어서 [[한국방송공사|서울중앙방송국]] 방송을 통하여 애도방송을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2_1949_06_26_0100|제목=李承晩 대통령, 金九 서거에 대해 애도 방송|성=|이름=|날짜=|웹사이트=
[[1949년]] 6월 21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는 농민들의 농지 및 토지개혁에 대한 목소리에 부응하여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였다. 1948년 내각 구성 당시 이승만이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의 천거를 무시했던 일에 더하여 [[농지개혁법]]까지 제정되자 [[한국민주당|한민당]]은 분노하여 반이승만 노선으로 완전히 갈아탔다. 한편 [[농지개혁법]]으로 인해 일제시대의 식민지 지주제가 사라졌고, 대토지 소유를 해체하고 자작농을 육성한 덕분에 산업 자본주의 발전을 가로막는 낡은 요소는 사라지고 지주 대신 자본가가 새로운 경제 주역으로 급성장하였다. 자기 땅을 일구게 된 농가에서는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춘 미래의 노동자들이 배출됐다.
줄 127 ⟶ 120: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한반도와 한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1950년 3월 10일부터 집행되기 시작한 [[농지개혁법]]으로 인해 남한에 [[공산주의]]가 스며드는 것까진 막을 수 있었다.
훗날
[[1950년]] 5월 30일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구]], [[김규식]] 계열의 남북협상파와 [[무소속]] 계열의 후보가 대거 당선되었고, [[6.25 전쟁]] 중인 1951년 발생한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으로 인해 이승만 정권은 지지 기반이 약화되어갔다. 국회는 이승만 정부의 실정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기부터 주장하던 [[의원내각제|내각책임제]](의원내각제) 개헌을 다시금 강력히 밀어부쳤다. 1951년 3월 14일 내각제개헌안에 대한 국회 무기명 투표 결과 재석 179인 중 찬성 79, 반대 33, 기권 66, 무효 1표로 부결되었지만, 대통령 선거는 [[간접 선거|간선제]]였기 때문에 재선가도에 차질이 생겼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6_1950_03_14_0100|제목=제6회 52차 국회본회의, 내각제개헌안을 부결|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대립 속에서 [[이승만]]은 1951년 12월 17일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을 결성하고 [[부산 정치 파동|발췌 개헌]]을 강행하면서 [[한국민주당|한민당]]([[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과 연을 끊었다.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은 [[보수주의]]·[[반공주의]]·[[권위주의]]·[[일민주의]]를 이념으로 삼았으며, [[장택상]]·[[이범석 (1900년)|이범석·]][[장면|장면·]][[배은희]]·[[이기붕]]·[[함태영]]·[[이갑성]]·[[백성욱]] 등이 주요 간부였다.▼
▲[[1950년]] 5월 30일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구]], [[김규식]] 계열의 남북협상파와 [[무소속]] 계열의 후보가 대거 당선되었고, [[6.25 전쟁]] 중인 1951년 발생한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으로 인해 이승만 정권은 지지 기반이 약화되어갔다. 국회는 이승만 정부의 실정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기부터 주장하던 [[의원내각제|내각책임제]](의원내각제) 개헌을 다시금 강력히 밀어부쳤다. 1951년 3월 14일 내각제개헌안에 대한 국회 무기명 투표 결과 재석 179인 중 찬성 79, 반대 33, 기권 66, 무효 1표로 부결되었지만, 대통령 선거는 [[간접 선거|간선제]]였기 때문에 재선가도에 차질이 생겼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6_1950_03_14_0100|제목=제6회 52차 국회본회의, 내각제개헌안을 부결|성=|이름=|날짜=|웹사이트=
[[1952년]] 1~2월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한 미흡한 대처로 인해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는 민심을 잃었다. 국회로부터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진 이승만은 대통령 [[직접 선거|직선제]] 개헌안을 꺼내들었다. 친이승만측과 반이승만측의 갈등이 극심해졌다.
줄 137 ⟶ 128:
[[1952년]] [[5월 19일]] 국회가 권력을 남용하여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 소속 살인범 [[서민호]]를 석방결의로 풀어줘버리자, [[1952년]] [[5월 25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가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반대세력을 헌병대에 연행하여 보복한 소위 [[부산 정치 파동]]이 벌였다. [[1952년]] [[6월 25일]]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승만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 정치살인까지 자행되자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 내에 분열이 생겼고 반이승만측의 기세는 완전히 꺾였다.
[[1952년]] [[7월 4일]], 몇몇 제2차 개헌안(발췌개헌안) 반대파만이 국회 불출석을 선언하였다. 군경들은 무력충돌에 대비해 [[국회의사당 (대한민국)|국회의사당]]을 포위하였다. 국회의원 총 210석 중 166명이 출석한 가운데 기립투표 결과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었고, 7월 7일 공포하였다. 비상계엄은 28일 해제되었다. [[이승만]]은 [[서민호]]에 대한 사형선고를 재심하라고 명령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26_1952_07_09_0040|제목=정전협상과 한국내정에 관한 미국무부 극동문제담당 차관보 앨리슨의 비망록|성=|이름=|날짜=|웹사이트=
[[1952년]] 8월 5일 [[직접 선거|직접선거제]]로 실시된 [[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재선되었다.
