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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르네상스 (동음이의)}}
[[파일:Château de Blois 05.jpg|섬네일|373x373px|[[블루아 성]]의 [[프랑수아 1세 (프랑스)|프랑수아 1세]] 날개관 (1514-1527)]]
[[파일:Écouen (95), château d'Écouen, façade est 3.jpg|섬네일|329x329px|[[국립 르네상스 박물관|르네상스 박물관]] (1532-1567, [[에쿠앙 성]])]]
[[파일:Chateau de Chenonceau.jpg|섬네일|331x331px|[[슈농소 성]] (1515-1522)]]
[[파일:Chateau-Villandry-JardinsEtChateau.jpg|섬네일|330x330px|[[빌랑드리 성]]의 복원된 [[파르테르]](1536)]]
[[파일:Hôtel de Pierre 4.JPG|섬네일|330x330px|[[툴루즈]]의 [[오텔 드 바지]] 정면 (1610)]]
'''프랑스 르네상스'''는 [[15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프랑스]]에서 일어난 [[문화 운동|문화]]・[[예술 운동]]이다. [[르네상스]]는 [[근세]]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후로 타 유럽 국가에 전파되며 [[프랑스]]에서도 나타났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르네상스의 특징으로는 삶에 대한 갈구, [[인간]]에 대한 [[신뢰|믿음]], [[지식]]에 대한 갈망, [[자유의지]]의 [[정신]] 등이 있다. 프랑스 르세상스는 [[중세]]의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형태의 [[삶]]과 [[문명]]을 추구했다. 더불어, [[인쇄술]]를 통한 [[정보]]의 전파 가능성과 대서양 저편의 [[신대륙|신세계]] 발견은 당대 인간의 [[세계관]]을 깊이 변화시켰다.<ref name="Michelet" />
 
프랑스 르네상스는 [[프랑수아 1세 (프랑스)|프랑수아 1세]]와 [[앙리 2세 (프랑스)|앙리 2세]]로 상징되는 왕들에게 고용된 화가와 조각가의 시대였다. 이 시기는 [[클로 뤼세 성|클로 뤼세]]에서 생을 끝마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시대이기도 하다만, [[퐁텐블로파]]가 창설되고 [[16세기]] [[메디치 가문]]이 파리에 도착한 시대이기도 하다.<ref>{{깨진 링크|url=http://lionel.mesnard.free.fr/le%20site/4-1-paris-renaissance-1.html|texte=}}.</ref>
 
[[프랑스]] 르네상스는 네 시기로 나뉜다. 첫번째 시기는 [[루이 12세 양식]](약 1495-1530)으로, [[고딕 건축|고딕 양식]]과 [[르네상스]]의 전환기를 형성한다. 허나 이 첫번째 양식은 1515년경,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도입이 매우 빨랐던 [[루아르 계곡]]에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탈리아]]에서처럼, 프랑스 르네상스 제 1기, 이후의 제2기와 그 둘을 종결낸 [[매너리즘]]이라는 세 시기는 [[17세기]] 초까지의 시기를 삼분(三分)한다.<ref name="Ducher" />
 
==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 ==
[[파일:Château de Chambord - 19-08-2015 - Arnaud Scherer.jpg|섬네일|왼쪽|273x273px|[[샹보르 성]] (1519-1559)]]
프랑스에서는 오랫동안 [[문학]]의 [[플루타르코스]], [[회화]]의 [[장 푸케]], 또는 [[마르세유]]에서 작업한 [[건축]] 분야의 [[프란체스코 로라나]] 등의 [[이탈리아풍]]이 있었지만은<ref name="BabelonChateaux">{{서적 인용|언어=fr|저자1=Jean-Pierre Babelon|제목=Châteaux de France au siècle de la Renaissance|passage=|장소=Paris|출판사=Flammarion / Picard|연도=1989/1991|쪽수=840|format livre=32 cm|isbn=978-2080120625|lire en ligne=}}.</ref>, 본격적인 이탈리아풍은 [[이탈리아]]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예술 부흥]]과 [[프랑스]]와의 접점을 만든 [[샤를 8세]]와 [[루이 12세]]의 [[이탈리아 전쟁]]에서 시작되었다.
 
[[1495년]] [[앙부아즈 성|앙부아즈]]에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처음으로 도착하고나서 고딕 예술은 곧바로 소멸하지는 않았으나<ref name="Ducher">{{서적 인용|언어=fr|저자1=Robert Ducher|photographe=Pierre Devinoy|제목=Caractéristiques des styles|passage=80|장소=Paris|출판사=Flammarion|연도=1963|쪽수=410|isbn=9782080113597|lire en ligne=}}.</ref>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6세기 초 몇번의 성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 12세 양식]]의 과도적인 발달은<ref name="Ducher" />{{,}}<ref name="Palustre">{{서적 인용|언어=fr|저자1=Léon Palustre|directeur1=Jules Comte|제목=L'architecture de la Renaissance|passage=|장소=Paris, 7 rue Saint-Benoît|출판사=ancienne maison Quentin, Libraires-Imprimerie réunies|연도=1892|pages totales=|isbn=9781508701187|lire en ligne=}}</ref> 점차 [[초기 르네상스]]를 불러왔다.<ref name="a">[[Institut national d'histoire de l'art|INHA]], [http://www.inha.fr/spip.php?article1480 Le Gothique de la Renaissance].</ref> [[1515년]] 무렵을 계기로 [[고딕]] 양식은 이탈리아적 기호 아래서 서서히 빛을 바래갔다.<ref name="ErlandeARAG">[[Alain Erlande-Brandenburg]], ''Architecture romane, Architecture gothique'', Jean-Paul Gisserot, 2002, {{ISBN|978-2-87747-682-9}}</ref>
 
이처럼 고딕 양식은 옅게나마 이어져 왔으나, [[1526년]] [[프랑수아 1세 (프랑스)|프랑수아 1세]]의 [[퐁텐블로파]] 창설을 결정적인 계기로 고딕 양식은 종지부를 찍었다. 퐁텐블로파는 전보다 수가 많아진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새 흐름으로, 이들은 건축에서 실내 장식과 기발한 가구 배치로 혁신을 불러일으키며 프랑스 예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루이 12세 양식]] 시대와 [[초기 르네상스]]기의 [[건축가]]들은 풍부한 정열을 가진 전통주의 석공 대가들로, 1530년대부터 교양있는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했다.
 
[[1530년]]은 이탈리아에 영향 받아 1495년부터 [[중세]] 양식을 재탄생시킨<ref name="BabelonChateaux"/> [[루이 12세 양식]]이 끝났다고 여겨지는 해이자<ref name="Ducher" />{{,}}<ref name="Palustre" />, [[프랑스]]에서 [[1515년]]부터 서서히 등장하던 [[르네상스]]가 확실히 받아들여진<ref name="Ducher" />{{,}}<ref name="Palustre" /> 결정적인 전환점으로서의 해다.
 
프랑스 르네상스의 시작은 이렇게 확실한 반면, 이 시기의 끝을 언제로 삼을지에 관하여는 아직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위그노 전쟁|종교 전쟁]]을 종결낸 [[1598년]]의 [[낭트 칙령]]이 르네상스의 끝을 맺었다고 보통 여겨지나, 일부 사학자들은 [[바시 학살]]로 [[위그노 전쟁|제1차 프랑스 종교전쟁]]이 시작된 [[1562년]]을 기준으로 삼고있다. [[앙리 4세]]가 [[시역|암살]]된 [[1610년]]을 기준으로 삼는 이들도 있다.
 
일반적인 관점으로 볼 때, 프랑스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에서 강력한 국가가 출현할 가능성을 뿌리뽑은 [[1477년]] [[낭시 전투]] 이후 유럽에 평화가 찾아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평화의 시기는 예술 창조에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기였으며, [[샤를 3세 드 로렌 공작]] 치세 아래 황금기를 맞이한 로렌([[낭시 공작 저택]])에서, [[로렌 대학의 역사|퐁타무송 대학]] 설립과 중세 도시 옆에 신도시를 지은 특이한 도시계획이었던 [[낭시]] 신도시 건설 등을 통하여 초기 르네상스가 등장했다. [[로렌 공국]]에서 일어난 르네상스는 [[30년 전쟁]]이 벌어지자 종말을 맞는다.(1618)<ref name="révélé">[http://www.renaissancenancy2013.com/page,evenement,id,737006596 La ville révélée - Autour de la Ville Neuve de Charles III] sur www.renaissancenancy2013.</ref>
 
== 왕권 강화 : 제왕주권 ==
[[파일:François Ier Louvre.jpg|오른쪽|섬네일|226x226px|[[프랑수아 1세 (프랑스)|프랑수아 1세]], [[장 클루에]] 작. [[1530년]].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에서 르네상스는 봉신들에 대항하여 왕권을 올린 중앙 집권적인 [[루이 11세]]의 치세 이후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이 시기는 [[종주권|종주]](宗主) 국가에서 [[주권|제왕주권]] 국가로 점차 이행하는 과도기였다.<ref name="Muchembled">{{서적 인용|언어=fr|저자1=Robert Muchembled|저자2=Michel Cassan|제목=Histoire moderne. Les XVI et XVII siècle|권=1|총서=Grand Amphi|passage=|장소=Paris|출판사=Bréal|연도=28 avril 2000|쪽수=416|isbn=978-2853947305|lire en ligne=}}</ref>
 
거기다 군사 기술 발전은 이 변화에 있어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성 (건축)|성]]을 통한 방어술은, 긴 사정거리의 신무기 [[사석포]](bombarde)로 점차 비효율적이 되었고, 그런고로 새로운 방어 체계를 구성해야만 했다.
 
[[백년 전쟁]] (특히 [[1415년]]의 [[아쟁쿠르 전투]]) 동안 수차례 겪은 프랑스 군의 비효율성은 이러한 변화를 시사했다.<ref name="Ducher" />
 
[[중세]] 사회에서 자신들의 "특권"이 적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지역 주민들에 대한 [[책임]]을 지던 것의 보상이었던 [[봉건]] [[영주]]들은 더이상 이러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이후로 영주들은 (현대적인 의미의) 지역보다 국가에 대한 군사적 책임을 지기 시작하며 [[특권 (중세 법)|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ref name="Muchembled" />
 
[[종주권|종주]] 계급은 이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다. 그런 고로 통합된 국가의 [[안전]]을 책임지게 된 국왕은 그들과의 상호적 책임에 대한 재정의를 할 필요가 있었다. 제왕주권설의 토대를 마련한 주요 이론가로는 [[장 보댕]]이 있다.<ref name="Muchembled" />
 
[[프랑수아 1세 (프랑스)|프랑수아 1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봉건제]]하에서 왕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봉신들의 [[종주권자]]에 불과했다) 첫 프랑스 국왕이라 할 수 있다. 엄격한 기준에서 본다면, [[절대주의]]는 [[낭트 칙령]] ([[1598년]])을 통해 왕권을 키운 [[앙리 4세]]와, 특히 ([[리슐리외]]의 강력한 영향 하의) [[루이 13세]], 그리고 [[자크베니뉴 보쉬에|보쉬에]]의 지지를 받은 [[루이 14세]]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ref name="Michelet" />
 
== 프랑스 르네상스의 네 시기 (1495 - 17세기 초) ==
[[프랑스]] 르네상스는 네 시기로 나뉜다. 첫번째 시기는 [[루이 12세 양식]](약 1495-1530)으로, [[고딕 건축|고딕 양식]]과 [[르네상스]]의 전환기를 형성한다. 허나 이 첫번째 양식은 1515년경,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도입이 매우 빨랐던 [[루아르 계곡]]에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탈리아]]에서처럼, 프랑스 르네상스 제 1기, 이후의 제2기와 그 둘을 종결낸 [[매너리즘]]이라는 세 시기는 [[17세기]] 초까지의 시기를 삼분(三分)한다.<ref name="Ducher" />
 
각각의 발전 단계를 거치며 프랑스 르네상스 예술은 이탈리아를 본보기로, [[플랑드르]] 예술가와 특히 프랑스 예술가들이 한데 만나 어울어진 독창적인 예술성을 간직하였다. 반면 1495년부터 1610년까지 본보기였던 이탈리아의 예술은 변화를 거듭하며 프랑스에서도 [[콰트로첸토]] 후기의 예술에서, [[전성기 르네상스]]로, 이후 [[매너리즘]]으로, 선호하는 예술 사조는 변모를 거듭했다.<ref name="Ducher" />. 이런 거듭된 교류는 풍부하고, 뒤죽박죽이며 가끔은 구분하기 어려운 예술품들을 만들어냈다. 이것들을 평가하고자 할 때에는 두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진정한 새로운 로마"였던 [[퐁텐블로 성]] 주변에서, [[프랑수아 1세 (프랑스)|프랑수아 1세]]의 의욕으로 탄생한, 유럽에서 유일하게 이탈리아의 위대한 예술 중심지들과 비교해볼만한 [[퐁텐블로파]]라고도 불리던 예술의 심장이 발흥하는 와중, 16세기 중반 대작들이 탄생하면서 [[고전주의|근대]] 프랑스 예술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생겨난 새로운 국면은 미래를 내려다보았다. [[17세기]] 중반 "국가" 양식(樣式)의 확립과 [[베르사유 궁|베르사유]]에서의 역할을 알린 것이다.
 
=== 루이 12세 양식 : 고딕 예술에서 초기 르네상스로의 전환기 (1495 - 1525/1530) ===
{{본문|루이 12세 양식}}
<gallery mode="packed">
Chateau de Blois aile LouisXII.JPG|[[블루아 성]]의 루이 12세 날개관 (1498-1503)
Gisors (27), collégiale St-Gervais-et-St-Protais, collatéral sud, 1er pilier intermédiaire 1.jpg|Le Pilier Saint Jacques ([[Collégiale Saint-Gervais-Saint-Protais de Gisors|Gisors]], début {{s-|XVI}}).
Mise au tombeau du Christ, Solesmes (moulage).jpg|''Mise au tombeau du Christ'', [[abbaye de Solesmes]].
Chateaudun - Chateau cour 03.jpg|Escalier de l'aile Longueville du [[château de Châteaudun]] (1491-1518).
Château de Fontaine-Henry 3.JPG|Partie centrale du [[château de Fontaine-Henry]] (vers 1500).
Fresque Renaissance du Château de Gaillon au Château piémontais de Gaglianico - Italie -.jpg|Château de Gaillon (1506-1509).
Château de Maintenon 2008.jpg|[[맹트농 성]] (1505).
Chaumont escalier.JPG|L'escalier, [[château de Chaumont-sur-Loire|Chaumont-sur-Loire]] (1498-1510).
</gallery>
루이 12세 양식(1495년 - 1525/1530년)<ref name="Ducher" />{{,}}<ref name="Palustre" />은 현란했던 [[고딕 예술]]과 [[르네상스]] 사이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던 전환기의 양식이다.
 
루이 12세 양식은 장식 예술이 [[첨두식 아치]]와 고딕 자연주의에서 시작하여 반원형 아치와 [[초기 르네상스]]의 전형적 고풍스런 양식의 주제들이 섞인 부드럽고 둥근 형태로 넘어가는 시대이다. 여전히 [[블루아 성]]에는 많은 부분이 [[고딕 예술|고딕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생드니 왕실 무덤|생드니의 루이 12세 무덤]]에서는 더이상 고딕 양식을 찾아볼 수 없다.<ref name="Palustre" />.
 
[[파일:Escalier d'honneur du château de Meillant (Cher).JPG|왼쪽|섬네일|322x322px|Corniche [[Renaissance]] à [[ove]]s sur le logis et ''tempietto'' surmontant la ''Tour du Lion'' ([[Château de Meillant|Meillant]], vers 1510).]]
 
