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성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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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조씨]]'''(平壤 趙氏) 시조 '''조춘'''(趙椿)은 [[고려 예종]] 때 [[고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남송]]에 가서 [[금나라]]를 토평하였다. 2000년 인구는 41,047명이다.
 
* '''[[옥천 조씨]]'''(玉川 趙氏) 시조 '''조장'''(趙璋)은 고려시대 광록대부(光祿大夫)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옥천(玉川)은 [[전라북도]] [[순창군]](昌)의 [[마한]]시대 지명이다. 2000년 인구는 49,847명이다.
 
* '''[[양주 조씨]]'''(楊州 趙氏) 시조 '''조잠'''(趙岑)은 고려 후기에 호장(戶長)을 지내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추증되었다. 2000년 인구는 23,942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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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 조씨]]'''(金堤 趙氏) 시조 '''조연벽'''(趙連壁)은 [[고려 고종]]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2000년 인구는 14,509명이다.
 
* '''[[한양 조씨]]'''(漢陽 趙氏)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덕원부]](德源府) 용진현(龍津縣 : 현 [[함경남도]] [[문천시]], [[원산시]] 일대)에 세거해 온 사족(士族)의 후예로 [[고려]] 조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朝順大夫 僉議中書事)를 지냈다. 그의 독자 [[조휘]](趙暉)의 후손들이 [[쌍성총관부]]의 총관을 계승했다. 고려 왕족이라는 설도 있다.<ref>[http://blog.daum.net/nostalgiatoroots/15965538 쌍성총관부에 대한 연구 성과와 반성], [http://blog.daum.net/nostalgiatoroots/15965692 고려시대 성씨의 유동성]</ref> 후손들이 조선이 개국하자 한양(漢陽)으로 이거하여 한양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2015년 호적상 한양 조씨의 영흥 조씨를 합한조씨 인구는 332,580명이다.
 
* '''[[영흥 조씨]]'''(永興 趙氏)는 [[함경남도]] [[영흥군]]에 세거하던 가문으로 조인재(趙麟才)의 증손 '''[[조영무]]'''(趙英茂)는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죽은 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조영무]]의 아들 '''[[조서 (여말선초)|조서]]'''(趙叙)는 1399년(정종 1)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봉상시박사(奉常寺博士)가 되었다. 그 뒤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사간원예의(司諫院禮議)·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에 이르렀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ref name="nm">{{웹 인용 |url=http://www.kostma.net/FamilyTree/PersonIndex.aspx?mode=1&personid=pd053407&person_uci= |제목=한국학자료센서 - 인물관계정보 |확인날짜=2016-03-1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819213337/http://kostma.net/FamilyTree/PersonIndex.aspx?mode=1 |보존날짜=2016-08-19 |url-status=dead }}</ref> 후손이 모두 법적으로호적상 한양 조씨이므로 인구를 알 수 없다.
 
* '''[[신창 조씨]]'''(新昌 趙氏) 시조 '''[[조영규]]'''(趙英珪)는 [[조선]] 개국공신이며 이방원을 도와 개국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현존하지 않는 문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