줄 145 ⟶ 136:
[[한국 전쟁]]에서 대한민국 국민 100만명 이상, 국군 28만여 명이 학살 당했고, 국민 30만여 명, 국군 70만여 명이 부상을 입었고, 수많은 국민들이 [[납북자|납북]] 당했으며(일부는 스스로 [[월북]]), 남한 내 공업 기반 절반과 국부의 1/4이 손실되었다. [[유엔군]] 규모로 따지면 사상자 규모는 400만여 명에 달하였다.[[파일:The Sigining ceremony of the ROK-U.S. Mutual Defense Agreement2.jpg|섬네일|1954년 1월 29일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서에 서명하고 있는 [[변영태]] 외무장관|대체글=]][[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는 1954년부터 문해교육 정책, [[문맹퇴치 5개년 사업]], 초등 의무교육완성 6개년계획 등을 진행하여 1945년 78%였던 [[문해율에 따른 나라 목록|문맹률]]을 1958년 4.1%로 급감시켰고,<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421&aid=0002321097&sid1=001|제목=글자 알아도 글 못 읽는 아이러니…'문맹률 제로' 신화 깨야|언어=ko|확인날짜=2020-09-10}}</ref> 총 학령아동의 취학률은 1957년 90%를 넘겼고, 1959년에는 96% 목표를 달성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18&aid=0004120770&sid1=001|제목=[이젠 무상교육]고교만 빠진 무상교육…2022년 완성|언어=ko|확인날짜=2020-09-10}}</ref>
[[1954년]] 4월 20일, [[대한민국의 교육과정|제1차 교육과정]]이 제정되었다. 최초로 우리 손으로 만든 국가수준 교육과정 체제였으며,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사조와 신교육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대한민국의 교육과정|제1차 교육과정]]은 전쟁으로 파괴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현실생활을 개선하고 향상시킬 사회 개선의 의지를 강조하였다. 또한 반공교육, 도의교육, 실업교육을 강조하였고 특별활동시간을 최초로 배정하였다.
[[1954년]] 5월 20일, 이승만은 본인의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사사오입 개헌
[[1955년]] [[제네바]]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국제회의가 개최되면서 국내에 [[원자력]]이 처음 소개되었다. 이때 세 명의 과학자가 참가하였고, 이듬해 [[대한민국 문교부|문교부]] 기술교육국 산하에 원자력과를 설치하였다. [[원자력]]의 필요성을 느낀 [[이승만]]은 원자력요원의 양성을 지원하였고, 1차적으로 네 명의 원자력연수생들을 미국 알곤국립연구소에 파견하였다. 동시에 장기적인 [[원자력]] 인력양성을 위하여 1958년 4월 [[한양대학교]]에 40명 정원으로 원자력공학과를 신설하였고, 이듬해 [[서울대학교]]에서 20명을 모집하였다.<ref>{{웹 인용|url=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0790|제목=원자력공학(原子力工學)|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2020-09-14}}</ref>
[[1956년]] 5월 13일 [[유엔 한국 위원회]] 대표 전원이 선거 감시 차 각 지방에
[[1958년]] 1월 1일 국회는 [[협상선거법]]을 통과시켰다. [[협상선거법]]은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과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의 이해가 절충된 법안이었다. 언론 규제 조항에 대해서는 위헌이라는 시비가 있었지만,
195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은 주로 [[미국]]의 무상원조로 이루어졌고, 그만큼 대한민국의 경제정책은 원조 공여국이었던 미국의 목표대로 추진되는 측면이 컸다. 이승만 정부는 중공업 중심의 성장정책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한국을 일본 공산품시장으로 위치지우기 위해 안정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1955년]]부터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고 확대되기 시작하자 미국의 원조자금은 베트남을 향했다. 이와 동시에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무상원조가 유상차관의 형태로 바뀌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경제에 불황을 초래했지만 한편으론 대한민국 경제정책에 대한 미국의 간섭이 줄어들었다. [[1957년]] 미국은 [[개발차관기금]](Development Loan Fund)을 설치하여 대한민국 정부, 기업과 개인 사업자가 미국으로부터 낮은 이자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하였고, 이에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는 [[1959년]] 3월 부흥부 산하에 있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경제 개발 3개년 계획(1960~1962)을 완성했다. [[시장 경제]] 원칙 하에서도 국가가 개입하여 [[사회기반시설]]을 조성하고 [[중공업]] 중심의 자립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으로 계획은 전면 중단되고,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에서 [[대한민국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재수립된다.
