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살비아티 (대주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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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부임을 거부당해 메디치 가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오르게 된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는 1477년 초, 반 메디치를 꿈꾸던 프란체스코 데 파치,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로마에서 만나 음모를 꾸몄다.<ref>크리스토퍼 히버트 <메디치 가 이야기> 생각의 나무 2002.2.2, p165</ref> 기본 계획은 로렌초 데 메디치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줄리아노]]를 동시에 암살하고 무력으로 의회와 행정부를 전복시킨 후 정권을 찬탈하는 것이었다. 용병대장 몬테세코와 우르비노 공작등 여러명의 동조자들도 모았으며 메디치 가문과 사사건건 부딪치며 갈등하던 교황 식스토 4세으로 부터도 간접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는 자신의 조카 [[라파엘레 리아리오]]를 메디치 가문의 형제에게 보내서, 1478년 4월 26일 피렌체 대성당에서 진행되는 미사에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 메디치|로렌초]]와 [[줄리아노 데 메디치|줄리아노]] 형제를 초대했다. 공격시점은 성체거양의 종소리가 울릴때를 잡았다. 성체거양시 경배를 위해 미사 도중에참석자들 전원이 억숙한 경배를 위해 고개를 숙이는게 관례였기 때문이다.<ref>G.F.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7.9, p</ref> 성체거양이 다른시작되자 공모자들이 메디치 가문의 형제들을 공격하였고,<ref>크리스토퍼 히버트 <메디치 가 이야기> 생각의 나무 2002.2.2, p173</ref> 프렌체스코 살비아티는 곤팔로니에레(수상) 페트루치를 죽이고 행정부를 장악하기 위해 수행원으로 가장한 용병들을 이끌고 베키오 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쿠데타는 실패하고 말았다. 메디치 가문의 줄리아노는 성당에서 즉사했지만 그의 형 로렌초는 사건현장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또한 프렌체스코 살비아티는 수상 페트루치에 의해 체포되었고 성난 군중에 의해 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교황 식스토 4세는 자신이 임명한 대주교 프렌체스코 살비아티가 효수당하자 피렌체 전체를 파문하였다. 또한 나폴리와 동맹을 맺고 2년간 피렌체와 전쟁을 치루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