1495년부터, 이탈리아 예술가 집단이 [[앙부아즈]]에 자리를 잡으며 프랑스의 석공 장인들과 함께 공동 작업을 했다. 보통 이 해를 새 예술 운동의 시작점으로 삼는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건축 구조는 프랑스적으로 남았고 오직 장식만이 이탈리아적으로 변화했다.<ref name="BabelonChateaux" /> 그러나 이 새 양식을 이탈리아만의 영향으로 보는 것은 유감스러울 것이다. 프랑스 건축 작품과 에스파냐의 [[플라테레스크 양식]]과의 교류 역시 존재하였고<ref name="Babelon2">[[Plateresque|La colonne torse en Périgord à la Renaissance. Entre tradition ornementale et influence espagnole, Mélanie Lebeaux, LOCVS AMŒNVS, 2009-2010.]]</ref> 북유럽, 특히 [[안트베르프]]의 영향은 회화와 채색유리의 [[장식 예술]]에 있어 주목할만 하다.<ref name="Durand">{{서적 인용| langue= fr | 저자= Jannic Durand | 제목= L'art du Moyen-Âge | passage= | lieu= Paris | éditeur= Bordas | année= 1989 | pages totales= 111 | isbn= 9782040185077 | lire en ligne= }}.</ref>
 
[[루이 12세 양식]]이라는 용어의 범위는 특히 [[루아르 계곡]]을 제외한 타 [[지방]]에서 상당히 다양하게 쓰인다. 루이 12세 양식이란 [[루이 12세]](1498-1515)의 17년간의 치세만이 아니라, [[샤를 8세]] 치세 말과 [[프랑수아 1세 (프랑스)|프랑수아 1세]] 치세 초를 포함한 시대로, 1495년에 시작하여 1525/1530년에 끝난 예술 운동을 지칭하는 표현이다.<ref name="Palustre" /> [[프랑수아 1세 (프랑스)|프랑수아 1세]]의 [[퐁텐블로파]] 창설로 양식에 있어 진정한 전환점이 된 1530년대는 보통 르네상스 양식을 완벽히 받아들였다고 여겨지는 시대이다.<ref name="BabelonChateaux" />{{,}}<ref name="Palustre" />
[[샤를 8세]] 시기 말 장식 작품에서, 우리는 [[첨두식 아치]]에서 멀어져 [[반원형]]에 가까워지는 주목할만한 흐름을 볼 수 있다. [[앙부아즈 성]]의 샤를 8세 날개관 아래쪽을 보면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자]]를 위하여 [[브라만테]]가 이룩한 업적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ref name="BabelonChateaux" /> 건물의 윗부분이 [[고딕 예술|고딕 양식]]인 반면, “경비병의 산책로”의 정면은 반원형 아치들이 이어져, 장식없는 기둥pilastre들이 주기적으로 놓여있는travée 것이 인상깊은 [[외랑]]loggia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장식들의 형태는 고딕 시대의 특징인 섬세함을 더이상 담고있지 않으나, 정면의 흐름새는 기둥들간의 거리travée와 뼈대에서 출입구의 통로를 중첩시킨 균형잡힌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르네상스 장식의 중요한 요소들은 벌써 등장하기 시작했다.
 
Cette évolution est particulièrement perceptible au [[château de Meillant]] dont les travaux d'embellissement voulus par [[Charles II d'Amboise]] débutent dès 1481 : si la structure est restée pleinement [[Moyen Âge|médiévale]], la superposition des fenêtres en travées reliées entre-elles par un cordon à pinacles, annonce le quadrillage des façades sous la [[Première Renaissance]]. De même, on remarque l'[[entablement]] à [[ove]]s classique surmonté d'une [[balustrade]] [[Art gothique|gothique]] et le traitement en [[Tempietto (Bramante)|''Tempietto'']] de la partie haute de l'[[Escalier à vis|escalier hélicoïdal]] avec sa [[Arcature|série d'arcatures]] en [[Cintre (architecture)|plein cintre]] munies de coquilles<ref name="Montclos">{{Ouvrage|langue= fr | auteur1= | directeur3= Jean-Marie Pérouse de Montclos | titre= Guide du patrimoine Centre Val de Loire | passage= 436-439 | lieu= Paris | éditeur= Hachette | année= 1992 | pages totales= | isbn= 2-01-018538-2 | lire en ligne= }}.</ref>.
 
Si à la fin du règne de [[Charles VIII (roi de France)|Charles VIII]], l'apport d'ornements italiens viennent enrichir le répertoire flamboyant, il y a désormais sous [[Louis XII]] toute une école française qui s'ouvre à l'[[italie]] avec de nouvelles propositions, établissant ainsi les principes d'un style de transition<ref name="Palustre" />.
 
[[파일:Loire Eure Chartres3 tango7174.jpg|오른쪽|섬네일|310x310px|Éléments italiens dans l'encadrement et le soubassement de la claire-voie (1513-1529, [[clôture de chœur de la cathédrale Notre-Dame de Chartres]]).]]
 
En sculpture l'apport systématique d'éléments italiens voire la réinterprétation « [[Art gothique|gothique]] » de réalisations de la [[renaissance italienne]] est manifeste au [[Abbaye Saint-Pierre de Solesmes|Saint sépulcre de Solesmes]] où la structure gothique reprend la forme d'un arc de triomphe romain flanqué de [[pilastre]]s à [[candélabre]]s lombards. Les feuillages gothiques désormais plus déchiquetés et alanguis comme à l'[[hôtel de Cluny]] de [[Paris]], se mêlent à des [[Médaillon (architecture)|tondi]] avec portraits d'[[Liste des empereurs romains|empereurs romains]] au [[château de Gaillon]]<ref name="BabelonChateaux" />.
 
En architecture, l'utilisation de la « brique et pierre », pourtant présente sur les édifices dès le {{s-|XIV}}, tend à se généraliser ([[château d'Ainay-le-Vieil]], [[Château de Blois|Aile Louis {{XII}} du château de Blois]], l'[[Hôtel d'Alluye|hôtel d’Alluye de Blois]]). Les hauts toits à la française avec tourelles d'angles et les façades à [[Escalier à vis|escalier hélicoïdal]] font perdurer la tradition mais la superposition systématique des baies, le décrochements des lucarnes et l'apparition de loggias influencées de la [[villa Poggio Reale]] et du ''[[Castel Nuovo]]'' de [[Naples]] sont le manifeste d'un nouvel [[Arts décoratifs|art décoratif]] où la structure reste pourtant profondément [[Art gothique|gothique]]. La propagation du vocabulaire ornemental venu de [[Pavie]] et de [[Milan]] a dès lors un rôle majeur tout en étant ressentie comme l'arrivée d'une certaine modernité<ref name="Eberlein" />.
 
Dans cet art en pleine mutation, les jardins deviennent plus important que l'[[architecture]] : L'arrivée à [[Amboise]] d'artistes italiens dont [[Pacello da Mercogliano]] fut à l'origine sous [[Charles VIII (roi de France)|Charles VIII]] de la création des tout premiers jardins de la Renaissance française grâce à de nouvelles [[Paysagisme|créations paysagistes]], l'installation d'une [[ménagerie]] et des travaux d'[[Acclimatation végétale au froid|acclimatation agronomique]] conduites à partir de 1496 aux « Jardins du Roy » alors situés au sein du [[Château-Gaillard (Amboise)|domaine royal de Château-Gaillard]]<ref name=wenzler12>{{Ouvrage | id=wenzler | langue= fr | auteur1= Claude Wenzler | photographe=Hervé Champollion | titre= Architecture du jardin | passage= 12 | lieu= Paris | éditeur= Ouest France | collection= Architecture | année= février 2003 | pages totales= 32 | format livre= {{Tunité|23|16.5|0.3|cm}} | isbn= 9782737331770 | lire en ligne= }}</ref>. En 1499, [[Louis XII]] confia la réalisation des jardins du [[château de Blois]] à la même équipe qui fut engagée par la suite par [[Georges d'Amboise]] pour réaliser des parterres sur différents niveaux sous son [[château de Gaillon]]<ref name="wenzler14">{{Harvsp|id=wenzler|Wenzler|Année|p=14}}.</ref>.
 
En conclusion, le [[style Louis XII]] montre que l'on veut désormais autant étonner les français que les italiens : C'est à partir de la fantaisie avec laquelle sont incorporées les [[Renaissance|nouveautés italiennes]] dans les structures encore toutes [[Moyen Âge|médiévales]] françaises que naîtra vers 1515/1520 la [[Première Renaissance]]<ref name="Eberlein">{{Ouvrage | langue= en | auteur1= Harold Donaldson Eberlein | auteur2= abbot McClure | auteur3= Edward Stratton Holloway | titre= The Practical Book of Interior Decoration | passage= | lieu= Philadelphie et Londres | éditeur= J.B Lippincott Company | année= 1919 |pages totales= 424 | isbn= 9781372345036 | lire en ligne= }}.</ref>.
 
=== 르네상스 제1기 (1515 - 1530/1540) ===
<gallery mode="packed">
Chambord Castle Northwest facade.jpg|[[샹보르 성]] (1519-1559).
Chateau-Azay-le -Rideau-CourtInterieure.jpg|[[Château d'Azay-le-Rideau]] (1518-1523).
Château de Blois 05.jpg|L'ail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du [[château de Blois]] (1514-1527).
Château de Blois - Façade des Loges.jpg|La façade des loges du [[château de Blois]] (1514-1527).
Chateau de Chenonceau..jpg|[[Château de Chenonceau]] (1515-1522).
Cour ovale.jpg|Cour ovale du [[château de Fontainebleau]] (1527).
Cdemadrid1722.jpg|[[Château de Madrid]] (1528-1540).
</gallery>
[[파일:Saint-Maurille 02.jpg|섬네일|왼쪽|277x277px|Portail de l'[[église Saint-Maurille de Vouziers]] ([[1517]]-[[1548]]).]]
Tout comme la période précédente, la manifestation la plus évidente de la Première Renaissance en [[France]] s'exprime par l'édification de châteaux résidentiels non seulement dans le [[Val de Loire]] et l'[[Île-de-France]] mais également dans certaines [[province]]s plus au sud comme le [[Berry]], le [[Quercy]] et [[Périgord|le Périgord]] (châteaux [[Château d'Assier|d'Assier]] et de [[Château de Montal (Lot)|Montal]]) qui, après s'être remises des séquelles de la [[guerre de Cent Ans]], voient leurs grandes familles s'endetter sur plusieurs générations afin de moderniser les structures [[Moyen Âge|médiévales]] préexistantes<ref name="ErlandeARAG" />.
 
Pour autant c'est bien en [[Touraine]] que seront édifiés les plus grands châteaux de la Première Renaissance française.
 
Si à partir de la fin du {{s-|XV}}, le processus transitoire du [[Style Louis XII]], impose peu à peu les formes de la [[Première Renaissance]]<ref name="a" />, à partir des années [[1515]]/[[1520]], l'arrivée d'une nouvelle vague d'artistes italiens, plus nombreux qu'auparavant, va avoir une grande influence sur l'art français, en créant une véritable rupture : Les formes [[Art gothique|gothiques]] finissent par se diluer progressivement dans le decorum italien<ref name="Palustre" />. Cette évolution est particulièrement sensible au portail de l'[[Église Saint-Maurille de Vouziers]], où une ornementation classicisante vient masquer la structure encore [[Architecture gothique|gothique]]<ref name="ErlandeARAG" />.
 
[[파일:LaRocheF1.2.JPG|섬네일|오른쪽|Galeries inspirées de [[Bramante]] au [[château de La Rochefoucauld]] (à partir de 1519).]]
 
Contrairement à la période précédente, le principal protagoniste n'est plus l'entourage du roi mais bien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lui-même qui, se comportant en [[Humanisme|monarque humaniste]], devient l'un des acteurs primordial de cette évolution stylistique<ref name="Michelet" />. En s'imposant dans les arts, il se veut alors mécène et guide de son peuple et de la chrétienté, sans pour autant renier son rôle militaire<ref name="Michelet">Michelet, ''Renaissance et Réforme''</ref>.
 
C'est ainsi qu'il fait appel à des artistes italiens pour la construction de ses châteaux<ref name="Ducher" />. Ces [[Architecte|artisans]] lettrés auront alors une grande aura sur les [[Architecte|maîtres maçons]] français : L'architecte présumé de [[Château de Chambord|Chambord]], [[Boccador|Domenico Bernabei da Cortona]] aurait ainsi été surnommé « [[Boccador]] », bouche d'or en italien, pris ici dans le sens de « paroles d'or ».
 
Pour autant, durant toute la Première Renaissance française, le plan des édifices restera traditionnel et les éléments d'architecture resteront librement inspirés de l'art nouveau venu de [[Lombardie]]. Jamais, peut-être l'architecture française n'aura autant fait preuve de plus d'élégance, de légèreté et de fantaisie que durant cette période artistique. Il se dégage une saveur toute particulière des édifices du [[Val de Loire]] où les [[Architecte|maîtres-maçons]] français [[Tradition|traditionnalistes]] et plein de verve, n'acceptent que bien à regret la nouvelle [[architecture]] en faisant toujours concorder la structure avec la forme et allier aux silhouettes hardies et pittoresques du [[Moyen Âge]], la décoration de la [[Renaissance italienne]]<ref name="Ducher" />.
 
C'est ainsi que dans la lignée du [[style Louis XII]], on conserve durant toute la période les traditions nationales telles que les hautes [[Toit|toitures]] : Le [[château de Saint-Germain-en-Laye]] étant le seul à être couvert de [[Terrasse (architecture)|terrasses]]. Si les progrès de l'[[Artillerie médiévale|artillerie]] avait rendu inutile tout appareil défensif tels que les [[Tour (édifice)|tours]], les [[Mâchicoulis|machicoulis]], le [[Créneau|crénelage]] ou encore les [[Courtine|courtines]] des châteaux, on les conserve encore par tradition<ref name="Palustre" />. Pour autant, tous ces éléments de défense se voient vidés de leur substance pour être transformés en autant d'éléments décoratifs. C'est ainsi que dans bon nombre d'édifices, comme au [[château de Chenonceau]], [[Château de La Rochefoucauld|de La Rochefoucauld]], de [[Château de Villandry|Villandry]] ou comme ce fut le cas à [[Château d'Azay-le-Rideau|Azay-le-Rideau]] (remanié au {{s-|XIX}}), la permanence du [[donjon]] ne se justifie que par le symbole seigneurial qu'il représente ; sa fonction militaire étant désormais supplantée par celle du prestige et de l'apparat<ref name="BabelonChateaux" />.
 
[[파일:Saint-Germain-en-Laye.jpg|왼쪽|섬네일|271x271px|[[Terrasse (architecture)|Terrasses]] du [[château de Saint-Germain-en-Laye]] (vers 1539).]]
 
Dans cette mouvance, les échauguettes des châteaux du [[Moyen Âge]] deviennent à [[Château d'Azay-le-Rideau|Azay-le-Rideau]], de gracieuses tourelles d'angles en encorbellement tandis que les créneaux du chemin de ronde se développent en petites fenêtres, transformant cet espace, en une agréable galerie de circulation<ref name="Ducher" />. Caractéristique apparue avec le [[Style Louis XII]], les fenêtres des façades ont leur [[chambranle]] qui se raccorde d'étage en étage, formant une sorte de [[travée]] terminée en [[lucarne]] ouvragée. Ce quadrillage que l'on retrouve à [[Château de Blois|Blois]] ou à [[Château de Chambord|Chambord]], donne une sensation de régularité, souvent « fictive », aux élévations, tout en soulignant les horizontales et les verticales, alors que la multiplication des cheminées et des clochetons semblant former une couronne à l'édifice, est un dernier reflet de la féérie médiévale<ref name="Montclos" />.
 
Si l'architecture s'ouvre désormais largement sur l'extérieur, la richesse décorative reste réservée pour la cour, notamment pour le motif central de l'escalier. Obsession généralement étrangère à la [[Renaissance italienne]]<ref name="BabelonChateaux" />, l'escalier est considéré alors comme l'élément français autour duquel gravitera le château tout entier : La tour polygonale en hors d'œuvre, conservée dans l'ail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du [[château de Blois]], est remplacée peu à peu par un escalier rampe sur rampe<ref name="BabelonChateaux" />, qui bien plus qu'une innovation italienne, semble bien appartenir au répertoire de l'Ouest de la [[France]] depuis le {{XVe siècle}}<ref name="BabelonChateaux" />.
 