줄 196 ⟶ 187:
1968년 12월 5일, 박정희 정부는 [[국민교육헌장]]을 공표하여 [[민족주의]]와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1970년대초부터 농촌의 근대화, 지역의 균형적인 발전, 의식개혁을 목표로 하는 [[새마을 운동]]을 실시하여
1972년 [[박정희]]의 지시로 [[이후락]]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파견되어 [[김일성]]과 만나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최초의 남북회담으로써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 제정하였다. 기존의 외세의존적이고 대결지향적인 통일노선을 거부하고 올바른 통일의 원칙을 도출해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러나 양측은 이 선언을 자신들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하였다.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한 지 3개월 만인 10월 17일 박정희는 성명을 구실삼아 [[10월 유신]]을 발표하여 [[헌법]]을 이용한 [[독재]]를 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첫 남북간 대화의 물꼬를 튼 분위기속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여 [[주체사상]]을 확립하였다.
줄 204 ⟶ 195:
1972년부터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였으나 미국의 반대로 1977년에 포기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77753.html|제목=“박정희 1972년 핵개발 착수…1977년 포기했다”|날짜=2011-05-12|언어=ko|확인날짜=2020-07-29}}</ref>
[[파일:Kori NPP.jpg|섬네일|고리원자력발전소]]
미국의 무상 차관액을 기초로 한 제3차, 4차 [[대한민국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인근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조선인민군]] 군인 30여명이 [[도끼]]를 휘둘러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주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주한 미군]] 및 [[대한민국 국군]] 병력 대다수에게 피해를 입힌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발생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북한이 1년 반 가까이 준전시 상태, 즉 전쟁 일보 직전에 있었다. 국내에 반공주의를 되새겼을 뿐 아니라 주한 유엔군 장교를 살해한 사건이라서 전세계적 파장도 컸으며, [[중국]]과 [[소련]]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두둔하지 않았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인해 유신 체제는 붕괴되었다.
줄 222 ⟶ 211:
[[박정희]] 시해 후 등장한 [[하나회|신군부]](하나회)는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7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민간인 165명, 군인 23명, 경찰 4명이 사망하였고 민간인 3,139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사회적 불안은 이미 [[유류 파동|2차 석유 파동]](오일 쇼크)으로 고통 받고 있던 대한민국 경제에 더 큰 타격을 입혔다. 국내 경제성장률은 1978년 9.3%에서 1979년 6.8%, 1980년에 -1.5%를 기록했다. 특히 1980년 당시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오일 쇼크의 후폭풍으로 28.7%에 달해 서민들의 고통이 더욱 가중됐다. 고물가 현상은 81년까지 계속돼 20%대의 살인적 인플레이션을 경험하게 된다. 이후 [[대한민국 제5공화국|전두환 정부]]의 경제 정책은 성장보다는 물가 안정에 주력하는 기조가 유지됐다. 이에 따라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983~87년 연평균 2.8%로 크게 낮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경제성장률은 같은 기간 연평균 9.5%의 고성장이 지속됐다
1980년 10월 27일, 헌법 개정을 하여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선출하되 선거인단은 국민이 선출하도록 하는 [[대한민국 헌법 제9호]]를 공포하였다.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는 제12대 [[전두환]]이 선출되었다. 제5공화국은 영구집권이 가능한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의 6년 연임제 대신 7년 단임제를 고수했으며, 통금 해제 및 교복 자율화 등의 유화 조치를 취했다.
줄 228 ⟶ 217: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박정희]]의 [[제4공화국]]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헌법 개정 과정에서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했다. 또한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민주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로 엮어서 제거하면서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정의사회구현, 복지사회건설, 선진조국창조' 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1980년 10월 27일 결국 해산된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은 1981년 1월 15일 창당한 [[민주정의당]]에 당 재산을 양도하였다. [[민주정의당]]은 [[보수주의]]·[[권위주의]]·[[반공주의]]·[[국민보수주의]]·[[경제적 자유주의]]를 이념으로 삼았고 [[전두환]], [[노태우]]가 총재를 거쳤다.
[[박정희 정부]]에 이어 헌법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1919년 독립운동을 위해 발행된 [[독립공채표|임시정부 채권]]에 대해 1983년 '상환조치법'을
1981년 1월 23일, 구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및 [[유신정우회]] 계열 인사들 중 정치활동금지법에 묶이지 않거나 풀린 일부는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의 후신인 [[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줄 240 ⟶ 229:
한편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민주당계 정당]]인 [[통일민주당]]에선 대통령선거에 나설 후보자 선출문제를 두고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가 대립하다가, 1987년 10월 29일 [[동교동계]] 인사들이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였다. [[평화민주당]]은 [[자유주의]]·[[중도개혁주의]]·[[자유민주주의]]·민주화를 이념으로 삼았다.
