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리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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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1950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1.4 후퇴]]와 [[장진호 전투]]로 대표되는 참담한 후퇴를 겪어야 했던 유엔군은 [[평택시|평택]]-[[원주시|원주]]-[[삼척시|삼척]] 선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1951년 2월부터 반격에 들어갔다. [[선더볼트 작전]], [[라운드업 작전]], [[킬러 작전]], [[리퍼 작전]], [[러기드 작전]] 그리고 [[돈틀리스 작전]] 등으로 진행된 반격 작전은 이전과 달리 산악 지형을 이용한 중국군의 우회 및 포위 섬멸 전술<ref>중국군은 "손가락 10개를 다치게 하는 것보다 하나를 잘라버리는" 포위 섬멸전을 즐겨 사용했다. 한반도의 산악 지형은 이런 중국군의 전술에 적합했다. </ref>을 염두에 두고 종방향으로 진격이 아닌 횡방향의 연결을 중요시하여 한 번에 최대한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인접 부대의 진격 속도에 맞추어 모든 전선에서 천천히 진격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런 유엔군의 반격 작전에 공산측은 2월 11일에 [[2월 공세]]로 화답했다. [[수원시|수원]] - [[이천시|이천]] - [[원주시|원주]] - [[강릉시|강릉]]까지 진격해 있던 중국군은 유엔군이 울프하운드 작전과 썬더볼트 작전으로 [[한강]]을 회복하고, 다시 [[라운드업 작전]]을 개시하자 [[횡성군]]과 [[홍천군]] 사이 삼마치 고개 및 지평리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중국군은 지평리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군을 몰아낸 다음 [[남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삼마치 고개에 진출했던 한국군 및 미국군은 중국군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후퇴했고, 2월 초 [[미국 9 군단]]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지평리에 진주한 미국 23 연대 전투단의 방어 진지는 견부진지(肩部陣地)<ref>견부진지란, 전후좌우 모두를 통제할 수 있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요충지 또는 차기 작전을 유리하게 하도록 하는 진지를 의미한다. </ref>로 남게 되었다. 지평리에 남게 된 23연대 전투단(23RCT)은 라운드업 작전을 위해 편성된 전투단으로, 중국군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국군은 그 미끼를 물었던 것이다.<ref name=autogenerated1>[http://blog.naver.com/joba34/140013549215 지평리 전투 이야기]</ref>
 
지평리의 23연대 전투단은 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와 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를 주축으로 미국 37포병대대, 미국 82방공포대대 B포대, 미국 503포병대대 B포대가 연대전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중국은 이 지평리에 39군 예하 3개 사단을 투입했다. 좌우 인접 부대가 모두 철수하는 바람에 고립 상태가 된 23연대전투단의 철수를 [[미국 10군단]]이 [[미국 8군|8군 사령부]]에 요청했으나, [[매슈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은 진지 사수를 명령했다. 23연대전투단은 1.6km 길이의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했으며, 북쪽에 1대대, 동쪽 3대대, 남쪽 2대대, 서쪽 프랑스 대대를 배치하여 전투에 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