[[파일:Escalier Chambord.jpg|오른쪽|섬네일|271x271px|Escalier à double révolution du [[château de Chambord]] (1526-1537).]]
 
Si la façade des loges du [[château de Blois]] apporte une certaine modernité, par ses ouvertures en enfilade sur l'extérieur, inspirées de la [[Cortile del Belvedere|cour du Belvédère du Vatican]], l'utilisation du modèle romain de [[Bramante]] se voit modifié et soumis à la structure médiévale préexistante<ref name="BabelonChateaux" />. Inachevée, cette façade n'a pu recevoir un décor italianisant comparable à l'[[Château de Blois|aile François 1세]] sur cour. Elle n'en reste pas moins représentative des différentes recherches opérées au cours de la Première Renaissance : Par la substitution des profils pleins et nets aux arêtes aigües de la [[Moulure|mouluration]] [[Architecture gothique|gothique]], elle marque un progrès dans l'imitation des modèles [[Antiquité|antiques]]<ref name="Palustre" />.
 
Cette interprétation des réalisations de [[Bramante]], même si elle ne respecte en rien les [[Ordre architectural|ordres antiques]], se retrouve dans la superposition des [[Arcade (architecture)|arcades]] encadrées de [[pilastre]]s qui orne les cours intérieures du [[château de La Rochefoucauld]] puis de [[Château de Chambord|Chambord]]<ref name="BabelonChateaux" />.
 
[[파일:Fontainebleau Pavillon de la Porte Dorée.JPG|왼쪽|섬네일|345x345px|Le ''Pavillon de la Porte Dorée'',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1527-1528).]]
 
Première réalisation ''[[ex nihilo]]'', le [[château de Chambord]] est un rendez-vous de chasses et de fêtes de la cour, conçue comme un lieu théâtral peu habité<ref name="Michelet" />. La présence de [[Léonard de Vinci]] et de [[Boccador]], amène une réflexion sur le château à la française au contact de la [[Renaissance italienne]]. Alors que les tours du [[Moyen Âge]] n'avaient d'autre jours que les fentes des [[Meurtrière|archères]], une superposition de fenêtres à [[pilastre]]s vient ici largement éclairer l'édifice tandis que le couronnement crénelé disparaît pour la première fois<ref name="Ducher" />. Le décor exubérant s'attache alors surtout aux toitures hérissées de souches de cheminées, de [[lucarne]]s ou de [[Tour (édifice)|tourelles]], toutes garnies de [[losange]]s ou de disques d'[[Ardoise (élément de couverture)|ardoise]], de tabernacles et de [[Cul-de-lampe (architecture)|culs-de-lampe]] traités dans le goût de l'[[Italie]] du Nord, tout en évoquant les incrustations de marbre noir de la [[Chartreuse de Pavie]] où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fut prisonnier<ref>{{ouvrage|titre=Châteaux en Pays de Loire : architecture et pouvoir|passage=151|éditeur=Bibliothèque des arts|date=1988|isbn=|lire en ligne=|auteur=Michel Melot, Michel Saudan, Sylvia Saudan-Skira}}</ref>. Si le développement d'appartements symétriques à destination résidentielle est une nouveauté, l'organisation du plan reste cependant traditionnelle, rappelant ainsi le [[château de Vincennes]], avec un [[donjon]] central entouré d'une [[Muraille|enceinte]] où se trouve la cour et les [[Dépendance (architecture)|communs]]<ref name="BabelonChateaux" />. Le projet initial de 1519, se voit pourtant modifié dès 1526, afin de transférer l'appartement du roi dans une aile latérale : Le [[donjon]] centré étant rendu incompatible avec le nouveau [[Cour (palais)|rituel de cour]] nécessitant un appartement royal en enfilade. Comme à la [[Villa médicéenne de Poggio a Caiano]], chaque niveau a désormais ses appartements répartis autour d'un axe central incarné par l'[[:파일:Escalier Chambord.jpg|escalier à double révolution (image)]] pensé en collaboration avec [[Léonard de Vinci]]. Les travaux ralentissent pourtant : après la [[Bataille de Pavie (1525)|défaite de Pavi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se voit contraint de regagner [[Paris]].
 
À son retour de captivité, en [[1527]], si le mécénat de l'entourage royal reste important, le roi n'en reste pas moins le principal protagoniste des évolutions stylistiques de son pays, par les modifications qu'il apporte à toute une série de châteaux autour de la capitale ([[Château de Villers-Cotterêts|Villers-cotterêt]], [[Château de la Muette (Paris)|La Muette]]). Alors qu'en [[Île-de-France]] de nouvelles innovations se font jour, le [[Châteaux de la Loire|Val de Loire]] devient le conservatoire de la Première Renaissance.
 
Le [[château de Madrid]] aujourd'hui détruit, reflète cette évolution : Le Palacio de los Vargas de la [[Casa de Campo|Casa del Campo]], demeure d'un grand financier espagnol située en face de ce qui fut la prison d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à [[Madrid]], inspira la réalisation de ce palais sans douves dont le plan ramassé s'oppose à la tradition française. Réalisés comme une nouvelle résidence de fêtes, les appartements symétriques s'organisaient autour d'une salle de bal centrale, tandis que deux étages de loggias faisant le tour du bâtiment, présentaient un décor inédit de terre cuite émaillée réalisée par [[Famille Della Robbia|Della Robbia]]. L'élévation du château était marquée par les [[Pavillon (architecture)|pavillons]] hors d'œuvres, remplaçant ici les tours encore toutes médiévales de [[Château de Chambord|Chambord]], dont le rythme nouveau était obtenu par la séparation des combles. L'utilisation du plan géométrique et la présence des loggias, annonçant la [[Villa Farnèse]], sont un lointain reflet du [[villa Poggio Reale|Poggio Reale]] de [[Naples]] et de la [[Villa médicéenne de Poggio a Caiano]]<ref name="BabelonChateaux" />
 
[[파일:VillandryCastle.jpg|오른쪽|섬네일|Le [[château de Villandry]] (vers 1536) achève les recherches de la Première Renaissance et annonce [[Ancy-le-Franc]] et [[Château d'Écouen|Écouen]].|262x262px]]
 
C'est alors qu'un événement d'une importance capitale se produit au [[château de Fontainebleau]], devenu entre 1530 et 1540 résidence principale du souverain. Bien que l'on note un grand contraste entre la qualité moyenne de l'architecture et la splendeur du décor intérieur, les réalisations dirigées par ''Gilles le Breton'' marquent une évolution profonde marquant la fin de la période. Tandis que le [[donjon]] du {{s-|XII}} est préservé, la cour ovale correspondant à l'ancien [[Château fort|château médiéval]] se voit ornée par le [[Rosso Fiorentino|Rosso]] et par [[Sebastiano Serlio|Serlio]] d'un [[Portique (architecture)|portique]] ouvrant sur un escalier à double volée. Le ''pavillon de la porte dorée'', édifié pour l'occasion, reprend les disposition observées dès 1509 au [[château de Gaillon]]<ref name="Palustre" />. Mais contrairement à ce qu'on observait dans le [[Val de Loire]], on priviligie désormais une architecture austère à base de [[moellon]]s et de pierres enduites. Si la superposition des [[pilastre]]s des façades, ne respectent en rien les [[Ordre architectural|ordres antiques]], l'étagement des [[loggia]]s, la scansion des niveaux par des [[Fronton (architecture)|frontons]] triangulaires et le découpage des toitures en pavillons rectangulaires provoquent un grand effet classicisant, transformant cette architecture, en une entrée triomphale, à l'exemple du [[Castel Nuovo]] de [[Naples]]<ref name="BabelonChateaux" />.
 
Mais avant même que les bâtiments du nouveau château soient achevés,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fait venir d'[[Italie]] un groupe important d'artistes pour embellir le palais<ref name="Ducher" />. Il crée ainsi de ses vœux, une sorte de « nouvelle [[Rome antique|Rome]] », que l'on appellera l'[[École de Fontainebleau]], avec un cercle intellectuel et artistique influant. Jusqu'à sa mort, en [[1540]], [[Rosso Fiorentino|Rosso]] y joue le premier rôle auquel succédera [[Le Primatice]] : Le décor de la galeri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vaste ensemble voué à la glorification de la [[Royaume de France|monarchie française]] en est la plus belle expression<ref name="Muchembled"/>. Dans les années qui suivent, le rachat de la toute proche [[Ordre des Trinitaires|abbaye des trinitaires]] permet de s'extraire du cœur [[Moyen Âge|médiéval]] du château et de créer une œuvre moderne ''ex nihilo'' autour d'une imposante [[cour d'honneur]]<ref name="Palustre" />. Inspirée de la [[Villa médicéenne de Poggio a Caiano]], la liaison à l'ancien château se fait par une nouvelle aile à [[Portique (architecture)|portiques]], permettant la réalisation de la ''Galeri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superposée à de luxueux appartements de bain. Quant au corps central à [[Pavillon (architecture)|pavillons]] carrés de la nouvelle aile du palais, il s'inspire du [[Château de Bury (Molineuf)|château de Bury]], tout en marquant, par son plan rectiligne et ses [[lucarne]]s à [[Fronton (architecture)|frontons]] triangulaires épurés, l'évolution classicisante qui va marquer la Seconde Renaissance.
 
[[파일:Chateau Fontainebleau.jpg|왼쪽|섬네일|591x591px|L'aile de l'escalier du Fer-à-cheval du [[château de Fontainebleau]] (1542-1545), marque l'avènement de la Seconde Renaissance.]]
 
Le style nouveau de la Première renaissance ne tarde pas à se répandre dans toute la [[France]]. Des villes comme [[Lyon]], [[Dijon]], [[Besançon]] ou [[Nancy]] ainsi que [[Bar-le-Duc]]<ref>Le secteur sauvegardé (la ville-haute) de [[Bar-le-Duc]] conserve des dizaines d'hôtels particuliers édifiés lors de la Renaissance/</ref> sont particulièrement riches de maisons et d'hôtels particuliers de la Première renaissance<ref name="Mignot">{{Ouvrage | langue= fr | auteur1= Claude Mignot | auteur2= Daniel Rabreau | auteur3= Sophie Bajard | titre= Temps Modernes {{sp-|XV|-|XVIII|s}} | passage= | lieu= Paris | éditeur= Flammarion | collection= Histoire De L'art | année= 6 octobre 2010 | pages totales= 575 | isbn= 9782080121813 | lire en ligne= }}.</ref> : parmi les demeures les plus célèbres on peut citer, l’Hôtel Chabouillé dit de [[François Ier de France|François 1세]] à Moret-sur-Loing, le [[logis Pincé]] (1525-1535) à [[Angers]], l'[[hôtel de Bullioud]] (1536) et l'[[hôtel de Gadagne]] (encore de [[style Louis XII]]) à [[Lyon]], la [[Maison des Têtes de Metz|maison des Têtes]] (1527) à Metz, l'[[Hôtel d'Haussonville]] (1527-1543) de [[Nancy]], ou encore l'[[Hôtel de ville de Beaugency]]<ref name="Mignot" />.
 
Dernier des grands châteaux qui furent bâtis sur les bords de Loire au {{s|XVI}}, le [[château de Villandry]], apporte une touche finale aux recherches de la Première Renaissance<ref name="Palustre" /> tout en annonçant les réalisations d'[[Ancy-le-Franc]] et d'[[Château d'Écouen|Écouen]]. Dès son arrivée en [[1532]], ''Jean le Breton'', ministre des finances d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exploite à [[Château de Villandry|Villandry]] son exceptionnelle expérience de l’architecture acquise sur de nombreux chantiers, dont celui du [[château de Chambord]] qu’il a surveillé et dirigé pendant de longues années pour le compte de la [[Royaume de France|Couronne]]. Tout en rasant l’ancienne [[Château fort|forteresse féodale]], on conserve le [[donjon]], témoin symbolique du traité du 4 juillet [[1189]], appelé «Paix de Colombiers », du nom de [[Villandry]] au [[Moyen Âge]], au cours duquel le roi d'[[Angleterre]] [[Henri II d'Angleterre|Henri II Plantagenêt]], vint devant le [[roi de France]] [[Philippe Auguste]], reconnaître sa défaite. Achevé vers [[1536]], ce nouvel édifice présente une disposition moderne par la régularité de son plan quadrangulaire et sa cour intérieure s'ouvrant sur les perspectives de la vallée où coulent le [[Cher (rivière)|Cher]] et la [[Loire]]. Pourtant tout proches et presque contemporains d’[[Château d'Azay-le-Rideau|Azay-le-Rideau]], les « fantaisies » italianisantes et les souvenirs [[Moyen Âge|médiévaux]] tels que les [[Tours|tourelles]], les [[clocheton]]s ou autres [[mâchicoulis]] décoratifs, disparaissent ici entièrement au profit d’un style plus simple, purement français, dont la clacissisme et la forme des toitures préfigurent les réalisations d'[[Ancy-le-Franc]] et du [[château d'Écouen]]<ref name="BabelonChateaux" />. Si l’originalité de [[Château de Villandry|Villandry]] se situe dans une conception architecturale d’avant-garde annonçant la Seconde Renaissance, l’utilisation qui a été faite du site pour y construire en pleine harmonie avec la nature et la pierre, des jardins d’une remarquable beauté, en fait l'une des expressions les plus abouties de la Première Renaissance française.
 
=== 르네상스 제2기 : 고전주의 (1540 - 1559/1564) ===
<gallery mode="packed">
Bachelier - Hôtel d'Assézat - Toulouse - La cour d'honneur.jpg|L'[[hôtel d'Assézat]] à [[Toulouse]] (1555-1556).
Caen hotel de l'escoville.jpg|Cour de l'[[hôtel d'Escoville]] à [[Caen]] (1533-1540).
Paris 75001 Cour Carrée Louvre Aile Lescot 01a frontal.jpg|L'aile dite [[Pierre Lescot|Lescot]] du [[palais du Louvre]] (1546-1556)
Château de Fère-en-Tardenois DSC 0042.jpg|Le [[château de Fère-en-Tardenois]] (vers 1560).
Orléans Maison de Jean d'Alibert 1.jpg|La maison de Jean d'Alibert à [[Orléans]] (vers 1560).
Chateau grand jardin.jpg|Le [[château du Grand Jardin]] (1533-1546).
Façades côté cour du château.JPG|Le [[château de Bournazel]] (milieu {{s mini-|XVI}} s.)
Château de Bastie d'Urfé.jpg|Le [[château de la Bastie d'Urfé]] (1536-1558).
</gallery>
[[파일:Ancy-le-Franc - Cour interieure 1.jpg|왼쪽|섬네일|Le [[château d'Ancy-le-Franc]] (1538-1546).]]
La Seconde Renaissance, autrefois dit « style Henri II », marque à partir de [[1540]] la maturation du style apparu au début du siècle ainsi que sa naturalisation tandis que le [[Châteaux de la Loire|Val de Loire]] se retrouve relégué en conservatoire des formes de la Première Renaissance. Cette nouvelle période se développe alors principalement durant les règnes de [[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François II (roi de France)|François II]] puis [[Charles IX (roi de France)|Charles IX]], pour ne s'achever que vers 1559-1564, au moment même où commencent les [[Guerres de Religion (France)|guerres de Religion]], qui seront marquées par le [[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 et la [[Contre-Réforme|contre-réforme catholique]]<ref name="BabelonChateaux" />.
 
Alors que la Première Renaissance est peu à peu acceptée en province, toute une série d'innovations se font sentir, en [[Île-de-France]].
 
