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임권 투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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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노사 굴욕 ===
[[파일:Hugo-v-cluny heinrich-iv mathilde-v-tuszien cod-vat-lat-4922 1115ad.jpg|섬네일|카노사의 굴욕 (1077년)]]
서임권은 세속군주가 행사하던 기득권으로 교회영지가 주어지는 고위 성직자는 공식적으로 독신이었기에 세습이 불가능했다. 사후에 봉토가 황실에 되돌아오기 때문에 황제에게 있어서 서임권은 성직매매와 측근기용을 통한 권력강화의 수단이었다. 또한 황제가 교황을 파문한 선례는 많이 있었으나 교황이 황제를 파문하는 일은 전대미문의 조치였다.<ref>존 줄리어스 노리치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p229</ref> 하인리히 4세는 이를 무시했으나 상황은 황제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독일 제후들은 황제가 작센 반란을 진압하면서 힘이 커진 것이 달갑지 않았으며 이를 통해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왕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꺼렸다.<ref>브라이언 타이어니 <서양 중세사> 집문당 1989.5.20 p231</ref> 그러던 차에 교황의 파문은 반란의 구실이 되어주었다.<ref>브라이언 타이어니 <서양 중세사> 집문당 1989.5.20 p231</ref> 귀족들은 1077년 2월에 아우그스부르크에서 교황이 주재하는 귀족과 주교들의 회의를 개최할 것이며, 이 회의를 통하여 하인리히 4세의 왕으로서의 자격과 거취에 대해 논의하겠노라고 하인리히 4세에게 통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