1987년 11월 30일, [[김종필]]을 대표로 하는 [[신민주공화당]]이 창당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5445770&sid1=001|제목=선진당 탈당 도미노..창당 이래 최대 위기|언어=ko|확인날짜=2020-07-30}}</ref>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에서 [[박정희 정부]] 그리고 [[대한민국 제5공화국|전두환 정부]]까지 계속적으로 강화된 [[반공주의]] 정책은 경제적 자유를 제외한 정치적·사회적 자유를 억압하거나 특히 정권의 불법적·비도덕적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분명히 악용돼 대한민국 보수주의의 핵심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노태우 정부]]===
1987년 12월 16일에 [[직접 선거|직선제]]로 실시된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는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당국의 제재가 풀린 뒤 수 많은 민주적인 성향을 띤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발언했다. 그들은 진보 및 좌파 운동권의 지나친 자살, 폭력적 운동을 비판했다. 특히 [[김지하]]는 대한민국 [[운동권]]의 과격성을 비판했다. 운동권측은 그의 칼럼을 맹렬히 비난했지만 보수주의자들의 많은 공감대를 얻었다.
1988년 1월 1일, [[노태우]]는 신년사에서 '정치인에 대한 풍자의 자유를 적극 허용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시절 은근히 유행하던 정치인들에 대한 풍자가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였다. [[민주정의당]]은 노태우를 당선시킴으로써 기사회생 하는 듯 보였으나, 1988년 4월 26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면서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1990년 1월 22일, 당시 집권 여당 [[민주정의당]]과 제2야당 [[통일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이 [[3당 합당]]하고 [[이회창]]을 총재로 하는 [[신한국당|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다. 민주자유당은 [[보수주의]]·[[반공주의]]·[[경제적 자유주의]]를 이념으로 삼았다. 개헌저지선을 훌쩍 넘는 218석의 절대권력을 쥐게 된 [[신한국당|민주자유당]]은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했는데, 일각에선 날치기 통과 강행이라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1988년 [[7·7 선언]]을 발표하여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1988년 8·15 경축사에서는 "민족 간의 분단 장벽은 이제 개방과 교류 협력으로 허물어야 한다"면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다. 이후 김일성은 [[인민정권 창건일]]을 하루 앞두고 통일 문제를 논의할 남북 간 위원회 설립을 위해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해도 좋다는 뜻을 내비쳤다. 다만 이는 현재의 남북 간 정치·경제 체제의 유지를 전제로 한 '연방제 통일'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주한 미군]] 철수와 상호 불가침 조약 체결도 반복하여 주장했다. 이후 실무 접촉에서 의제 채택 과정에서도 이견만 확인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다가 결국 [[남북정상회담]]은 끝내 성사되지 못하였다.
줄 255 ⟶ 246:
1988년 9월 17일, 서울에서 [[1988년 하계 올림픽|하계 올림픽]]이 개막되었다. 대한민국이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를 개최한 것은 [[1986년 아시안 게임]] 이후 2년 만의 일이었으며, 이를 통해 국가의 자부심이 높아졌다.
1989년 5월 22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연세대학교]]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다. 이때 학교는 이미 [[전투경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으며 창립식 직후 폭력적인 진압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다쳤다. 이날 참가하였던 교사들은 전원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 날 저녁 노태우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1989년 11월 12일, [[박노해]]와 [[백태웅]] 등 200여명이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이라는 [[대한민국의 반국가단체|반국가단체]]를 결성하였다. 사노맹은 반제국주의, 반파쇼, [[민족 해방|민족해방]]을 이념으로 '폭력, 소요 사태를 일으켜 노태우 정부를 타도한 후 대한민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1991년 4월 29일 [[대한민국 국가안전기획부|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하여 해산되었으며, 대법원 판결에 따라 [[대한민국의 반국가단체|반국가단체]]로 확정되었다. 사노맹의 핵심 인물이었던 [[박노해]]는 7년여의 수배생활 끝에 1991년 체포되어 무기징역에 처해졌으나, 1998년 [[김대중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7년 6개월만에 석방되었다. [[백태웅]]은 [[국가보안법 (대한민국)|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1991년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99년 3월 1일 [[김대중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은수미]]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98년 [[김대중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조국 (법학자)|조국]]은 교수([[울산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법학과 조교수)로선 처음으로 [[국가보안법 (대한민국)|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반 년간 수감되었다.
줄 262 ⟶ 253:
1991년에는 지방자치제를 부활시키라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요구를 노태우가 전격 수용, 3월과 6월에 [[1991년 대한민국 지방선거]]가 치러지면서 30여년만에 [[지방자치체|지방자치제]]가 시행되었다.
1992년 9월 18일, 노태우는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선언, 이에 따라 10월 9일 사상 첫 여당이 없는 중립내각이 출범하였다. 한편 대선 직전 대통령이 여당을 탈당하는 선례를 만들기도 했다.
