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쇼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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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농민의 광독 반대운동이 격화했고 도쿄로 진정서가 밀려들었다. 당시 이 운동에는 딱히 이름이 있지 않았고 농민들은 押出し라고 불렀다. 다나카는 광독에 관해 국회에서 질문을 하고 도쿄에서 연설을 해나갔다. 농상무성과 아시오 구리광산측은 이의 방지공사를 약속했으나,<ref>{{괄호 없는 하버드 인용|足尾銅山古河鉱業所|1897}}に、同年5月27日に政府が事業主へ発出した、鉱業条例第59条の規定に基づく予防工事命令が記載されている。</ref> 설치된 탈황장치들의 효과는 거의 없었다.
 
1900년 농민들이 다시 도쿄로 진정하러 나가던 도중 [[메이와정 (군마현)]] 川俣에서 경찰과 충돌했고 유혈사건으로 번지며 농민 다수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 이틀 뒤와 나흘 뒤 다나카는 국회에서 이에 대해 질의했다. 이것은 망해가는 줄도 모르는 망국의 일에 관한 대정부 질문 「亡に至るを知らざれば之れ即ち亡の儀につき質問라는이라는 연설로 헌정사에 남았다.<ref>[https://dl.ndl.go.jp/info:ndljp/pid/784145/183 『第14回帝国議会衆議院記事摘要』(衆議院事務局、1900年11月)pp.329-330]</ref> 연설 도중 자신이 소속된 헌정본당憲政本党에서 탈당했다. 당시 총리이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이 즈음 川俣事件의 공판을 지켜보던 다나카가 도중 하품을 했는데 이것이 관리모욕죄로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川俣事件 관련자는 1902년 결국 전원 석방되었다.
 
[[파일:Tanaka_Shōzō_in_1901.jpg|오른쪽|섬네일|319x319픽셀|직소하던 시기의 다나카 쇼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