À partir de [[1540]], le [[Classicisme]] progresse, à la suite de la venue en [[France]] de [[Sebastiano Serlio|Serlio]] (1475-1555) : Bien que son œuvre architecturale reste limitée, son influence est considérable par la publication de son ''Traité d'Architecture'' (1537-1551)<ref name="Muchembled" />. Grâce à ses œuvres gravées, il est un des premiers à initier les autres artistes à la beauté des monuments de l'[[antiquité]], contribuant ainsi à faire évoluer plans et décors vers plus de sobriété et de régularité<ref name="Muchembled" />. Pour autant, l'architecture française continue de garder des traits propres qui séduisent [[Sebastiano Serlio|Serlio]] : les [[lucarne]]s « sont de grand ornements pour les édifices comme une couronne » et les grands [[Comble (architecture)|combles]] couverts d'ardoise bleutées sont « des choses très plaisantes et nobles »<ref name="Mignot" />.
 
[[파일:Ecouen_Chateau_02.jpg|오른쪽|섬네일|Façade de l'aile Nord du [[château d'Écouen]] par [[Jean Bullant]] (1532-1567).]]
 
Les [[architecte]]s qui à l'époque du [[style Louis XII]] et de la [[Première Renaissance]], étaient des [[Architecte|maîtres-maçons]] traditionalistes et plein de verve, deviennent dès lors, des savants et des lettrés dont certains effectuent leur voyage d'études en [[Italie]].
 
Marquant un véritable tournant stylistique, cette nouvelle génération d'artistes opère une synthèse originale entre les leçons de l'antiquité, celle de la [[Renaissance italienne]] et les traditions nationales. Parmi les plus célèbres, [[Philibert Delorme]] est auteur de l'[[Hôtel de Bullioud|Hôtel Bullioud]] à [[Lyon]], des [[Château de Saint-Maur|châteaux de Saint-Maur-des-Fossés]] et d'[[Château d'Anet|Anet]] ainsi que de la [[Château de Villers-Cotterêts|chapelle de Villers-Cotterêts]] ; [[Pierre Lescot]] édifie l'aile [[Renaissance]] du [[Palais du Louvre]] et l'Hôtel de [[Jacques de Ligneris]] ([[musée Carnavalet]]) ; [[Jean Bullant]] construit les châteaux [[Château d'Écouen|d'Écouen]] et [[Château de Fère-en-Tardenois|de Fère-en-Tardenois]] ainsi que le [[Château de Chantilly|Petit Château de Chantilly]]<ref name="Muchembled" />.
 
[[파일:ChateauEcouenAileSud.jpg|오른쪽|섬네일|Façade de l'aile Sud du [[château d'Écouen]] avec les moulages des Esclaves de [[Michel-Ange]] dont les originaux ont été emportés au [[Musée du Louvre|Louvre]] (1532-1567).]]
 
Ces architectes collaborent désormais étroitement avec les sculpteurs et définissent une architecture et un décor savants, préférant la beauté des lignes à la richesse de l'ornementation : [[Benvenuto Cellini|Cellini]] sculpte pour la ''Porte dorée'', le [[Relief (sculpture)|relief]] en bronze de la ''[[Nymphe de Fontainebleau]]'' ; son œuvre typiquement « [[Maniérisme|maniériste]] », fait grande impression en [[France]] et influence probablement [[Jean Goujon]], réalisateur de la [[fontaine des Innocents]] et de la décoration de la façade du [[Palais du Louvre|Louvre]] ; L'influence [[Maniérisme|maniériste]] imprègne également l'œuvre de [[Pierre Bontemps]], chargé du Tombeau d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à [[Basilique Saint-Denis|Saint-Denis]] ainsi que du monument du cœur d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ref name="Muchembled" />.
 
En [[Bourgogne (ancienne région administrative)|Bourgogne]], le [[château d'Ancy-le-Franc]] (1538-1546) est l'une des premières réalisations à répondre à cet idéal nouveau. Œuvre de l'architecte [[Sebastiano Serlio|Serlio]], ce château construit pour [[Antoine III de Clermont]], de 1538 à 1546, marque une évolution vers le [[classicisme]] en [[France]]. Avec cet édifice commence alors sur le sol [[France|français]] ce que l'on appelle : « l'architecture modulaire ». Seuls ici les légers [[Fronton (architecture)|frontons]] à enroulement des fenêtres du premier étage, rappellent la Première Renaissance. Pour le reste, rien ne vient distraire l'ordonnance uniforme des baies en [[Arcade (architecture)|arcades]] ou en fenêtres, séparées par une [[travée]] de [[pilastre]]s jumelés, renfermant une [[niche (architecture)|niche]] et montés sur un haut [[stylobate]]. Cette alternance d'une baie principale et d'une baie secondaire (ici feinte puisque représentée par une niche) encadré de [[pilastre]]s représente un des premiers exemples en [[France]] de la « travée ryhmique » traitée avec une telle franchise et une telle rigueur. Ce nouveau style inspirera un peu plus tard l'architecte du [[château de Bournazel]] lors de l'édification du portique est.
 
[[파일:Chateau de Chantilly 001.JPG|왼쪽|섬네일|La Capitainerie, surnommée le [[Château de Chantilly|Petit Château de Chantilly]] (1551).]]
 
Cette exigence de clarté se poursuit au [[château d'Écouen]] (1532-1567), en [[Île-de-France]]. Il suffit de comparer cet édifice avec un château de la Première Renaissance, tel qu'[[Château d'Azay-le-Rideau|Azay-le-Rideau]] pour constater les différences profondes entre les architectures des deux époques. Tout l'appareil défensif machicoulis ou le chemin de ronde d'[[Château d'Azay-le-Rideau|Azay-le -Rideau]] disparaissent purement et simplement au château d'Écouen. Les tours d'angle de [[Château de Chambord|Chambord]] deviennent comme à [[Château d'Ancy-le-Franc|Ancy-le-Franc]] et [[Château de Villandry|Villandry]], de simples pavillons carrés. Il en va de même pour l'[[ornement (architecture)|ornementation]]. Il suffit de comparer les [[lucarne]]s d'[[Château d'Écouen|Écouen]], avec celles du [[Val de Loire]], pour se rendre compte du chemin parcouru. À l'étagement de [[pinacle]]s, de [[Niche (architecture)|niches]] à coquilles et de petits [[Arc-boutant|arcs-boutants]] de la Première Renaissance, succède une composition de lignes épurées très sobrement ornées, où les [[Cannelure (architecture)|cannelures]] antiquisantes remplacent dans les pilastres, les rinceaux et arabesques de l'époque d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 Un style sévère succède alors aux grâces légères de la Première Renaissance. Reprenant une disposition déjà observée à Villandry, le château présente une disposition moderne par la régularité de son plan quadrangulaire où les [[Pavillon (architecture)|pavillons]] s'articulent harmonieusement. Pour aérer l'espace intérieur, une aile basse ferme la cour. L'entrée se fait alors par un avant corps surmontée d'une loggia où la statue équestre d'[[Anne de Montmorency (1493-1567)|Anne de Montmorency]], reprend les compositions observées au châteaux [[Château de Gaillon|de Gaillon]] et d'[[Château d'Anet|Anet]]. L'édifice tout entier s'isole grâce à un [[Fossé (infrastructure)|fossé]] bastionné rappelant la charge militaire du propriétaire. Le fond de la cour n'est plus constitué d'un [[corps de logis]] mais d'une simple [[Galerie (architecture)|galerie]] d'apparat reliant deux ailes d'appartements dont ceux du Roi et de la Reine donnent sur la [[Pays de France|plaine de France]]. Au niveau inférieur, des bains collectifs se développent comme à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connecté à des aires de loisirs (jardin, [[jeu de paume]]). La façade de l'aile Nord, reprise par [[Jean Bullant]], présente une superposition nouvelle d'[[Ordre architectural|ordres]] réguliers, surmontée par une [[corniche]] classique inspirée de l'[[antiquité]]. Pour autant, les recherches réalisées sur la façade sud afin de s'adapter aux proportions des statues des esclaves de [[Michel-Ange|Michael-Ange]], offertes par [[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lui donne l'opportunité d'utiliser pour la première fois en [[France]] l'[[ordre colossal]] : les [[Colonne (architecture)|colonnes]] occupant désormais les deux niveaux jusqu'à la base de la toiture, sont inspirées du [[Panthéon (Rome)|Panthéon]] de [[Rome antique|Rome]] et se voient surmontées d'un [[entablement]] classique, créant l'illusion d'un monument antique. Même si l'influence des réalisations de [[Michel-Ange|Michael-ange]] au [[Place du Capitole (Rome)|Capitole]] et à [[Basilique Saint-Pierre|Saint-Pierre de Rome]] sont manifestes, les références à la [[Renaissance italienne]] s'effacent peu à peu devant les exemples du [[Antiquité|monde romain]].
 
[[파일:Chateau d'anet 004.jpg|alt=Le château d'Anet|왼쪽|섬네일|Porte triomphale du [[château d'Anet]] (1552).]]
 
L'aile Lescot du [[Musée du Louvre|Louvre]], entreprise à partir de 1546, est le chef-d'œuvre de la Deuxième Renaissance. Cette œuvre de [[Pierre Lescot]], architecte antiquisant, fut décorée par [[Jean Goujon]]<ref name="Archimbaud">{{ouvrage|langue=fr | prénom1= Nicolas | nom1= d’Archimbaud | titre= Louvre | passage= 100 | éditeur= France Loisirs | année= 1998 | pages totales= 335 | isbn= 2-7441-1984-9 | lire en ligne=}}.</ref>. L'escalier prévu initialement au centre du [[corps de logis]] se voit déplacé à la demande d'[[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dans l'optique de créer une grande salle où prennent places des [[cariatide]]s grecques, moulées à la demande de [[Jean Goujon]], sur l'[[Érechthéion|Erechthéion]] de l'[[Acropole d'Athènes|Acropole d'Athénes]]. À la manière d'un manifeste du style français, prôné par [[Pierre Lescot|Lescot]], la façade présente une superposition d'[[Ordre architectural|ordres]] classiques nouveaux sans pour autant atteindre la régularité italienne : à mesure que l'on monte, les proportions se font de plus en plus fines, et l'idée de couronner les deux ordonnances superposées d'un large bandeau décoré, aboutit à acclimater en [[France]], l'étage d'attique si prisé en [[Italie]], tout en utilisant pour la première fois des [[Comble (architecture)|combles]] brisés « à la française », afin de donner l'illusion d'un [[Comble (architecture)|comble]] droit. Malgré leur peu de saillie, les avant-corps, dernier souvenir des tours [[Moyen Âge|médiévales]], suffisent à « animer » la façade. Les admirables sculptures de [[Jean Goujon]] contribuent à faire de cet édifice une œuvre unique. Au rez-de-Chaussée, les arcatures en plein cintre encadrées de pilastres provoquent l'accentuation des verticales et des horizontales tandis que le jeu de double supports encadrant une niche ornée d'une médaille, représente une disposition qui deviendra typique dans l'architecture française.
 
[[파일:Chateau Anet - intérieur chapelle.jpg|오른쪽|섬네일|[[Château d'Anet|Chapelle d'Anet]] (1549-1550).]]
 
Autre réalisation majeure de cette période, le [[château d'Anet]], est réalisé par [[Philibert Delorme]], aux frais du [[Roi]], pour [[Diane de Poitiers]], maîtresse d'[[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Détruit à la [[Révolution française|Révolution]], il ne subsiste aujourd'hui sans alternations que la [[chapelle]] et les trois [[Ordre architectural|ordres]] superposés conservés à l'[[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École des Beaux-Arts de Paris]]. Devenu typique de la Seconde Renaissance, le plan quadrangulaire présente un logis situé face à l'entrée. Des fossés bastionnés, comme à [[Château d'Écouen|Écouen]] possèdent des canons pour la fête et l'apparat. L'entrée de forme pyramidale, est une réminiscence italienne représentant un arc de triomphe réinterprété par Delorme. Quatre colonnes [[Ordre ionique|ioniques]] supportent un [[Arcade (architecture)|arc]] tombant sur une [[architrave]] tandis que les colonnes des passages latéraux sont inspirées du [[Palais Farnèse]] de [[Antonio da Sangallo le Jeune|Sangallo le jeune]]. Sous le découpage des [[balustrade]]s, un jeu de polychromie de matériaux, encadre la [[Nymphe de Fontainebleau|nymphe]] réalisée par [[Benvenuto Cellini|Cellini]] pour la porte Dorée de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Au sommet, un groupe d'automates, disparu, marquait les heures. Partout [[Philibert Delorme]] exprime sont goût pour les inventions bizarres inspirées des ''capriccio'' de [[Michel-Ange]]<ref name="Mignot" /> : Sous cette influence, apparaît une utilisation inédite de volumes arrondis tandis que de nombreux détails tels que les frontons à enroulements ou les [[Gaine (architecture)|pilastres en gaine]], révèlent une connaissance approfondies des œuvres [[Michel-Ange]]lesques. C'est ainsi que les cheminées, dites « en sarcophage », se développant de part et d'autre de l'édifice, semblent comme un lointain souvenir des [[Sagrestia Nuova|tombeaux des Médicis]] à [[Florence]]. Situé au fond de la cour, le corps du logis central, par sa superposition d'ordres donne un aspect ascensionnel tout en reprenant la même superposition d'[[Ordre architectural|ordres canoniques]], observée sur l'aile nord d'[[Château d'Écouen|Écouen]] : on y retrouve d'ailleurs le même type de statues à l'antique placées dans des [[Niche (architecture)|niches]] encadrées par un double support. Aux ordres classiques, Delorme préfère créer un ordre inhabituel : La [[Colonne (architecture)|colonne baguée]] présentée par l'architecte comme la solution d'un problème technique permettant de masquer les joints des colonnes appareillées. Cette invention exprime aussi la nouvelle maturité de l'architecture française avec la réflexion sur la création d'un « ordre français »<ref name="Mignot" />, idée abandonnée à la mort d'[[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mais reprise par [[Jules Hardouin-Mansart]] lors de la construction de la [[galerie des Glaces]] du [[château de Versailles]].
 
La [[chapelle]] du [[château d'Anet]] reste la réalisation la plus novatrice. C'est la première fois en [[France]], que l'on utilise le plan centré. Si le découpage de niches entourées de [[pilastre]]s est influencé des réalisations contemporaines de [[Bramante]] et de [[Michel-Ange]], la frise qui la surmonte est inspirée de [[Giuliano da Sangallo|Sangallo]]. Les sculptures sont peut-être de [[Jean Goujon]]. L'édifice sert d'écrin aux émaux d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et aux [[Douze Apôtres|apôtres]] de ''Scibec de Carpi''. La voûte de la [[coupole]] développe un décor comportant une imbrication de cercles se reflétant, d'une façon octogonale, sur le pavement du sol. Ce motif, inspiré par les éléments fréquemment rencontrés dans les [[mosaïque]]s romaines montre la volonté de surpasser le modèle italien en se référant directement aux réalisations antiques, afin de créer un architecture originale à la française.
 
[[파일:Palais du parlement du Dauphiné - 2012.jpg|왼쪽|섬네일|Partie droite en bleu du [[palais du parlement du Dauphiné]] (1539-1562).]]
 
Parallèlement à ces grands chantiers royaux, les grandes demeures citadines participe à la naturalisation de ce nouveau style : Sous l'impulsion de la Seconde Renaissance, tout le somptueux décor de rinceaux et de médaillons démesurés et plein de verve ornant la galerie de l’hôtel Chabouillé de [[Moret-sur-Loing]], disparaissent face au système des ''proportions modulaires'', strictement appliqué à l'entablement de la « maison de Jean d'Alibert » à [[Orléans]], où des [[Cartouche (architecture)|cartouches]] à découpures inspirés de l'[[École de Fontainebleau]] surmontent les fenêtres<ref name="Mignot" />. Répondant à une exigence de clarté recherchée au cours de cette période, les [[Hôtel particulier|hôtels particuliers]] se développent alors entre cour et jardin comme à [[Paris]], notamment à l'hôtel [[Jacques de Ligneris]] ([[musée Carnavalet]]).
 
