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도 가즈토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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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헌파(護憲派)로써의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으며, 일본의 전쟁 포기를 명시한 [[일본 헌법 9조]](일명 '평화헌법)에 대하여 「헌법 9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키워야 한다」(憲法9条を守るのではなく育てる)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당시 문예춘추사 사내에서는 쇼와사와 태평양전쟁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드물어서, 한도를 두고 「너는 한도(半藤)가 아니라 반동(反動)이다」(お前は『半藤』ではなく『反動』だ)<ref group="주석">일본어로 한도(半藤)와 반동(反動)은 서로 발음이 비슷하다.</ref>라는 소리도 있었다고 한다.<ref name="hando6"></ref> 자신은 그 말을 「역사에 역행한다」(歴史に逆行する), 「앞뒤 꽉 막힌 반근대주의자」(分からず屋の反近代主義者)라는 의미의 비판으로 인식하였으며, 자신이 일본의 태평양 전쟁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한 사람으로 보였다고 말하고 있다.<ref name="hando14">半藤 2017, pp. 131 - 132.</ref>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와는 한도가 『문예춘추』의 편집자 시대 때부터 친분이 깊었으며, 시바 료타로가 사망한 뒤 관련 논고 ・ 저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도는 시바가 쓰려고 했으나 쓰지 못했던 [[노몬한 전투]]를 다룬 『노몬한의 여름』(ノモンハンの夏)을 집필하였다. 역시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 하타 아사히코(秦郁彦)나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와의 공저도 많았다.
 
일본의 근대사의 역사관에 있어서 한도는 「40년 사관」(40年史観)이라는 것을 제창하였다.[14] <ref name="hando14"></ref> 이 주장은 메이지(明治) 이후의 일본은 40년을 주기로 흥망을 거듭하였으며, 메이지 신정부 수립으로부터 40년 뒤에 [[러일전쟁]]으로 군사대국화되었고, 그 40년 뒤인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대패하고 나아가 40년 뒤에는 버블 경제로 일본의 경제가 정점을 향하였으나 버블이 붕괴 후 40년 후에는 다시 몰락할 것이라는 예측이다.<ref name="hando15">半藤 2017, pp. 147-165.</ref> 그러한 이유로써 전쟁의 비참함을 겪은 해당 세대가 교체되기까지는 40년이 걸린다는 것을 들고 있다.<ref name="hando15"></ref>
 
《문예춘추》 비주얼판 「B급 미식가」(B級グルメ) 시리즈에서도 기사를 집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