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임권 투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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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중앙집권화 ===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사망후 선출된 빅토르 3세는 로마의 복잡한 정국변화로 인해 교황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빅토르 3세의 사망 후 1088년 3월에 우르바노 2세가 즉위했으나 로마는 대립교황이 장악하고 있어 입성할 수 없었다. 정통 교황으로서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에 맞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에 대해서 합법적인 교황으로서의 권위를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ref>[다음백과] 교황 우르바노 2세</ref> 북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공의회를 개최하는등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펼치면서 대립교황을 고립시켰다.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를 통한 십자군 원정 호소가 성공하자 그 여세를 몰아 1098년 대립교황을 축출하고 로마입성에 성공했다. 재위기간 중 그레고리오 개혁을 갱신했으며 교회의 통치권과 추기경의 영향력 확대, 제국의 왕실과 유사한 교황청 조직을 정비하여 교회의 중앙집권화의 기초를 닦았다.<ref>존 노먼 데이비슨 켈리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1월 초판 p251......1089년의 칙서에서 로마 교황청(Curia Romana)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했다.</ref>
 
=== 하인리히 5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