Le nouveau style ne tarde pas à se répandre dans toute la [[France]] : dans le [[Val de Loire]], au [[château de la Bastie d'Urfé]] (ou ''Bâtie d’Urfé''), en [[Bourgogne (ancienne région administrative)|Bourgogne]], au ''casino'' du [[Château du Grand Jardin|Grand Jardin de Joinville]] (avant 1546), en [[Aveyron (département)|Aveyron]], au [[château de Bournazel]] [[Aveyron (département)|(]]1545-1550) ou encore en [[Normandie]] à l'[[hôtel d'Escoville]] de [[Caen]] (1537). [[Le Mans|Au Mans]] et à [[Rodez]], l'influence du [[Vitruve|Vitruvien]], [[Guillaume Philandrier]], est probable alors qu'à [[Toulouse]], l'architecte [[Nicolas Bachelier]] se met au service de tout un milieu [[Humanisme|humaniste]] ; parmi les demeures les plus célèbres : on peut citer le château de [[Saint-Jory]] (bâti en 1545, aujourd'hui détruit) ainsi que le bel exemple des trois ordres superposés de l'[[hôtel d'Assézat]] (1560)<ref name="Mignot" />. Certains bâtiments publics comme le [[palais du parlement du Dauphiné]] (1539) à [[Dijon]] ou le [[Palais Granvelle (Besançon)|palais Granvelle]] et l'[[Hôtel de ville de Besançon|hôtel de ville]] à [[Besançon]] participent également de la Seconde Renaissance.
 
Si l'architecture religieuse reste fidèle aux structures et aux [[Croisée d'ogives|voûtes gothiques]] ([[Cathédrale Notre-Dame du Havre|cathédrale du Havre]], [[Église Saint-Eustache de Paris|Saint-Eustache]] de [[Paris]]), beaucoup d'églises modernisent leur façade principale ou latérale par un [[Frontispice (architecture)|frontispice]] « à l'antique » ([[Cathédrale Notre-Dame de Rodez|Rodez]], [[Collégiale Saint-Gervais-Saint-Protais de Gisors|Gisors]], [[Église Saint-Aignan de Chartres|Saint-Aignan de Chartres]]), et traitent leur [[jubé]] comme un [[arc de triomphe]] ([[Sainte-Chapelle|Sainte-Chapelle de Paris]], [[Abbaye Saint-Pierre de Maillezais|Saint-Pierre de Maillezais]]).
 
=== 매너리즘 (1559/1564 - 17세기 초) ===
<gallery mode="packed">
Dijon - Maison Milsand -4.jpg|[[Maison Maillard]] à [[Dijon]] (1561).
Chateau de Chenonceau.jpg|Traversant le [[Cher (rivière)|Cher]], la ''[[Galerie (architecture)|galerie]] des Dômes'' et la ''galerie des Attelages'' de [[Chenonceau]] par [[Jean Bullant]] (1576-1577).
Maison Maillard 001.jpg|[[Maison Maillard]] à [[Dijon]] (1561).
Hôtel de Pierre 2.JPG|Détail de la cour intérieure de l'[[hôtel de Bagis]] à [[Toulouse]] (1610).
South facade of the Aile de Rohan, Louvre 27 February 2016.jpg|La [[Réunion du Louvre et des Tuileries|galerie du bord de l'eau]] du [[Palais du Louvre|Louvre]] réalisée par [[Jacques II Androuet du Cerceau]] vers 1600 (déplacée au {{s mini-|XIX}} s).
P1140584 Paris IV hotel Lamoignon rwk.jpg|Vue de la façade de la cour de l'[[hôtel Lamoignon]] (1584-1611).
Jacques Androuet Du Cerceau (I) - Château, Charleval - WGA00432.jpg|Château de [[Charleval (Eure)|Charleval]] resté inachevé en 1574 ([[Jacques Ier Androuet du Cerceau]], « Les plus excellents bastiments de France »).
</gallery>
[[파일:Fontainebleau Château 534.jpg|왼쪽|섬네일|279x279px|''Aile de la Belle Cheminée'' du [[château de Fontainebleau]] (1565-1570).]]
Formant un ultime écho de la [[Renaissance]] et de l'[[Humanisme]] en [[France]], cette dernière phase s'écarte dès les années 1559/1564, du [[classicisme]] ambiant par sa fantaisie créative, qui peut justifier pour ce style l'appellation de « maniériste ». Au moment même où commencent les [[Guerres de Religion (France)|guerres de Religion]], marquées par le [[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 le pessimisme et le scepticisme envahissent les hommes et les artistes de pure formation [[Humanisme|humaniste]]. Les penseurs antiques de référence deviennent [[Stoïcisme|les stoïciens]] de préférence à [[Platon]]. Si l'[[humanisme]] survit, sa [[philosophie]] profonde évolue, tout en étant reprise et repensée par la [[Contre-Réforme|contre-réforme catholique]]<ref name="Muchembled" />.
 
[[파일:Louvre1615.jpg|섬네일|오른쪽|Le [[palais du Louvre]] et le [[palais des Tuileries]] sur le [[plan de Mérian]] (1615).]]
 
De la clarté des formes et du classicisme de la Seconde Renaissance, succède une architecture [[Maniérisme|maniériste]]. Émergeant à nouveau avec une force renouvelée, le jeu sur les volumes et les recherches sur l'ombre et la lumière, déjà toute [[baroque]], se mêle aux frontons fragmentés, pilastres, grotesques, volutes ou autres mascarons, issus de la culture de la [[Renaissance]]. Fenêtres et [[lucarne]]s viennent souvent empiéter sur l'[[entablement]] : On parle alors de « lucarnes passantes ». C'est ainsi qu'à l'[[Hôtel d'Angoulême Lamoignon|hôtel Lamoignon]] à [[Paris]] (vers 1584), scandé d'un grand [[ordre colossal]] comme le [[palais Valmarana]] de [[Andrea Palladio|Palladio]], l'[[entablement]] est rompu par les [[lucarne]]s qui descendent jusqu'à l'[[architrave]]. Les [[architecte]]s ont une prédilection marquée pour les colonnes adossées, [[Cannelure|cannelées]], ornées, dont les plus spectaculaires sont des colonnes dites « françaises » à fût bagué inventées par [[Philibert Delorme]] et apparues lors de la période précédente. Cette invention s'inscrit dans un goût général pour l'ornement, se manifestant également au niveau vestimentaire dans les bijoux et les dentelles. C'est par là même, une expression de la nouvelle maturité dans l'architecture française. Delorme s'en justifie : « S'il a été permis aux anciens architectes en diverses nations et pays d'inventer de nouvelles colonnes (...) qui empêchera que nous français, n'en inventions quelques-unes et les appelions françaises<ref name="Mignot" />. »
 
Malgré une baisse important du [[mécénat]] royal, lié à la situation politique du pays, [[Catherine de Médicis]] et les élites sociales continuent de faire travailler les artistes : [[Philibert Delorme]] est chargé à partir de 1564 d'achever le [[château de Saint-Maur]] et de bâtir le [[palais des Tuileries]], constructions qui seront poursuivies plus tard par [[Jean Bullant]], architecte qui couronnera également d'une [[Galerie (architecture)|galerie]] le pont du [[château de Chenonceau]] ([[1576]]-[[1577]]). Afin de relier le nouveau [[palais des Tuileries]] au vieux [[palais du Louvre|Louvre]], [[Jacques II Androuet du Cerceau]] commence, vers 1594, la construction de la [[Réunion du Louvre et des Tuileries|galerie du bord de l'eau]], achevée plus tard par [[Louis Métezeau]] tout en réalisant parallèlement pour [[Diane de France]], l'[[Hôtel d'Angoulême Lamoignon|hôtel Lamoignon]]<ref name="Muchembled" />.
 
[[파일:Hotel de Bagis Toulouse.jpg|왼쪽|섬네일|Façade de l'[[hôtel de Bagis]] à [[Toulouse]] (1610).]]
 
Parmi les réalisations majeures de cette époque, [[Palais des Tuileries|le palais des Tuileries]] commencées par [[Philibert Delorme]], devaient se développer sur trois cours avec des [[Pavillon (architecture)|pavillons]] sous [[Dôme (architecture)|dômes]] et la création de jardins. Sur la partie donnant sur le parc, le [[Pavillon (architecture)|Pavillon]] central encadré de deux ailes longitudinales uniformes ont une élévation comportant seulement un rez-de-chaussée surmonté d'un étage à [[Comble (architecture)|combles]]. Le [[Pavillon (architecture)|pavillon]] central offre une ''travée rythmique'' cantonnée de [[Colonne (architecture)|colonnes]] très décorées, abritant un [[escalier à vis]] hélicoïdal autour d'un grand vide cerné de [[Colonne (architecture)|colonnes]] (achevé seulement sous [[Henri IV (roi de France)|Henri IV]]). C'est l'œuvre la plus [[Maniérisme|maniériste]] de [[Philibert Delorme|Delorme]] en rapport avec les dernières productions des milieux [[Florence|florentins]] et de [[Michel-Ange]]. Mais [[Philibert Delorme|Delorme]] meurt en 1570. [[Jean Bullant|Bullant]] qui lui succède, ne parvient à en achever qu'une partie. Cette œuvre témoigne d'une réflexion sur l'architecture à la française.
 
[[파일:Raray (60), haie cygénétique nord 2.JPG|오른쪽|섬네일|276x276px|Haie cygénétique nord du [[Raray|château de Raray]] (vers 1600).]]
 
L'''aile de la Belle Cheminée'' au [[château de Fontainebleau]] est représentative de l'aboutissement de la Renaissance française, tout en étant déjà teintée par le [[Maniérisme|maniérisme italien]]. Conçue de manière grandiose par [[le Primatice]], vers 1565-1570, elle a la particularité d'avoir deux escaliers à rampes divergentes qui magnifiaient l'entrée de l'appartement de [[Charles IX (roi de France)|Charles IX]]. Le [[Le Primatice|Primatice]] a peut-être trouvé l'idée des deux escaliers à rampe droite dans les grandes réalisations de [[Bramante]] au [[Palais du Vatican|Vatican]] ou de [[Michel-Ange]] au [[Capitole]] en inversant la direction des rampes. La façade est ornée de grands bronzes à sujet [[Mythologie|mythologique]], exécutés entre 1541 et 1543 par le [[Le Primatice|Primatice]], envoyé à [[Rome]] à la demande d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afin de réaliser des copies en plâtre obtenues sur les sculptures en marbre qui y étaient conservées. Un atelier de fonderie installé au château de Fontainebleau, cour du Cheval blanc, permit de mener à bien le travail de fonte, sous la direction de l'architecte italien [[Jacopo Barozzi da Vignola|Vignole]].
 
À la même époque, à la suite d'un « échange » réalisé avec [[Diane de Poitiers]], [[Catherine de Médicis]], nouvelle maîtresse du [[château de Chenonceau]], fait édifier sur le « ''pont de Diane'' » deux [[Galerie (architecture)|galeries]] superposées formant un espace de réception unique au monde, et donnant ainsi son aspect actuel au château. Les travaux commencent en 1576 et s’achèvent en 1581. La galerie est vraisemblablement l’œuvre de [[Jean Bullant]] qui remplace [[Philibert Delorme]] dans la faveur royale. Cette nouvelle construction forment deux espaces superposés de {{unité|60|m}} de long sur {{unité|5.85|m}} de large, illuminés par 18 fenêtres. Le rez-de-chaussée se compose d’une succession de tourelles en demi-lune, inspirées des [[Exèdre|exédres]] des [[Thermes romains|thermes de l'antiquité]], venant écraser la pointe des avant-becs de la plate-forme. Ces tourelles s’achèvent en balcon à l'étage noble du premier dont les parois sont plus ornées qu’au rez-de-chaussée. Typique de cette architecture [[Maniérisme|maniériste]], les façades possèdent de hautes fenêtres coiffées de larges [[Fronton (architecture)|frontons]] courbes, réunies par des ''tables'' horizontales aux cadres moulurés. [[Catherine de Médicis|Catherine]] voulu également revêtir d’un habit plus [[Classicisme|classique]] ce château encore bien trop [[Architecture gothique|gothique]] à son goût<ref name="Muchembled" />. C’est dans ce but que la travée centrale, à l’entrée du château, fut agrémentée de deux bustes et que quatre nouvelles fenêtres furent percées sur les travées latérales ; afin d’accueillir les quatre [[cariatide]]s sculptées inspirées des réalisations de [[Giulio Romano|Jules Romain]] (aujourd’hui conservées dans le jardin).
 
[[파일:Chateau-de-Vallery-DSC 0082.jpg|alt=|왼쪽|섬네일|278x278px|Le '''château de Vallery''', ou '''château des Condé''' par [[Pierre Lescot]] (1562).]]
 
Initié vers [[1570 en France|1570]] par le roi [[Charles IX (roi de France)|Charles IX]] (1560-1574), le château de [[Charleval (Eure)|Charleval]] constitue l'un des plus ambitieux projets de toute la [[Renaissance]]. Quatre fois plus grand que [[Château de Chambord|Chambord]], son style [[Maniérisme|maniériste]] devait approcher le [[baroque]], alors en gestation en [[Italie]]. La mort du roi en [[1574 en France|1574]] mit un terme au chantier dont les [[Fondation (construction)|fondations]] sortaient à peine de terre. Les vestiges disparurent rapidement.
 
À l'exemple des grands projets royaux, le [[Maniérisme]] ne tarde pas à être repris dans les hôtels particuliers de toute la [[France]] : on peut citer l'[[hôtel de Bagis]] de [[Toulouse]] (1610) l'[[hôtel de Lillebonne]] (1580) à [[Nancy]] ainsi que l'[[hôtel de Vogüé]] (1614) et la [[maison Maillard]] (1561) de [[Dijon]]<ref name="Muchembled" />.
 
Parallèlement à ces réalisations, un style pittoresque et rustique, inspiré du [[palais du Te]] de [[Jules Romain]], s'accompagne en [[France]] d’une utilisation délibérément arythmique de détails [[Classicisme|classiques]] où reste plaquée une ornementation variée dans un esprit purement décoratif. Parmi les exemples les plus représentatifs de cette tendance, les ''Haies cynégétiques'' du [[Raray|château de Raray]] se développent en une série de deux [[Arcade (architecture)|arcades]], exprimant le goût du seigneur de Lancy pour la chasse, l'[[Antiquité classique|antiquité]] et l'Italie. À l'époque de leur construction, ces deux longues [[balustrade]]s monumentales sont disposées de façon diagonale, de part et d'autre de la [[cour d'honneur]], afin de créer une véritable « mise en abîme » du [[corps de logis]] central, annonçant déjà les dispositions architecturales que reprendront [[Jacques Lemercier|Lemercier]] et [[Louis Le Vau|Le Vau]] au siècle suivant. Tout en créant une ouverture sur les jardins, cette organisation régulière des volumes et des arcades permettent de mettre en valeur, par la simplicité de leurs décors, les scènes de chasses au cerf et au sanglier qui les surmontent. Afin de créer toute une série de [[Travée|travées rythmiques]] sans [[pilastre]]s, chacune des dix-neuf ouvertures est alors encadrée par des niches, au style épuré, abritant les bustes de personnages [[Antiquité|antiques]]<ref name="Château">{{article | prénom1= Marc | nom1= Durand | prénom2= Geneviève | nom2= Mazel | titre= Raray et son château | périodique= Bulletin du G.E.M.O.B. |série= | volume= | numéro= 90-91 | titre numéro= | lieu= Beauvais | jour= | mois= | année= 2001 | issn= | pages= 12-13, 16 et 25-30 }}. Comporte plusieurs articles, chacun signé par l'un des trois auteurs.</ref>. Cette disposition originale faisant ainsi alterner [[Baie (architecture)|baies]] ouvertes et [[travée]]s aveugles permet dès lors un véritable jeu de pleins et de vides complété par l'instabilité de la [[Clé de voûte (architecture)|clef de voûte]] des arcs qui semble glisser vers le bas comme si elle allait chuter. L'ensemble de ces détails donnent alors une impression de décor de théâtre ouvert sur les jardins, dont l'architecture mouvante et épurée se voit contrastée par la frénésie de la scène qui la surmonte.
 