줄 307 ⟶ 296:
=== [[김대중 정부]] ===
1997년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는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과 [[DJP연합]]하였고, 1997년 12월 18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었다.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였고,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은 연립정부를 구성하였다. 2000년 4월 13일 실시된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이 17석을 획득, 단독으로 [[교섭단체]] 등록을 할 수 없게 되자 [[민주당 (대한민국, 2000년)|새천년민주당]]은 의원직 꿔주기를 하여 당적을 옮겨주기도 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0&aid=0000041637&sid1=001|제목=[민주당 3인 자민련 입당]'의원 꿔주기' 쇼크|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동아일보}}</ref> 하지만 이후 지나친 [[김종필]]의 내각 내 장관임명권 행사는 [[동교동계]] 인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2001년 9월 [[DJP연합]]은 결국 파국을 맞게 된다.<ref name=":0">{{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0&aid=0000083421&sid1=001|제목=임동원 해임안 가결… DJP 공조 파기,자민련 교섭단체 붕괴|언어=ko|확인날짜=2020-09-10
1998년 1월 23일, [[일본]]이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다. 이 당시 [[대한민국]] 어민들은 [[일본]] 측에 강제 나포되어 포승줄로 묶여 폭행 당하거나 강제로 어장에서 쫒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1998년 9월 25일, [[김대중 정부]]는 양국간의 경색된 관계를 타결하고 새로운 한일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한일어업협정|신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한일어업협정|신한일어업협정]]은 [[독도]]를 '한일 중간수역'에 포함시켜 [[독도]] 영유권에 대한 국제적 분쟁의 소지를 남겼다. 또한 [[한일어업협정|신한일어업협정]] 체결로 인해 대한민국 어민들은 [[동해]]에서 장어, 대구, 명태, 꽁치, 갈치 등을 거의 잡을 수 없게 되었고, 오징어 황금어장인 [[대화퇴]] 어장도 절반 정도 중간수역으로 설정되는 등 대한민국 어업에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다.
줄 319 ⟶ 308: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 사건]]은 공산폭동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고 말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0028398&sid1=001|제목=한나라당 제주도지부, 김총장 발언 유감 표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연합뉴스}}</ref><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2904878|제목=[뉴스를부탁해]“DJ도 제주 4·3은 공산폭동이라고 했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서울신문|확인날짜=}}</ref>
2000년 3월 9일, [[김대중]]은 [[독일]] 국빈 방문 중 [[베를린 자유대학]]을 방문, 기념 연설 말미에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항구적인 평화와 남북간의 화해·협력을 이루고자 한다"고 하는 [[베를린 선언]]을 하였다. 이후 [[김대중 정부]]는 '연방제 통일'을 목표로 금강산 관광 추진, [[개성공업지구|개성공단]] 개발,
2000년 3월 31일, [[김대중]]은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김성수 (언론인)|인촌]]([[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선생은 민족 민주 문화주의 3대 강령을 내건 [[동아일보]]로 우리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고 말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0&aid=0000121458&sid1=001|제목=인촌 김성수 선생, 각계 지도자들의 증언|언어=ko|확인날짜=2020-09-12}}</ref>
줄 342 ⟶ 331:
2002년 10월 3일 [[제임스 켈리]]를 대표로 한 미국 협상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이 비밀리에 고농축 우라늄으로 핵탄두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면서 [[제2차 북핵위기]]가 발생하였다. 이에 중국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 [[6자 회담]]을 관련국들에게 제안했으며, 2003년 8월 27일 [[베이징]]에서 제1회 [[6자 회담]]이 개최되었다. [[6자 회담]]을 통해 관련국들이 2005년 [[9·19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제2차 북핵위기는 해결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북한은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전혀 이행되지 않는다며, 2006년 10월 9일 [[200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1차 핵 실험]]을 단행하였다.
2003년 11월 11일, [[개혁국민정당]], [[새누리당|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의 내 정당 개혁, 정치 개혁의 완수를 요구하던 개혁 세력들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였다. 열린우리당은 [[자유주의]]·[[사회자유주의]]·[[참여 민주주의|참여민주주의]]·[[실용주의
2004년 11월 23일, [[자유주의연대]]가 출범하면서 [[대한민국의 뉴라이트]](New Right, 신우익)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005년 11월 7일에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출범하였다. [[대한민국의 뉴라이트|뉴라이트]]를 이끄는 인사들은 대부분 정통보수세력이 아니라 진보세력, [[주체사상파]], [[운동권]] 등에서 전향을 한 사람들이었다. [[1989년 혁명|1989년 동유럽 혁명]]과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인해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이론적 구심점을 잃은 [[운동권]] 출신들의 전향 선언이 잇따랐으며, 1996년 [[연세대 사태]]와 1997년 [[이석 치사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대학가에서 [[주체사상파|주사파]]의 세는 완전히 꺾였다. 그래서 이들은 [[운동권]]을 해산시킴과 동시에 정치권으로 진출했는데, [[DJP연합]] 파탄 후 운동권도 가리지 않고 받던 [[김대중]]도 이들만큼은 주류 정치권에 편입시키길 거부하였다. 이 때문에 이들은 이념을 전향하고 [[대한민국의 뉴라이트|뉴라이트]]를 탄생시켰다.<ref name=":10">{{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47&aid=0000054221&sid1=001|제목=그들은 NL주사파 운동권 핵심이었다|언어=ko|확인날짜=2020-08-05}}</ref>
