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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국]]<ref group="주석">지금의 일본 미에현</ref> 출신으로 어려서 출가하였으며 어머니의 일족의 항쟁<ref group="주석">시모쓰키 소동(霜月騒動)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ref>으로 [[가이국]]<ref group="주석">지금의 일본 야마나시현이다.</ref>으로 이주하였다. [[1283년]]에 가이의 이치카와 장원(市河荘) 안에 있는 천태종(天台宗) 사찰인 헤이엔지(平塩寺)<ref group="주석">지금의 일본 야마나시 현 니시하치시로 군(西八代郡) 이치카와미코 정(市川三郷町)에 있었던 천태종 사찰로, 나라 시대인 [[덴표쇼호]](天平勝宝) 7년([[755년]]) 교기(行基)에 의해 개산(開山)되고 직변(直弁)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고 전하며, 고대 가이 국의 천태종의 거점인 동시에 헤이안 시대 이후 현지를 거점으로 토착한 가이 겐지(甲斐源氏)의 세력기반 지역 안에 위치해 있어 가이 겐지의 성장과 함께 발전하였다. 동서 탑원(塔院)에 각기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본존으로써 두고 있었다고 전하며, 덴쇼(天正) 10년([[1582년]]) 3월 오다 노부나가의 가이 침공 때에 소실, 폐찰되었다.</ref>에 입문하여 구아(空阿)를 스승으로 모시고 진언종(真言宗)과 천태종 등의 학문을 배웠다. [[1292년]]에 나라의 동대사(東大寺)에서 수계를 받고 교토 겐린지(建仁寺)의 무인 엔판(無隠円範)에게서 선종을 배웠다. 이후 가마쿠라로 와서 엔가쿠지(円覚寺)의 도케이 도쿠고(桃渓徳悟), 1299년에는 겐초지(建長寺)의 잇산 이치네이(一山一寧) 아래서 수좌(首座)를 맡기도 하였으나 법을 전수받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고, [[1303년]]에 가마쿠라 만슈지(万寿寺)의 고호 겐니치(高峰顕日)에게서 선종을 배우고 [[1305년]]에는 조치지(浄智寺)에서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인 [[가겐]] 3년([[1305년]])에는 가이의 마키 장원(牧の荘)의 조코지(浄居寺)를 세웠다. [[오초]](応長) 원년([[1311년]]) 봄, 인가와 떨어져 있는 산중을 찾아 류잔안(龍山庵, 훗날의 덴류 산 세이운지天龍山栖雲寺)을 짓고 일시 은거하였다. 서쪽을 유람하여 [[쇼와 (가마쿠라 시대)|쇼와]](正和) 3년([[1313년]]) [[미노 국]](美濃国)에 고케이안(古谿庵), 이듬해에는 간노도(観音堂, 고케이잔 에이호지虎渓山永保寺)를 그 땅에 열었다.<ref group="주석">본 사찰의 유래는 무소 소세키로 되어 있지만, 개산(開山)은 소세키의 동문인 겐노 혼겐(元翁本元)으로 되어 있다. 에이호지의 가이산도(開山堂)에는 겐노 혼겐과 함께 무소 소세키의 정상(頂相, 선승의 초상화)가 안치되어 있다.</ref> [[겐토쿠]] 2년([[1330년]])에는 가이 슈고(甲斐守護)를 맡고 있던 닛카이도 사다후지(二階堂貞藤, 도온道蘊)의 초청으로 마키 장원 안에 에린지(恵林寺)를 짓고 가마쿠라 중기의 도래(渡来) 선승인 난케이[[란케이 도류]](蘭渓道隆) 이래 가이 지역에서의 교화에 힘썼다. 또한 도사국 규코안(吸江庵)、[[사가미 국]](相模国) 하쿠센안(泊船庵), [[가즈사국]] 다이코안(退耕庵) 등 각지 사찰과 암자에 머물렀다.
 
[[쇼추]](正中) 2년([[1325년]])에 [[고다이고 천황]]의 요망으로 상경하여<ref group="주석">지바 현(千葉県)의 다이코지(太高寺) 전승에 따르면 겐코 3년([[1323년]])부터 2년 반 동안, 소세키는 현지의 「金毛窟」이라 불리는 동굴에서 은거하며 좌선수행을 행하였다고 한다. 고다이고 천황이 이를 듣고 소세키를 초빙하려 하였으나 소세키는 이를 고사하였고, 천황은 싯켄 호조 다카토키(권력자이자 소세키와는 모계 쪽으로 혈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를 통해 교토로 올 것을 재촉하였기 때문에 동문인 겐노 혼겐과 함께 교토로 상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상경할 때 가이 국을 경유하는 나카센도(中仙道)를 이용하였다고 한다.</ref> 칙원(勅願)으로 세워진 선종 사찰인 난젠지(南禅寺)에 주지로 머물렀다. 이듬해인 [[1326년]] 주지직을 사임하고 앞서 가마쿠라에 자신이 열었던 즈이센지(瑞泉寺)로 돌아가 헨카이이치란테이(徧界一覧亭)을 세웠다.<ref name="오노노 겐키치">小野健吉『日本庭園:空間の美の歴史』岩波書店〈岩波新書〉2009年、ISBN 978-4-00-431177-5 pp.111-121.</ref>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의 초빙으로 이세 국에 센오지(善応寺)를 지은 뒤 가마쿠라로 돌아와서 엔가쿠지에 머물렀다. 다카토키나 호조 사다아키(北条貞顕)로부터의 신앙도 두터웠다. [[1330년]]에는 가이에 에린지를 열고 다시금 즈이센지로 돌아왔는데, [[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겐무 신정]](建武新政)이 시작되어 고다이고 천황의 초청으로 린젠지(臨川寺)를 열었다. 이때 칙사(勅使)를 맡았던 인물이 바로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로, 이후 다카우지도 소세키를 스승으로 모셨다.<ref name="오노노 겐키치"/> 이듬해에는 다시금 난젠지의 주지를 맡았으며, [[1335년]]에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 「국사」(国師)의 호칭을 받아 무소 국사(夢窓国師)라 불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