Marquant une dernière évolution artistique dans cette renaissance tardive, [[Pierre Lescot]], met au point au [[château de Vallery]] (1562), ce que l'on peut appeler le « style rustique français » : construit à partir de [[1548 en architecture|1548]] pour le maréchal de [[Jacques d'Albon de Saint-André|Saint-André]], l'édifice se démarque par un système de [[trumeau]]x de briques et de [[Chaînage|chaînes]] de pierres [[Harpe (architecture)|harpées]], venant marquer les angles des corps de bâtiment et encadrer les travées des fenêtres, recoupées par un ou deux bandeaux de pierre. Ce système se fonde sur une manière de bâtir traditionnelle fréquente durant le [[Style Louis XII]] comme au [[château de Blois]], mais elle se trouve régularisée et ennoblie par l'adoption du « [[Bossage (architecture)|bossage romain]] » tel qu'on peut le voir aux angles du [[palais Farnèse]]. Le coût modique mais aussi le charme polychrome de cette « architecture aux trois crayons » ([[André Chastel]]) explique sans doute son succès dès le règne d'[[Henri III (roi de France)|Henri III]] et se développera amplement au début du {{s|XVII}}, dans ce qu'on appellera le [[style Louis XIII|style Louis {{XIII}}]] ; de cette nouvelle expression architecturale, on peut citer le [[château de Wideville]] (1580-1584) dans les [[Yvelines]], le [[Abbaye de Saint-Germain-des-Prés|palais abbatial de Saint-Germain-des-Prés]] ou encore le [[Château de Rosny-sur-Seine|château de Rosny sur Seine]] (1595-1606)<ref name="Muchembled" />.
 
== L'École de Fontainebleau ==
L'École de [[Fontainebleau]] est le nom donné à deux périodes de l'[[histoire de l'art]] [[France|français]], qui dominèrent la création artistique française aux {{sp-|XVI|et|XVII|s}}, et qui figurent parmi les exemples les plus aboutis de l'art renaissant en [[France]].
 
Centré autour des peintres travaillant principalement à la décoration du [[château de Fontainebleau]]<ref name="Béguin">{{Lien web | langue= fr | auteur1= Sylvie Béguin (1919-2010) | titre= École de Fontainebleau | url= http://www.universalis.fr/encyclopedie/ecole-de-fontainebleau/ | site= [http://www.universalis.fr universalis.fr] | date= | consulté le= 04 mai 2017 }}.</ref>, cette école se caractérise par une interprétation française mesurée du [[maniérisme]]<ref name="Beaumont">{{Ouvrage | langue= fr | auteur1= Laure Beaumont-Maillet | nom2= Gisèle Lambert | nom3= Jocelyn Bouquillard | titre= Dessins de la Renaissance - Collection de la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Département des estampes et de la photographie | passage= | lieu= Paris | éditeur=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 année= févr. 2004 | pages totales= 296 | format livre= {{Dunité|29|25|cm}} | isbn= 9782717722741 | lire en ligne= }}.</ref>.
 
L’appellation donnée à ce mouvement artistique ne date pourtant que du {{s-|XIX}}, employée la première fois en [[1818]] par l’historien Adam Bartsch (1757-1821), dans ses travaux sur la gravure (1803-1821), afin de désigner les estampes réalisées par un groupe d’artistes dans les années [[1540]], sous l’influence de deux maîtres italiens œuvrant au [[château de Fontainebleau]] : le [[Rosso Fiorentino|Rosso]] et [[Le Primatice|Primatice]]<ref name="Beaumont" />.
 
Par extension, ce terme s’est appliqué à toutes les formes d’art qui se sont épanouies à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et un peu plus tard, dans le même esprit, à [[Paris]]<ref name="Beaumont" />.
 
=== La Première École de Fontainebleau (1526-1570 environ) ===
<gallery mode="packed">
Fontainebleau escalier roi.jpg|''[[Alexandre le Grand|Alexandre]] domptant [[Bucéphale]]'', [[Le Primatice|Primatice]], ancienne chambre de la [[Anne de Pisseleu, duchesse d'Étampes|duchesse d'Étampes]],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1552.
Fontainebleau 036.jpg|''Le Sacrifice'', [[Rosso Fiorentino|Rosso]], galeri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1534-1539).
Fontainebleau 047.jpg|Stuc représentant un jeune homme de la galeri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Fontainebleau Galerie Éléphant.JPG|Éléphant à fleurs de lys, galeri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du [[Rosso Fiorentino|Rosso]],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1534-1539).
Esau Hunting apartment of Anne de Montmorency Château Écouen.jpg|Chambre d'[[Anne de Montmorency (1493-1567)|Anne de Montmorency]] (1555, [[Château d'Écouen|Écouen]]).
Galerie d'Oiron.jpg|Extrémité de la galerie du [[château d'Oiron]] par [[Noël Jallier]] (1547-1549).
Oiron noel jallier Paris et Menelas.JPG|Galerie du [[château d'Oiron]] par [[Noël Jallier]] : [[Pâris]] et [[Ménélas]] (1547-1549).
Chateau Tanlay fresques Tour de la Ligue.jpg|L'[[Dieux de l'Olympe|Olympe]], tour de la Ligue du [[château de Tanlay]] (vers 1558).
</gallery>
[[파일:FontainebleauGalerieFrancoisI.jpg|왼쪽|섬네일|Galeri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par [[Rosso Fiorentino]] et Scibec de Carpi au [[château de Fontainebleau]] (1534-1539).]]
En [[1526]] alors qu'il rentre à peine de captivité,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fait venir d'[[Italie]] un groupe important d'artistes italiens pour embellir son [[château de Fontainebleau|Palais de Fontainebleau]]<ref name="Ducher" />. Il crée ainsi de ses vœux, une sorte de « nouvelle [[Rome antique|Rome]] », que l'on appellera l'École de Fontainebleau, avec un cercle intellectuel et artistique influant.
 
À partir de [[1530]], sous l'influence des italiens [[Rosso Fiorentino|Rosso]] et [[Le Primatice|Primatice]], sont lancées les grandes formules d'un style décoratif qui va s'imposer à toute l'[[Europe]]. Leur grande innovation dans la décoration intérieure est l'alliance, pour la première fois en [[France]], d'ornements ou de figures de [[stuc]] avec des [[fresque]]s et des [[lambris]] boisés.
 
Parmi les sujets de prédilection, on retrouve les tableaux [[Mythologie|mythologiques]] ou [[Allégorie|allégoriques]], inspirés de l'[[Antiquité]], où les nus sont traités avec élégance<ref name="Archimbaud" />. Grâce [[Rosso Fiorentino|au Rosso]], la [[École de Fontainebleau|Première École de Fontainebleau]] développe les capacités décoratives du [[Cartouche (architecture)|cartouche]] en l'associant aux enroulements et aux souples découpages du [[Cuir découpé|cuir]]. Cette formule inédite va connaître un succès universel.
 
[[파일:Oiron_Noel_Jallier_mort_d'Hector.jpg|오른쪽|섬네일|''[[Hector|La mort d'Hector]]'', fresque, [[Noël Jallier]], [[château d'Oiron]] (1547-1549).]]
 
Dans la ''Galeri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cette introduction nouvelle du [[stuc]] permet d'enrichir les [[fresque]]s ou les [[Médaillon (architecture)|médaillons]], de bordures en [[haut-relief]]. Ce système d'encadrement, créé à l'instigation du [[Rosso Fiorentino|Rosso]], s'anime ici de figures, de [[Putto|putti]], de guirlandes de fruits, de [[bucrane]]s, de [[satyre]]s ou de [[mascaron]]s, au milieu de l'ondulation des [[Cuir découpé|cuirs]] et des trouées des [[Niche (architecture)|niches]]. Ces [[stuc]]s tantôt blancs, tantôt peints et dorés, encadrent des figures [[Allégorie|allégoriques]], tout en créant des jeux d'ombres et de lumière<ref name="Muchembled" />.
 
[[파일:F0128_Louvre_Ecole_Fontainebleau_Venus_a_la_toilette_RF658_rwk.jpg|왼쪽|섬네일|''Vénus à sa toilette'' (anonyme, milieu du {{s mini-|XVI}}, [[musée du Louvre]]).]]
[[파일:Diane-Ec.Fontainebleau-Louvre.jpg|오른쪽|섬네일|''Diane chasseresse'', anonyme, [[École de Fontainebleau]], vers 1550, [[musée du Louvre]].]]
Œuvre d'un Italien, mais impensable en dehors du contexte français, la ''Galeri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se révèle alors comme un vaste ensemble destiné à la glorification de la [[Royaume de France|monarchie française]]. Immédiatement admirée par les étrangers, et en premier lieu par les Italiens, elle fait brusquement de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un centre artistique majeur, telle une « ''nouvelle [[Rome antique|Rome]]'' », réalisant par là même la grande ambition du roi qui s'y fait représenter en « ''vainqueur de l'Ignorance'' ».
 
Ce type nouveau de [[Galerie (architecture)|galerie]] impose en [[France]] un monde imaginaire inédit : la cour, habituée jusqu'ici aux décors des [[tapisserie]]s à sujets religieux ou héroïques, découvre l'univers de la [[Fable]] et ses [[nudité]]s provocantes. Une telle œuvre dut faire sensation et précipiter l'évolution des esprits.
 
Alors que survient la mort, [[Rosso Fiorentino|du Rosso]] en [[1540]], [[Le Primatice|Primatice]], prend la direction des travaux de [[Fontainebleau]], assisté en cela par [[Nicolò dell'Abbate]].
 
L'achèvement du décor de la chambre de la [[Anne de Pisseleu|duchesse d'Étampes]], lui donne l'opportunité de réaliser un vaste ensemble décoratif, dont les cycles allégoriques mettent en premier plan la figure humaine. Pour autant, celle-ci se voit traitée comme un élément décoratif parmi tant d'autres, devant, au même titre que les guirlandes ou les cartouches, se plier à la formulation d'ensemble et aux exigences de la composition. Son echelle et son canon suivent ainsi les impératifs de l'effet d'ensemble. D'une manière générale, c'est le [[Maniérisme|Maniérisme italien]], introduit et renouvelé par [[Rosso Fiorentino|le Rosso]] et [[Le Primatice|Primatice]] qui commande l'aspect fluide et allongé des figures, en particulier lorsqu'il s'agit du nu féminin qui se voit animé alors par la « ligne serpentine »<ref name="Ducher" />.
 
Au-dessus des lambris de cette chambre, se développent des scènes érotiques inspirées de la vie d'[[Alexandre le Grand]]. Cette série de fresques, réalisées entre [[1541]] et [[1544]], tire aussi bien son inspiration des réalisations de [[Raphaël (peintre)|Raphaël]] que de la luxure d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 roi libertin aux nombreuses maîtresses (il en aurait eu 27 à la fois), il aurait affirmé à [[Brantôme (écrivain)|Brantôme]] : « Une cour sans dames, est comme un jardin sans fleurs »<ref>[[Gonzague Saint Bris]], ''François {{1er}} et la Renaissance'', éditions Télémaque, [[2008]], 475 p.</ref>. Restés un temps inachevés, ces décors sont complétés à partir de [[1570]] par [[Nicolò dell'Abbate]], afin de parchever les travaux de l'''aile de la Belle-Cheminée''. Parmi ces œuvres, nous sont parvenus du [[Le Primatice|Primatice]] : ''Alexandre domptant Bucéphale'', ''Le Mariage d'Alexandre et Roxane et Alexandre épargnant [[Timoclée]]'', complétées par celles de [[Nicolò dell'Abbate|Niccolo dell'Abate]] dont : ''Alexandre fait serrer dans un coffret les œuvres d'Homère'' et ''Thalestris monte dans le lit d'Alexandre''<ref name="Samoyault">Jean-Pierre Samoyault, ''Guide du musée national du château de Fontainebleau'', réunion des musées nationaux, Paris, 1991, {{p.|99}}</ref>.
 
Un peu plus tardive, la ''Salle de Bal'', prend un parti différent, [[Le Primatice|Primatice]] étant alors supplanté par [[Philibert Delorme]]. Les fenêtres ici vitrées permettent le développement de [[fresque]]s au-dessus d'un [[Lambris|haut lambris]] de [[menuiserie]]. Un [[plafond à caissons]] élaboré par Scibec de Carpi complète l'ensemble. Au fond se détache une gigantesque cheminée encadrée de deux satyres en bronze, dont l'éclectisme jouant avec les formes, la lumière et les matériaux, dénote un [[Maniérisme|style maniériste italien]]. Dans les [[embrasure]]s des fenêtres, apparaissent des décors peints de [[Mythologie|scènes mythologiques]] inspirées de l'[[Guerre de Troie|Histoire de la guerre de Troie]] et réalisées par [[Nicolò dell'Abbate]], qui travaille parallèlement pour [[Anne de Montmorency (1493-1567)|Anne de Montmorency]] (Enlévement de Proserpine, ou Histoire d'Euridyce).
 
Ces réalisations bellifontaines influencèrent alors grandement les artistes français, tels [[Jean Goujon]], [[Antoine Caron]] ou encore [[Noël Jallier]]. Parfois d'ailleurs, on associe à l'[[École de Fontainebleau]], d'autres artistes invités par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tels que [[Benvenuto Cellini]] ou [[Girolamo della Robbia]]. Un certain nombre de ces personnalités, influencées par l'art italien, se mettent alors à participer à la décoration intérieure du [[château d'Écouen]] en cours d'édification. De manière générale, si l'esprit des éléments décoratifs reste fidèle aux réalisations de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les compositions de ce nouveau chantier voient une évolution dans le traitement des stucs, remplacés progressivement par des [[trompe-l'œil]]<ref name="Ducher" />.
 
Reprenant les parties pris de la ''Salle de bal'' de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les pièces du [[château d'Ancy-le-Franc]] sont ornées de [[Lambris|hauts lambris]] surmontés de [[fresque]]s attribuées en grande partie à [[Primatice]] ou à d'autres peintres de [[École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Leur style particulier témoigne ici encore de l'influence exercée par les demeures royales sur l'ensemble des productions artistiques du moment.
 
Vers la moitié du {{s|XVI}}, alors que le marché de l'[[estampe]] est en pleine explosion, les peintures réalisées par cette [[École de Fontainebleau|école]] sont copiées en [[Eau-forte|eaux-fortes]], apparemment à l'occasion d'un bref programme organisé en incluant les peintres eux-mêmes<ref name="Jacobson3et4">{{Harvsp|Jacobson|1994}}, parties III et IV.</ref>. L’art du vitrail en est touché, le meuble copie les motifs les plus célèbres. Les sculpteurs, même les plus grands, n’y sont pas insensibles. C'est ainsi que les patrons exécutés par les artistes de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pour les tapissiers, les orfèvres et les émailleurs contribuèrent naturellement à l’étroite interdépendance des arts à cette époque.
 
Loin de disparaître à la mort de ses deux derniers créateurs, l'[[École de Fontainebleau]], survit, parfois d’une façon très archaïque jusqu’à la fin du siècle. Son emprise sur l’art français est étonnante : On le note jusqu'en Province dans les fresques du [[château d'Oiron]] puis de [[Château de Tanlay|Tanlay]]. C'est ainsi qu'en mélant les influences [[Fontainebleau|bellifontaines]] et [[Rome|romaines]], la galerie du [[château d'Oiron]] (1547-1549) réalisée par [[Noël Jallier]] sur le thème de l'[[Énéide|Enéide]] et de l'[[Iliade]], fait la synthèse entre la [[France]] et l'[[Italie]]. On retrouve d'ailleurs les cavaliers italiens ainsi qu'une grande fougue dans l'action des personnages, inspirée du [[Rosso Fiorentino|Rosso]], tandis qu'un poétique ''[[sfumato]]'' envahit les paysages romains.
 