[[자유주의연대]]와 [[뉴라이트전국연합]]은 대한민국 뉴라이트 운동의 양대 축으로 불리며,
2005년 5월 31일, [[노무현 정부]]는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를 발족하였다. 이후 반민규명위는 2006년 12월 6일, 2007년 12월 6일, 2009년 11월 27일 세 차례에 걸쳐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총 1,006명을 발표했다. '혈서 군관지원'으로 친일행적 논란이 있던 [[박정희]]는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민주당 (대한민국, 2000년)|새천년민주당]]의 전신인 [[한국민주당]]을 창립한 [[장덕수]], [[김성수 (언론인)|김성수]]는 포함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2997366&sid1=001|제목=親日규명위 친일인사 704명 추가 발표(종합)|성=|이름=|날짜=2009-11-27|웹사이트=|출판사=연합뉴스}}</ref>
줄 362 ⟶ 349:
2008년 4월 [[한미 쇠고기 협상 논란]]으로 인하여 5월부터 소위 [[2008년 대한민국 촛불 시위|광우병 촛불 시위]]가 발생하여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국정에 큰 차질을 빚게 되고 지지율이 10%대로 급락하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애초에 [[이명박]]은 당선 직후 정치성과는 거리를 둔 [[실용주의]]를 내세우면서, [[문재인]]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장|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임자가 존중받는 전통을 만들겠다고 피력하여 전임 대통령에 대한 정치보복 가능성을 배제하였다. 그러나 이 사태의 배후의 중심에 [[친노]]세력이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자, [[이명박 정부]]는 2008년 7월 [[한상률]] 국세청장으로 하여금 [[박연차]]를 비롯한 [[노무현]] 주변의 측근들에 대한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진행하도록 하여, 전임자에 대한 관용에서 정치적 응징으로 방침을 급선회하였다. 결과적으로 측근들로부터 터져나오는 [[박연차 정관계 로비 사건|각종 뇌물 및 비자금 수수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로 궁지에 몰린 [[노무현]]은 2009년 5월 23일 [[김해]] [[봉하마을]] [[봉화산 (김해)|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2008년 9월 [[이명박 정부]]는 [[2007-2008년 세계 금융 위기|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에 성공적으로 대처하여 조기에 위기를 극복하는 성과를 거뒀다.
줄 399 ⟶ 382:
2015년 9월 4일, [[박근혜]]는 상해 임시 정부 청사 재개관식에 참석하여 "비록 3층의 소박한 건물이었지만 그곳에서 대한민국 법통이 시작됐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비롯한 다양한 독립 투쟁의 근거지가 됐다"고 밝혔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5&aid=0000815912&sid1=001|제목=朴대통령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서 대한민국 법통 시작”|언어=ko|확인날짜=2020-07-31}}</ref>
2016년 9월을 전후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졌다. 이에 2016년 10월부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까지 일어났다. 2016년 12월 9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는 박근혜를 파면하여 직무 정지를 시키고,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탄핵]]이 인용되어 박근혜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줄 411 ⟶ 392:
2017년 5월 4일, 5일, 9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제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이 당선되었다. 다음 날인 5월 10일에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였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강기정]], [[윤건영 (1969년)|윤건영]], [[이인영 (1964년)|이인영]], [[우상호]], [[오영식]], [[임종석]] 등 [[극좌]] [[민족 해방 (운동권)|NL주사파]] 계열<ref name=":10" /> 인사 및 [[조국 (법학자)|조국]], [[박용진 (1971년)|박용진]] 등 [[극좌]] [[인민민주주의|PD 계열]] 인사들을 당정청의 요직에 대거 발탁했다.<ref name=":24">{{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262&aid=0000010879&sid1=001|제목=[이색분석] NL(민족해방)계 출신 요직 장악 PD(민중민주)계 출신이 보완|성=|이름=|날짜=2017-12-03|웹사이트=|출판사=신동아}}</ref> 교육 분야에서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약진하였다. 대통령직속 국가교육회의와 [[대한민국 교육부|교육부]], 시·도교육청의 최상층부와 핵심 요직들이 전교조 출신과 親전교조 인사들로 채워져 있다. 유·초·중등 정책 전반이 전교조 네트워크에 '아웃소싱'되고 있다는 평가도 나왔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5&aid=0001358711&sid1=001|제목=文정부 교육계 주류는 ‘전교조 네트워크’… 교육정책 ‘좌지우지’|성=|이름=|날짜=2020-09-04|웹사이트=|출판사=국민일보}}</ref>
2017년 12월 28일, [[문재인 정부]]가 2015년 12월 28일에 [[박근혜 정부]]와 일본 정부가 타결했던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에 대해 "중대한 흠결이 있었다"고 평가하며 사실상 파기를 선언하자 한일관계가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더불어민주당]]
2018년 6월 13일에 실시된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제7회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은 [[제19대 대통령 선거|제19대 대선]]에 이어서 또 다시 참패를 당하였다. [[남경필]], [[김문수 (1951년)|김문수]] 등 거물급 정치인들이 모두 낮은 득표율로 낙선하였다. 이에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퇴하였고, 혁신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진입하였다.
