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리즈카 투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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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각의 결정 후 수 개월 안에 소유주의 8할 정도가 "국책이기 때문에 절대 반대는 아니며 조건을 걸고 서로 이야기하자"<ref>[[#千葉県資料財団1|財団法人千葉県史料研究財団(1997)]]796頁。</ref>라고 말하며 조건 찬성파로 전향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ref name=":22" /><ref name=":28" /><ref name="fukuda7071"/><ref>[[#飯高春吉|飯高春吉(1976)]]42頁。</ref> 나리타 시의회{{refnest|group=주해|나리타 시의회의 공항 설립 반대 결의안은 반대파의 담판이나 회의장 포위 등의 압력을 받은 가운데 7월 4일 내각회의 결정이 발표된 직후 수 시간만에 보수계 의원을 포함한 찬성 17명, 반대 5명, 기권 3명으로 가결되었으며, 당시 나리타 시장이었던 [[후지쿠라 다케오]]는 "왜 그런 경솔한 일을 하였는가"라고 말하기도 하였다.<ref name=":28"/>}} 및 시바야마 정의회{{refnest|group=주해|시바야마정은 초기에는 [[농협]]을 중심으로 반대 운동이 시작되어 한 때 정장인 데라우치 모토스케 이하 정사무소 직원들이 "공항 결사 반대"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집무를 보기도 하였다.<ref>[[#大坪景章|大坪景章(1978年)]]51-52頁</ref>}}에서도 이 해 초에 가결하였던 반대 결의안을 백지로 철회하였다.{{refnest|group=주해|[[후카부에 요시나리]]는 이 당시 나리타 시의회에 의원당 각각 25만엔이 배부되었다고 증언하였다.<ref>{{Cite journal|last=深笛|first=義也|author-link=深笛義也|year=|date=2020-03-30|title=もうひとつの日本空港史|journal=空港をゆく 改訂版|volume=|page=|pages=110-113|publisher=イカロス出版}}。</ref>}}<ref>[[#原口和久1|原口和久(2000年)]]160-161・265頁。</ref> 고촌 지역은 부락 유력자들의 영향이 강했으며 특히 나리타의 [[고마이노]], [[돗코]]에서는 유력자가 조건 찬성파로 돌아서자 부락 전체가 같이 의향을 바꾼 경우도 있었다.<ref name="moyu172"/><ref name=":9" />
 
1968년 4월 6일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운수대신과 도모노 지사의 입회 하에 공항공단과 조건부 찬성파 4개 단체 사이 "용지 매도에 관한 각서"를 교환하여 공항공단은 공항 예정지의 사유지 중 89%(597 헥타르)를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ref name=":22" /><ref name="asahi-2008-030-17-d-37">{{Cite news|title=(30年の物語 78成田開港から)開港前夜 用地買収交渉:上 補償 /千葉県|date=2008-03-17|newspaper=朝日新聞/朝刊 千葉・1地方|page=37}}</ref> 사전에 이루어졌던 조건부 찬성파 단체와 교섭을 거쳐 각서에는 토지 매입가격을 당초 설명한 가격보다 더 높여 밭은 140만엔, 논은 153만엔, 택지는 200만엔, 산림 및 임야는 115만엔에 수용하였다.<ref name="asahi-2008-030-17-d-37" /><ref>{{Cite web |date=|url=https://kotobank.jp/word/%E7%94%A8%E5%9C%B0%E5%A3%B2%E3%82%8A%E6%B8%A1%E3%81%97%E3%81%AB%E9%96%A2%E3%81%99%E3%82%8B%E8%A6%9A%E6%9B%B8-885805|title=用地売り渡しに関する覚書|publisher=[[コトバンク]]|accessdate=2017-02-04}}</ref> 또한 밭의 대체지 기준가격은 90만엔으로 당초 설명한 내용에 따라 대체경작지 가격은 매입액의 2/3 정도로 제한되었으며 공항공단은 용지 제공자에게 전직 및 취업을 알선하여 희망자에게는 공항 내 영업권을 부여하고 대체지를 신속하게 조성하기로 합의하였다.<ref name=":12">[[三里塚闘争#隅谷三喜男|隅谷三喜男(1996)]]31-34頁。</ref><ref name="20th4041">[[#新東京国際空港公団|新東京国際空港公団(1987年)]]40-41頁。</ref>
 
계속해서 전업농을 하길 원하는 사람에게 대체지가 우선적으로 배분되었으나 겸업농을 희망하는 사람도 많아 희망자에게 모두 필요한 대체지를 충분하게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전에 있었던 정착지보다 이전한 대체지에서 경지 면적이 줄어드는 등 단점도 있었다.<ref name=":12" /><ref name=":25">[[#隅谷三喜男|隅谷三喜男(1996)]]248-249頁</ref><ref>[[#福田克彦|福田克彦(2001)]]79頁。</ref> 하지만 시세 이상으로 토지 매입 가격을 책정하는 등 보상이 제시된 결과 90%의 지주가 이해를 하여 토지 매입에 찬성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ref name="houdoukyoku">{{Cite web |date=2017-07-29|url=https://www.houdoukyoku.jp/posts/15800|title=【利用客10億人突破】闘争と共存共栄の成田空港|publisher=[[ホウドウキョク]]|accessdate=2017-08-03}}</ref>
 
조건부 찬성파가 되어 용지 매수에 응한 사람들의 심정을 [[오가와 신스케]]의 오가와 프로덕션이 취재를 한 결과 다음과 같았다. 덧붙여 아래의 취재 기록은 실제 프로덕션의 영화 작품에는 사용되지 않았다.<ref name="fukuda7886" />
* 공산당이나 사회당이 농민에게 은혜를 주면 반대 운동에 뛰어들 수 밖에 없지만, 이대로 가면 국가와 현의 원조를 받을 수 없고 대체지의 좋은 곳도 빼앗길 것이다.
* 압력받을 것을 각오하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실은 조건 찬성파가 되고 싶었으나 인근 직전의 일로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사람들이 반수 이상 있었다.
* 이미 공항공단과의 매매에 응해 놓고서도 반대운동이 너무 심해 섣불리 말을 하면 죽을 것 같아서 모두에게 말할 수 없었다.
* 손님이 와도 내 의향을 확인하러 온 줄 알고 마음속으로 차분히 안심하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 (의심과 암귀로) 많이 힘들었다. 정신적 보상도 받고 싶을 정도이다.
* 자신은 공항에 반대하지만 부락이 그렇게 된 이상 조건 찬성파에 들어가지 않으면 도저히 생활할 수 없다.
* 물가 상승률도 고려하면 조건 찬성파가 된 것은 잘한 것은 아니라는 느낌은 있지만(매각을 미룬 쪽이 땅을 더 비싸게 팔았다<ref>[[#アプター|D.E.アプター(1986年)]]31頁。</ref>) 현재 자신의 처신을 생각했을 때 공항이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측량말뚝 저지투쟁과 혁신정당의 이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