Enfin, au [[château de Tanlay]], les fresques de la [[voûte]] en [[coupole]] de l'étage supérieur de la ''Tour de la Ligue'', représentent avec la même ligne serpentine, des personnages de la [[cour de France]], travestis sous les traits de [[Divinités olympiennes|dieux de l'Olympe]]<ref name="guide">{{Ouvrage | titre= Le Guide des châteaux de France|sous-titre= Yonne | éditeur= Hermé | numéro d'édition= | isbn= 2-86665-028-X }}.</ref>.
 
Malgré la diversité des partis décoratifs, le grand nombre des techniques utilisées et le caractère cosmopolite d'un milieu qui réunit aussi bien des artistes italiens, français ou flamands, les productions de l'[[École de Fontainebleau]] présentent une grande unité de style, marqué par une conception commune de la figure et de l'[[ornement (architecture)|ornement]]. Le monde qui naît de cet accord n'ayant aucun équivalent en [[Italie]], il faut admettre qu'un climat propre à la cour de [[France]], fastueux, sensuel, élégant, a orienté dans une direction nouvelle le génie de [[Rosso Fiorentino|Rosso]] et de [[Le Primatice|Primatice]].
 
=== La Seconde École de Fontainebleau (1594-1617) ===
<gallery mode="packed" heights="160">
Fontainebleau painted ceiling.jpg|Le plafond de la [[Château de Fontainebleau|chapelle de la Trinité]], [[Martin Fréminet|Fréminet]], 1608-1619,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Scuola di fontainebleau, presunti ritratti di gabrielle d'estrées sua sorella la duchessa di villars, 1594 ca. 04.jpg|''Portrait présumé de [[Gabrielle d'Estrées]] et de sa sœur la duchesse de Villars'', anonyme (vers 1594, [[musée du Louvre]]).
Musée national du Château de Pau - Portait d'Henri IV en Mars - Ambroise Dubois P 81 20 1.jpg|[[Henri IV (roi de France)|Henri IV]] en [[Mars (mythologie)|Mars]], par [[Jacob Bunel]] (vers 1605-1606, [[Musée national du château de Pau|Pau]]).
La montée du calvaire - dubreuil - ecouen.jpg|''La montée au Calvaire'' de [[Toussaint Dubreuil]] (fin {{s mini-|XVI}}, [[château d'Écouen]]).
François Clouet.jpg|La Dame à sa toilette, Anonyme ({{2e}} moitié du {{s-|XVI}}, [[Worcester]], Museum of Art).
Ambroise Dubois 1543-1614 Allegorie de la Peinture et de la Sculpture..jpg|''Allégorie de la Peinture et de la Sculpture'', [[Ambroise Dubois]], 1543-1614,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François Clouet 002.jpg|La Dame au bain, [[François Clouet]], vers 1580, [[National Gallery of Art|Washington]].
Toussaint Dubreuil 001.jpg|[[La Franciade|La toilette de Hyante et Climène]], [[Toussaint Dubreuil]] (fin du {{XVIe}}, [[Musée du Louvre|Lou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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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ontainebleau - Le château - PA00086975 - 103.jpg|왼쪽|섬네일|338x338px|Le plafond de la [[Château de Fontainebleau|chapelle de la Trinité]] par [[Martin Fréminet|Fréminet]] ([[Fontainebleau]], 1608-1619).]]
À partir du règne d'[[Henri IV (roi de France)|Henri IV]] se développe un style maniériste tardif parfois qualifié de « Seconde École de Fontainebleau ». En écho à la première, elle désigne principalement les peintres qui furent actifs sur les chantiers royaux. au cours du règne d'[[Henri IV de France|Henri IV]] ([[1594]]-[[1610]]) et de la régence de [[Marie de Médicis]] ([[1610]]-[[1617]]). Le champ d'activité de cette seconde école a, lui aussi, largement débordé le cadre du seul [[château de Fontainebleau]] ; sa part était grande dans la décoration du [[Palais du Louvre|Louvre]] et de [[Saint-Germain-en-Laye]], sans oublier les travaux effectués pour la manufacture royale des Tapisseries<ref name="Jacobson3et4" />. Cette nouvelle équipe se démarque pourtant de la précédente, par son nombre important d'artistes d'origine flamande et d'une façon plus générale, par une influence nordique plus prononcée, pouvant s'expliquer par les circonstances politiques de l'époque<ref name="Beaumont" />.
 
Faisant suite à une longue période de troubles liés aux [[Guerres de Religion (France)|guerres de religion]], le renouveau des arts se manifeste de manière particulièrement éclatante dès le règne d’[[Henri IV (roi de France)|Henri IV]], en touchant tous les domaines : peinture, sculpture, architecture, art du livre mais également art des jardins et arts de cour, dont les ballets et les entrées triomphales<ref name="Beaumont" />.
 
Renouant avec l’époque d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le roi s’emploie à faire de nouveau rayonner les arts français par un [[mécénat]] important. Afin d'attirer à nouveau les artistes ayant fui [[Paris]], il s'emploie dès les années [[1590 en France|1590]], à les faire contribuer à la renommée du [[Royaume de France|royaume]] en les impliquant dans des programmes ambitieux (Galerie de Diane, Galerie des Cerfs, Pavillon des Poëles, [[Château Neuf de Saint-Germain-en-Laye]]…). [[Henri IV (roi de France)|Henri IV]], premier roi de la dynastie des [[Maison capétienne de Bourbon|Bourbons]] mais aussi héritier du trône des [[Maison capétienne de Valois|Valois]], n’a de cesse de rappeler la légitimité de ce pouvoir durement acquis.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fait ainsi partie de ces chantiers inachevés sous les Valois que le roi tient à terminer tout en aidant parallèlement la capitale à reconquérir sa primauté dans le domaine artistique.
 
[[파일:Grand dessein d’Henri IV (château du Louvre), vers 1600-1615.jpg|오른쪽|섬네일|294x294px|Le Grand dessein d’[[Henri IV (roi de France)|Henri IV]] : Le [[palais du Louvre]], [[Louis Poisson]], 1600-1615, galerie des Cerfs,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C’est dans ce contexte de prospérité retrouvée, que se développe la [[École de Fontainebleau|seconde École de Fontainebleau]]. La continuité avec la première équipe est d'autant plus sensible que la seconde s'inscrit également dans le courant international du [[maniérisme]], d'où la dénomination commune. Mais à l'inspiration [[parme]]sane qui dominait avec le [[Le Primatice|Primatice]] font place des influences plus mêlées. Les Italiens n'y jouent d'ailleurs plus le premier rôle car se sont bien les Français qui occupent désormais les postes de direction. Si l'on se tourne encore volontiers vers le [[Le Primatice|Primatice]], le [[Rosso Fiorentino|Rosso]] ou [[Nicolò dell'Abbate]], dont on apprécient la couleur et les tendances « modernes » de leurs paysages et de leurs scènes de genre, l'inspiration générale a changé : L'apport Flamand, devenu essentiel, amène une interprétation plus personnelle de la peinture, qui associe aux formules [[Maniérisme|maniéristes]] des éléments d'un réalisme souvent proche de la caricature : [[Toussaint Dubreuil]], [[Ambroise Dubois]] ou [[Martin Fréminet]] sont aujourd'hui considérés comme les principaux maîtres de ce mouvement<ref name="Beaumont" />.
 
Durant tout le règne d'[[Henri IV (roi de France)|Henri IV]], ces artistes n'ont de cesse de vouloir renouveler le style décoratif français, profitant des opportunités offertes par la reprise des chantiers royaux. Pour mener à bien leur recherche, la nouvelle équipe n'hésite pas à puiser non seulement aux sources de l'art de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que chez les [[Maniérisme du Nord|Flamands italianisants]] contemporains, amenant ainsi plusieurs distorsions dans leurs emprunts. C'est ainsi que le flamand [[Ambroise Dubois]] et le français [[Toussaint Dubreuil]] (prématurément disparu en 1602) synthétisent leurs apports par des compositions aux distorsions fantaisistes et aux nus érotiques, par un style brillant et éclectique. Pour autant la flamme semble bien éteinte et les confusions d’espace et d’échelle dans la plupart des compositions masquent la pauvreté de l’imagination et du style.
 
À la différence de la [[École de Fontainebleau|Première école de Fontainebleau]], aucun artiste français de la seconde génération, n'atteint la valeur et le charisme du [[Rosso Fiorentino|Rosso]] ou du [[Le Primatice|Primatice]]. Malgré sa volonté d'indépendance et de renouveau, cette école reste trop souvent attirée par les éléments voyants et fantastiques des modèles italiens, caractérisés par des perspectives extrêmes et une palette outrée et acidulée ; trop d’œuvres sombrent alors dans une formule confuse et un érotisme évident, signes d’une compréhension superficielle de l’art de la [[Renaissance|Renaissance tardive]]<ref name="Samoyault" />.
 
Si la Seconde école de Fontainebleau réunit des artistes français tels que [[Jacob Bunel]], [[Guillaume Dumée]], [[Gabriel Honnet]] ou le déjà baroque [[Martin Fréminet]], pour réaliser les décors des résidences royales, seul [[Antoine Caron]] impressionne par son art de cour extrêmement sophistiqué. Ses tableaux ressemblent étrangement à de gigantesques ballets, inspirés sans doute des divertissements préférés de la cour de [[Catherine de Médicis]], son principal mécène<ref name="Samoyault" />.
 
[[파일:Henry IV en Herculeus terrassant l Hydre de Lerne cad La ligue Catholique Atelier Toussaint Dubreuil circa 1600.jpg|왼쪽|섬네일|''[[Henri IV (roi de France)|Henri IV]] en [[Hercule]] terrassant l'hydre de Lerne'', [[Toussaint Dubreuil]], vers 1600, [[musée du Louvre]].]]
 
Désormais moins focalisées sur les sujets [[Mythologie|mythologiques]] ou [[Allégorie|allégoriques]], inspirés de l'[[Antiquité]], la Seconde école de Fontainebleau se tourne plus volontiers vers les thèmes romanesques et littéraires issus des chansons [[Le Tasse|du Tasse]] et de [[l'Arioste]] : Les sujets tirés de la [[La Jérusalem délivrée|Jérusalem délivrée]] ou de [[la Franciade]] connaissent alors un succès retentissant. Pour autant, les thèmes religieux restent toujours aussi prisés, car souvent liés à des commandes prestigieuses, parfaitement illustrées dans le décor déjà [[baroque]] de la [[Château de Fontainebleau|chapelle de la Trinité]] réalisée par [[Martin Fréminet|Fréminet]], comme une nouvelle « Sixtine française » du {{s-|XVII}}<ref name="Beaumont" />.
 
Par la somptuosité de ses décors, le [[château de Fontainebleau]], redevient pour un temps un centre artistique majeur ajoutant au rayonnement de la nouvelle dynastie, les échanges entre l'art proprement parisien et l'art [[Fontainebleau|bellifontain]] semblant alors s'intensifier<ref name="Béguin" />.
 
Pour autant, les liens qui unissent la France d’Henri IV et de [[Marie de Médicis]] aux grands centres artistiques européens, permet à cette nouvelle équipe [[Fontainebleau|bellifontaine]] de se placer dans un cadre plus large, en connexion avec [[Florence]], [[Anvers]] ou encore [[Nancy]], dont le centre artistique brillant est dominé par [[Jacques Bellange]] (mort en 1616) mais dont le style s'alourdit inoxorablement sous l'influence de [[Jean de Hoey]] et de Jérôme Franck<ref name="Beaumont" />.
 
Si de nombreuses œuvres d'artistes de la Seconde école de Fontainebleau ont malheureusement disparu, la conservation au [[Château d'Ancy-le-Franc|château d’Ancy-le-Franc]], d’un vaste ensemble de décors, se rattachant à la fois à la première et à la seconde école de Fontainebleau, en fait aujourd'hui l'un des témoins majeurs de la production picturale française de la [[Renaissance]]<ref>{{Lien web | langue= fr | auteur1= Maxime Georges Métraux | titre= Les décors peints du château d’Ancy-le-Franc (v. 1550-v. 1630) » | url= https://grham.hypotheses.org/2161 | site= [https://grham.hypotheses.org/ https://grham.hypotheses.org] | date= 12 avr. 2016 | consulté le= 04 mai 2017}}.</ref>.
 
En conclusion, le célèbre tableau représentant [[Gabrielle d'Estrées]] et une de ses sœurs, résume parfaitement les caractéristiques de la peinture française de la cour royale de l'époque, mélant sensualité, fraîcheur des couleurs et influence de la peinture italienne de la Renaissance. En se dintingant des maîtres de la première école, par une couleur plus chaude et plus contrastée, l'art de ces peintres encore pétri des modèles du premier [[Maniérisme|maniérisme italien]], a joué un rôle indéniable de transition avec l'art parisien du début du {{s-|XVII}}, en exprimant autant les tendances nouvelles du [[Classicisme]] que celles du [[Baroque]]<ref name="Béguin" />.
 
Malgré tout, l'éclat des œuvres de la [[École de Fontainebleau|Première école]] est tel que des maîtres comme [[Primatice]] et [[Nicolò dell'Abbate]], continuent d'exercer une influence déterminante durant toute la période : ils resteront d'ailleurs une référence majeure au {{s|XVII}} pour des [[Classicisme|classiques]] comme [[Laurent de La Hyre]], [[Jacques Blanchard]], [[Lubin Baugin]] et même les [[frères Le Nain]].
 
== Les jardins de la Renaissa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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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nonceauCatherinedeMedicisGarden.jpg|[[Château de Chenonceau|Chenonceau]]
ChenonceauDianesGarden.jpg|[[Château de Chenonceau|Chenonceau]]
Chateau-Villandry-JardinsEtChateau.jpg|[[Château de Villandry]]
Buchsgarten des Schlosses Villandry.jpg|[[Château de Villandry]]
Panorama Jardins Château de Villandry.jpg|<center>[[Château de Villandry]]</center>
</gallery>
Les jardins de la Renaissance française sont un style de jardin inspiré à l'origine par les [[Jardin à l'italienne|jardins de la Renaissance italienne]], qui a évolué par la suite pour donner naissance au style plus grandiose et plus formel du [[jardin à la française]] sous le règne de [[Louis XIV]], à partir du milieu du {{s|XVII}}<ref name="wenzler12" />.
 
En 1495, le roi [[Charles VIII (roi de France)|Charles VIII]] et ses nobles rapportèrent le style Renaissance en France à la suite de leur [[Guerres d'Italie|campagne guerrière en Italie]]<ref name="wenzler12"/>. Les jardins de la Renaissance française connurent leur apogée dans les jardins du [[Château de Fontainebleau|château royal de Fontainebleau]] et des châteaux de [[Château de Blois|Blois]] et [[Château de Chenonceau|Chenonceau]].
 
=== Esthétique ===
[[파일:ChateauDAnetDuCerceau.jpg|왼쪽|섬네일|438x438px|Jardins du [[château d'Anet]] ([[Jacques Ier Androuet du Cerceau|Jacques 1세 Androuet du Cerceau]], « Les plus excellents bastiments de [[France]] »).]]
Les [[Jardins de la Renaissance française|jardins de la Renaissance]] française sont caractérisés par des [[Plate-bande (jardinage)|plates-bandes]] ou [[Parterre (jardinage)|parterres]] symétriques et géométriques, des plantes en pots, des allées de sable et gravier, des terrasses, des escaliers et des rampes, des eaux courantes sous forme de [[Canal (voie d'eau)|canaux]], de [[Cascade (fontainerie)|cascades]] et de [[Fontaine (bassin)|fontaines]] monumentales, et par l'usage extensif de [[grotte]]s artificielles, de [[labyrinthe]]s et des statues de [[Mythologie|personnages mythologiques]]<ref name="wenzler13">{{Harvsp|id=wenzler|Wenzler|Année|p=13}}.</ref>. Ils devinrent une extension des châteaux qu'ils entouraient, et furent conçus pour illustrer les idéaux de mesure et de proportion de la [[Renaissance]] et pour rappeler les vertus de la [[Rome antique]]<ref name="wenzler13"/>.
 
