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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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아버지 잠취가 죽었을 때, 어려서 바로 곤미가 되지 못하고 당숙 [[옹귀미]]가 곤미가 됐다. 옹귀미는 이미를 다음 곤미로 세우기로 잠취와 약속했었으나, [[원강 (전한)|원강]] 2년(기원전 64년), 약속을 깨고 전한에 사자를 보내 자신이 유해우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원귀미에게 곤미를 물려주고자 했다. 공녀 유해우의 아들을 곤미로 삼는 것은 많은 반대가 있었다. 전한에서는 [[상혜]]를 보내 공녀로원귀미의 보낼아내로 삼을 유해우의 동생의 딸 상부를 호송하게 했으나, 신작 2년(기원전 60년), 상혜 일행이 전한의 국경을 나가기도 전에 곤미가 죽었다. 이에 옛 약속대로 오손의 귀족들에게 곤미로 옹립됐다. 상혜는 원귀미를 곤미로 추대하지 않은 것을 항의하자고꾸짖자고 [[전한 선제]]에게 상주했으나, 원래부터 원귀미를 곤미로 세우기세우고 위해한나라의 유해우를사위로 공녀로삼는 보내는 것을 반대한 [[소망지]]가 상혜의 의견에 반대하고 공녀로 보낸 상부를 돌아오게 하자고 해 상혜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즉위한 후 유목민족의 수계혼 풍습에 따라 유해우를유해우와 첩으로혼인하고 삼았으나아들 오손에서치미(鴟靡)를 민심을낳았으나, 사이는 나빴다. 그리고 포악해 인심을 잃었다. 전한은 이를 틈타 광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니, 인질로 와 있던 광왕의 아들을 호송해 오손으로 돌려보낸 위사마(衛司馬) 위화의(魏和意)와 부후(副候) 임창(任昌)과 유해우가 함께 모의해 주연 자리에서 광왕을 기습했다. 그러나 광왕은 부상을 입은 채 달아났다. 광왕의 아들 세심수(細沈瘦)가 군대를 모아 광왕을 암살하려 한 일당이 있는 오손의 수도 적곡성을 포위했다. 정길이서역도호 [[정길]]이 구원을 오니 세심수는 포위를 풀고 갔다. 전한은 암살 계획이 들통나자 오손과의 우호가 깨질 것을 염려해 중랑장 장준(張遵)에게 약을 가지고 가 광왕을 치료하고 금과 비단을 하사했으며, 위화의와 임창을 장안으로 압송해 참수했다. 그런데 오손에 남아서 사건을 조사하고 있던 [[거기장군]][[장사 (관직)|장사]] 장옹(張翁)이 취조 중 해우공주의 머리채를 잡고 욕을 해서, 귀환한 장옹은 살해됐고, 또 전한에서는 부사(副使) 계도(季都)에게 [[의사]]를 데리고 가서 광왕을 치료하게 했는데, 정작 계도가 돌아오니 광왕이 주살되어야 마땅한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궁형]]에 처했다. 이 암살 모의 사건은 [[오봉 (전한)|오봉]] 연간(기원전 57년 ~ 기원전 54년)의 일로 여겨진다.
 
옹귀미와 [[흉노]] 부인 사이에서 낳은 아들 [[오취도]]는 광왕이 부상을 입었을 때 달아나, 외가인 흉노의 힘을 내세워 무리를 모아 자립하니, 마침내 광왕은 오취도에게 습격을 받아 살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