줄 421 ⟶ 400:
2020년 2월 17일, [[자유한국당]],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전진당]]이 보수대통합을 추진하여 [[미래통합당]]이 출범하였다. 미래통합당은 보수주의·사회보수주의·반공주의를 이념으로 삼았다.
2020년 4월 15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은 103석을 획득해 180석을 획득한 [[더불어민주당]]+[[더불어시민당]]에 역대급으로 참패하였다. 이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에서는 북한 외교관 출신 [[태영호]], [[윤봉길]]의 장손녀 [[윤주경]],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김예지 (1980년)|김예지]] 등이 당선되어 반공주의를 여전히 강조하면서도
2020년 5월 7일, [[더불어시민당]]의 [[윤미향]]과 그가 연관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기억연대]]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이용해왔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에 [[더불어민주당
2020년 5월 22일, [[미래통합당]]은 [[김종인]]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하였다. [[김종인]]은 강경보수 [[친박]]과 극우 성향의 [[대한민국의 뉴라이트|뉴라이트]]를 당권에서 최대한 배제하고 역시 강경보수 성향인 [[기독교 우파]]와도 선을 그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277&aid=0004743117&sid1=001|제목="우리 당 극우와 달라" 강경 보수층과 선 긋는 통합당|성=|이름=|날짜=2020-08-26|웹사이트=|출판사=아시아경제}}</ref> 여기에 [[안희정]], 김훈, [[유승현]], 원종건, [[오거돈]] 등(5월 22일 이후에는 [[박원순]], 김동하, [[박재호]], 이경환 등도)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의 연이은 [[성폭력]], 장애인·여성·외국인·지역 비하 발언,<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8&aid=0002434800&sid1=001|제목=이해찬 “한국남성, 베트남 여성 선호”…야당 “정신 나간 망발”|성=|이름=|날짜=2018-12-04|웹사이트=|출판사=한겨레}}</ref><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56&aid=0010782955&sid1=001|제목=이해찬 또 장애인 비하?…“선천적 장애인 의지 약해”|성=|이름=|날짜=2020-01-15|웹사이트=|출판사=KBS}}</ref><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15&aid=0004387107&sid1=001|제목="부산 초라하다"는 이해찬…이번엔 서울 두고 "천박한 도시"|성=|이름=|날짜=2020-07-25|웹사이트=|출판사=한국경제}}</ref> [[인천국제공항공사]] 보안요원 정규직 전환 절차 논란(인국공 사태),<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11701516&sid1=001|제목="공기업 비정규직 정규화 멈춰라"…靑 청원 하루만에 20만 넘어(종합)|성=|이름=|날짜=2020-06-24|웹사이트=|출판사=연합뉴스}}</ref> 의회 독재,<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366&aid=0000561820&sid1=001|제목=與, '부동산 증세 3법' 기재위 기습 상정… 통합당 "의회 독재"|성=|이름=|날짜=2020-07-28|웹사이트=|출판사=조선비즈}}</ref><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9&aid=0004668487&sid1=001|제목=진중권 "秋 증인채택 거부는 180석 의회 독재…국민은 몰라도 된다"|성=|이름=|날짜=2020-10-06|웹사이트=|출판사=매일경제}}</ref> 부동산 가격 폭등<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5&aid=0003015557&sid1=001|제목="文부동산정책 더는 안믿어" 민주당원 탈당 인증샷 잇따라|성=|이름=|날짜=2020-07-07|웹사이트=|출판사=중앙일보}}</ref> 등 전방위적인 실정과 폭정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폭발하자 [[미래통합당]]이 반사이익을 얻고 정당 지지율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2020년 8월 10~12일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처음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을 역전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11812194&sid1=001|제목="민주 33.4%, 통합 36.5%…탄핵 이후 지지율 첫 역전"[리얼미터](종합)|성=|이름=|날짜=2020-08-13|웹사이트=|출판사=연합뉴스}}</ref>
줄 431 ⟶ 410: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겪으며 [[기본소득|기본소득제]]가 화두에 올랐다. 좌익은 물론 우익 내에서도 기본소득제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우익 내에서는 기본소득제 도입에 대한 비판이 컸다. 기본소득이란 '재산이나 소득의 많고 적음,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와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균등하게 지급되는 소득'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경쟁의 순기능([[시장 경제]])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의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보수진영에서는 기본소득제라는 용어는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선별복지(빈민 구제)라는 보수주의적인 방향으로 검토하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469&aid=0000515463&sid1=001|제목=김종인 “기본소득제, '저소득층 최소 생계비'로 수정 도입해야”|언어=ko|확인날짜=2020-08-01}}</ref>
2020년 7월 10일 [[더불어민주당]] 출신 [[서울특별시장|서울시장]] [[박원순]]이 여비서에게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기소 당하자마자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발생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5&aid=0001340366&sid1=001|제목=“신체접촉, 개인적 사진도”… 박원순 성추행 고소 내용|성=|이름=|날짜=2020-07-09|웹사이트=|출판사=국민일보}}</ref> [[박원순]] 스스로 [[페미니즘]]을 자처했었기 때문에 박원순을 지지한
2020년 9월 17일 [[국민의힘]] 소속 [[윤영석]]은 "과거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민주당의 뿌리야말로 친일 지주 세력이 창당을 한 [[한국민주당|한민당]]"이라고 말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119&aid=0002428729&sid1=001|제목="뿌리가 친일 지주"…윤영석, '쿠데타 세력' 발언 홍영표에 '멍군'|성=|이름=|날짜=2020-09-17|웹사이트=|출판사=데일리안}}</ref>
2020년 10월 21일 [[더불어민주당]] 탈당을 선언한 금태섭은 "지금처럼 집권여당이 비판적인 국민들을 ‘토착왜구’로 취급한다면 민주주의와 공동체 의식이 훼손되고 정치에 대한 냉소가 더욱더 판을 칠 것"이라고 비판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18&aid=0004764526&sid1=001|제목=금태섭 탈당…"편가르기·내로남불·토착왜구 취급, 동의 못해"|성=|이름=|날짜=2020-10-21|웹사이트=|출판사=이데일리}}</ref>
줄 453 ⟶ 422:
=== 정치·경제관 ===
* [[자유민주주의]](또는 서구식 민주주의)와 교집합이 크다.
*'''정치관'''
** 고정된 정치관: [[고전적 자유주의]], [[대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보수주의]], [[법치주의]], [[권력 분립|삼권분립]], [[국가안보]], [[점진적 개혁]] 등
** 시대상에 따라 가감된 정치관: [[반공주의]], [[권위주의]], [[국가주의]]
* '''경제관'''
** 고정된 경제관: [[자본주의]], [[시장 경제|시장경제]] 등
** 시대상에 따라 변화된 경제관: [[국가자본주의]]
** 성과주의·복지주의에 대한 관점
***[[우익|우파]]와 [[극우|극우파]] 공통적으로 더 좋은 성과를 낸 사람이 더 많은 월급을 받는 세상이 정의롭다고 본다.
줄 475 ⟶ 444:
* '''세계관·통일관'''
**고정된 가치관: [[민족주의]] 등<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3&aid=0003418209&sid1=001|제목=[전문기자 칼럼] '자유'와 '公益'이 보수 우파 양 날개 돼야|성=|이름=|날짜=2018-12-26|웹사이트=|출판사=조선일보}}</ref>
**[[우익|우파]], [[극우|극우파]],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 '''역사관'''
▲***[[우익|우파]], [[극우|극우파]], [[대한민국의 보수정당|보수정당]] 지지세력 등을 포함하는 대한민국 보수주의자들의 경우, 자신의 뿌리를 [[한국사]]에서 찾는다면 [[개화파|개화파 3세대]](1890), [[대한민국 임시 정부]](1919)를 주로 지목한다.<ref name=":9" /> 자신의 뿌리를 한국인물사에서 찾는다면 [[이승만]], [[김구]]를 주로 지목한다.<ref name=":5" /><ref name=":11" /> 자신의 뿌리를 근현대 정당사에서 찾는다면 [[대한독립촉성국민회]](1946),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1951)을 주로 지목한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9&aid=0004646027&sid1=001|제목=김종인, 당명에 `국민` 넣어…중도층 포용해 차기대선 정조준|성=|이름=|날짜=2020-08-31|웹사이트=|출판사=매일경제}}</ref><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18&aid=0004728623&sid1=001|제목=문 닫은 '미래통합당', 보수역사상 가장 짧았다|성=|이름=|날짜=2020-09-03|웹사이트=|출판사=이데일리}}</ref><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32&aid=0002701191&sid1=001|제목=[김태일의 정치시평]자유당, 공화당, 민정당, 그리고 새누리당|성=|이름=|날짜=2016-05-23|웹사이트=|출판사=경향신문}}</ref>
=== 기타 ===
줄 500 ⟶ 452:
**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165명]]을 죽이라고 지시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유로 [[전두환]]을 타협없이 벌한다면 [[6.25 전쟁|1,500,000명]] 이상을 죽이라고 지시한 [[김정은]] 일가는 당연히 타협없이 엄벌해야 한다."
* '''리더십에 대한 관점'''
**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 비판 ==
*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는 비판'''
** [[자유민주주의]]
* '''신자유주의 기조에 대한 비판'''
** [[신자유주의]]
== 각주 ==
줄 518 ⟶ 465:
{{대한민국 우익}}
[[분류:대한민국의
▲[[분류:대한민국의 보수정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