Les [[Jardins de la Renaissance française|jardins de la Renaissance]] passent de l’[[enclos]] utilitaire, tout chargé de [[Symbolique chrétienne primitive|symbolique chrétienne]], à de larges perspectives utilisant le [[Religion de la Rome antique|vocabulaire païen]] et dont le but principal est la seule délectation, le plaisir. Les considérations esthétiques et personnelles deviennent alors primordiales<ref name="Lamarche">{{Ouvrage | langue= fr | auteur1= Gaëtane Lamarche-Vadel | titre= Jardins secrets de la Renaissance | passage= des astres, des simples et des prodiges | lieu= Paris | éditeur= l'Harmattan | année= 1997 | pages totales= | isbn= | lire en ligne= }}.</ref>. L’espace du jardin subit de moins en moins l’influence des préceptes religieux (nonobstant les visions d’[[Érasme]], de [[Bernard Palissy|Palissy]]). Les références iconologiques ne sont plus qu’exclusivement classiques : elle appartiennent à la mythologie par l’emploi de sa symbolique, des thèmes illustrés, de la statuaire… Les jardins ont aussi une dimension politique (les grands jardins sont dessinés à la gloire du maître des lieux), et l’évolution de l’art de vivre en fait le cadre de fêtes et de fastueux banquets. Leur histoire est aussi le reflet de celle, parallèle, de la [[botanique]] (introductions de nouvelles espèces, approche de plus en plus scientifique) et de l’évolution des théories et pratiques culturales<ref name="Lamarche" />.
 
=== Une influence italienne ===
[[파일:Chateau-Villandry-Jardins-Panoramique.JPG|오른쪽|섬네일|302x302px|Les [[Parterre (jardinage)|parterres]] de la [[Renaissance]] reconstitués du [[château de Villandry]].]]
Au {{s|XIII}}, l'architecte paysagiste italien, [[Pietro de' Crescenzi]] publia un traité, intitulé ''Opus Ruralium Commodium'', qui présentait un plan formel pour les jardins, ornés de sculptures [[Art topiaire|topiaires]], d'arbres et arbustes taillés en formes architecturales, suivant une tradition commencée par les Romains. Le roi [[Charles V de France|Charles V]] de France le fit traduire en français en 1373, et le nouveau style italien commença à apparaître en France<ref name="wenzler12"/>.
 
Un autre écrivain de grande influence fut [[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 qui écrivit en 1450 un livret, ''De re aedificatoria'', pour [[Laurent de Médicis]]. Il appliquait les principes géométrique de [[Vitruve]] pour dessiner les façades de bâtiments et les jardins. Il suggéra que les habitations devaient avoir une vue sur les jardins, et que les jardins devaient avoir des « portiques pour donner de l'ombre, des berceaux où les plantes grimpantes pousseraient sur des colonnes de marbre, et qu'il devait y avoir des vases et même des statues amusantes, pourvu qu'elles ne soient pas obscènes »<ref>cité par Philippe Prévôt, ''Histoire des jardins'', {{p.|69}}.</ref>.
 
Dans son dessin des jardins du [[Palais du Belvédère (Vatican)|Belvédère]] à Rome, l'architecte [[Bramante]] (1444–1544) introduisit l'idée de [[perspective (représentation)|perspective]], utilisant un axe longitudinal perpendiculaire au palais, le long duquel il disposait des parterres et des fontaines<ref name="prevot70">Philippe Prévôt, ''Histoire des jardins'', {{p.|70}}.</ref>. Cela devint une caractéristique centrale des jardins de la Renaissance.
 
Un roman populaire du moine [[Francesco Colonna (moine)|Francesco Colonna]], publié à Venise en 1499, intitulé ''Le Songe de Poliphile'', voyage [[Allégorie|allégorique]] de Poliphile dans des contrées imaginaires à la recherche de son amour, Polia, eut une énorme influence sur les jardins de l'époque. Des idées, comme celle d'une « île-jardin » dans un lac, telle celle du [[jardin de Boboli]] à Florence, de statues de géants sortant de terre dans le parc de la villa de Pratolino, et le thème du [[labyrinthe]], firent toutes reprises des voyages imaginaires de Poliphile<ref name="prevot70" />. Tous ces éléments devaient apparaître dans les jardins de la Renaissance française.
 
=== Le château de Blois ===
[[파일:SchlossBloismitParkGrundriss.png|오른쪽|섬네일|208x208px|Jardins du [[château de Blois]] ([[Jacques Ier Androuet du Cerceau]], « Les plus excellents bastiments de [[France]] »).]]
En 1499, [[Louis XII]] confia la réalisation des jardins du [[château de Blois]] à la même équipe qui fut engagée par la suite par [[Georges d'Amboise]] pour réaliser des parterres sur différents niveaux à son [[château de Gaillon]] : le jardin y était planté de [[Parterre (jardinage)|parterres]] de fleurs et d'arbres fruitiers<ref name="prevot104">Prévôt, ''Histoire des jardins'', {{p.|104}}.</ref>.
 
Lorsque [[Louis XII]] décède en 1515, [[François Ier de France|François 1세]] fait réaliser des jardins dans le nouveau style sur trois [[Culture en terrasses|terrasses]] à des niveaux différents entourées par les vieux murs de son [[château de Blois]]<ref name="prevot70" />.
 
Après lui son fils [[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lance des travaux d’embellissement du jardin<ref name="Diane">{{Lien web | langue= fr | auteur1= Diane | titre= Les jardins du château de Blois : l'élargissement du cadre | url= http://chateaux-jardins-etc.overblog.com/les-jardins-du-ch%C3%A2teau-de-blois-l-%C3%A9largissement-du-cadre | site= [http://chateaux-jardins-etc.overblog.com chateaux-jardins-etc.overblog.com] | éditeur= Elegant press © 2012|date= 2012 | mis en ligne= 11 fév. 2013, 17h09 | consulté le= 03 mai 2017 }}.</ref>. Le ''jardin du Roi'' se trouve orné de berceaux de verdure qui font échos à ceux du ''jardin de la Reine''. Vers 1554, on y trouve aussi des allées en croix avec quatre cabinets à l’intersection des quatre allées. Un [[étang]] artificiel est également construit au lieu-dit des ''Bornaz'' vers [[1556]]<ref name="Diane" />.
 
[[파일:SchlossBloisDuCerceauVogelperspektive.jpg|오른쪽|섬네일|211x211px|Jardins du [[château de Blois]] ([[Jacques Ier Androuet du Cerceau|Jacques 1세 Androuet du Cerceau]], « Les plus excellents bastiments de [[France]] »).]]
 
À sa suite, [[François II (roi de France)|François II]] entreprend de faciliter la liaison entre les jardins de [[Château de Blois|Blois]] et la forêt toute proche, il crée des allées, les marques de petits pavillons de charpente, les soulignent par la plantation d’[[Orme champêtre|ormes]] et la création de [[Fossé (infrastructure)|fossés]]<ref name="Diane" />.
 
Les jardins de Blois marquent dans l’histoire du jardin français un pas important. En effet, avec [[Blois]] les jardins s’agrandissent et [[Culture en terrasses|terrasse]] haute fait son apparition dans le jardin français. La composition française reste cependant très morcelée, en comparaison de son cousin italien dans lequel l’unité règne déjà<ref name="Diane" />. Pour autant l’effort fait à Blois dans l’introduction des éléments décoratifs transalpins est clairement visible, par l’importation de larges [[Parterre (jardinage)|parterres]], de [[Fontaine (bassin)|fontaines]] ornées et italianisées et surtout par la tentative de créer un jeu d’eau jaillissante dans les jardins<ref name="prevot70" />.
 
[[Château de Blois|Blois]] ne marquent cependant pas un tournant dans l’art des jardins de laPpremière Renaissance, il constitue un jalon, un laboratoire de recherche comme il y en eut de nombreux autres en [[Val de Loire]], à Bury, [[Château d'Azay-le-Rideau|Azay-le-Rideau]] ou [[Château de Chenonceau|Chenonceau]].
 
Outre les parterres de fleurs, les jardins produisaient une grande variété de [[légume]]s et de [[Fruit (alimentation humaine)|fruits]], y compris des [[oranger]]s et [[citronnier]]s dans des bacs, qui étaient rentrés en hiver<ref name="wenzler14"/>. Le bâtiment qui les abritait, qui existe toujours, fut la première [[orangerie]] de France<ref name="Diane" />.
 
Les jardins du [[château de Blois]] disparaissent progressivement au cours du {{s|XVII}}, faute d’entretien et laissent place au [[Liste d'écrivains de langue française par ordre chronologique#Nés au XVIe.C2.A0siècle|{{s-|XIX}}]] à l’''Avenue de l’[[Appontement|Embarcadère]]'', aujourd'hui ''Avenue du docteur Jean laigret'', afin de faciliter les travaux de la [[gare ferroviaire]] (1847). Les derniers vestiges du jardin sont détruits en [[1890]] lors de la création de la place [[Victor Hugo|Victor-Hugo]]<ref name="prevot70" />.
 
=== Le château de Chenonceau ===
[[파일:Chateau de Chenonceau,vue d'avion..JPG|왼쪽|섬네일|Le domaine de [[Château de Chenonceau|Chenonceau]].]]
Le [[château de Chenonceau]] avait deux jardins distincts, le premier créé en [[1551 en France|1551]] pour [[Diane de Poitiers]], favorite du roi Henri II, avec un grand parterre et un jet d'eau, et le second, plus petit, créé pour [[Catherine de Médicis]] en [[1560 en France|1560]] sur une terrasse construite au-dessus du Cher, divisé en compartiments, avec un bassin au centre<ref name="wenzler14" />.
 
En guise d'introduction, une ''Grande allée d'honneur'' mène au château sur près d'un km. De chaque côté de cette allée : la ferme du {{s|XVI}} à droite, le ''Labyrinthe'' et les [[Cariatide|''Cariatides'']] à gauche.
 
On compte deux jardins principaux : celui de [[Diane de Poitiers]] et celui de [[Catherine de Médicis]], situés de part et d'autre de la ''Tour des Marques'', vestige des [[fortification]]s précédant l'édification du château actuel.
En [[1565 en France|1565]] les jardins de la rive gauche du [[Cher (rivière)|Cher]] sont « nouvellement construits », comme le décrit Sonia Lesot dans son ouvrage<ref name="Lesot">{{Ouvrage | langue= fr | prénom1= Sonia |nom1= Lesot | lien auteur1= | directeur1= | prénom2= Henri | nom2= Gaud | lien auteur2= | directeur2= | titre= Chenonceau | sous-titre= Des jardins de la Renaissance | volume= | tome= | passage= 102 | lieu= | éditeur= Gaud | lien éditeur= | année= 2005 | mois= mai | jour= 13 | numéro d'édition= | pages totales= 166 | isbn= 978-2-84080-120-7 | lire en ligne= | consulté le= }}<.</ref> : [[파일:Chateau chenonceau fr.jpg|왼쪽|섬네일|Jardin de [[Diane de Poitiers]], 1551 (photo).|209x209px]]
{{Citation bloc|La fontaine du rocher de Chenonceau construite par Bernard (Palissy) pour Catherine (de Médicis); elle était déjà existante du temps de Diane de Poitiers, et avait servi à alimenter les bassins de son parterre […] (dans) le parc de Francueil, sur la rive gauche du Cher […] fut aménagé un jardin bas en bordure du fleuve, composé de deux vastes carrés séparés d'une allée tracée dans le prolongement de la galerie, accentuant l'axe Nord-Sud déjà si fort. Le coteau était percé de grottes.}}Le jardin de [[Diane de Poitiers]], dont l'entrée est commandée par la maison du Régisseur : la chancellerie, construite au {{s|XVI}} ; au pied de laquelle se trouve un embarcadère, agrémenté d'une vigne, accès indispensable à toute promenade sur le [[Cher (rivière)|Cher]].
 
En son centre se trouve un jet d'eau, décrit par [[Jacques Ier Androuet du Cerceau|Jacques Androuet du Cerceau]] dans son livre, ''Les plus excellents bastiments de France'' ([[1576]]). D'une conception surprenante pour l'époque, le jet d'eau jaillit d'un gros caillou taillé en conséquence et retombe « ''en gerbe'' » vers un réceptacle pentagonal de pierre blanche<ref name="wenzler14" />. Ce jardin est protégé des crues du [[Cher (rivière)|Cher]] par des [[Culture en terrasses|terrasses]] surélevées depuis lesquelles on a de beaupoints de vue sur les [[Parterre (jardinage)|parterres]] de fleurs et le château.
 
Le jardin de [[Catherine de Médicis]] est plus intime, avec un bassin central, et fait face au côté Ouest du château.
 
La décoration florale des jardins, renouvelée au printemps et en été, nécessite la mise en place de {{nombre|130000|plants}} de fleurs cultivés sur le domaine<ref name="Lesot" />.
 
=== Le château de Fontainebleau ===
[[파일:Château de Fontainebleau-Jardin français-20161231.jpg|오른쪽|섬네일|575x575px|Jardins du [[château de Fontainebleau]] modifiés par [[André Le Nôtre]].]]
Les jardins du [[château de Fontainebleau]], situés dans une forêt qui a été la réserve de chasse des rois [[capétiens]], ont été créés par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à partir de 1528. Les jardins comprennent des fontaines, des [[Parterre (jardinage)|parterres]], un forêt de [[Pin (plante)|pins]] apportés de [[Provence]] et la première [[grotte]] artificielle de [[France]] en [[1541 en France|1541]]. [[Catherine de Médicis]] commanda des copies en bronze des statues qui ornaient le [[Palais du Belvédère (Vatican)|Belvédère]] à Rome. Une statue d'[[Héraclès|Hercule]] au repos de [[Michel-Ange]] orne le jardin du lac. En [[1594 en France|1594]], [[Henri IV (roi de France)|Henri IV]] ajouta une petite île dans le lac, reliée à la cour des [[Fontaine (bassin)|fontaines]] par un pont<ref>Philippe Prévôt, ''Histoire des jardins'', {{p.|107-08}}.</ref>.
 
Le parc de [[Fontainebleau]] s'étend sur {{unité|115|hectares}}. Celui qui s'élevait sous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nous est connu grâce aux dessins de [[Jacques Ier Androuet du Cerceau]], et à ses planches gravées dans son ouvrage ''Les plus excellents bastiments de [[France]]''.
 
[[파일:DianaFontainebleau.jpg|왼쪽|섬네일|226x226px|La ''Fontaine de [[Diane (mythologie)|Diane]].'']]
 
Le jardin de Diane, au Nord du château, fut élevé par [[Catherine de Médicis]] sur un espace déjà aménagé par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et portait à l'époque le nom de ''Jardin de la Reine.'' Tracé en [[Parterre (jardinage)|parterres]] réguliers, le jardin fut réaménagé sous [[Henri IV de France|Henri IV]] et cloisonné au nord par une [[orangerie]] mais il est à nouveau remanié sous [[Louis XIV]] avant d'être transformé en [[Jardin à l'anglaise|jardin anglais]] au {{s-|XIX}}, sous [[Napoléon Ier|Napoléon 1세]] puis [[Louis-Philippe Ier|Louis-Philippe]], où l'[[orangerie]] est détruite. Ce jardin doit son nom à la ''Fontaine de [[Diane (mythologie)|Diane]]'' élaborée par [[Famille Francine|Francini]] en [[1603]] et surmontée de la ''Diane à la biche'' réalisée par le bronzier [[Barthélemy Prieur]].
 
La Grotte du jardin des Pins située au rez-de-chaussée du pavillon sud-ouest de la ''Cour du Cheval Blanc'' et caractéristique du goût pour les [[nymphée]]s au {{s-|XVI}}, présente des [[Arcade (architecture)|arcades]] à [[Bossage (architecture)|bossages]] rustiques soutenues par des [[Atlante (architecture)|atlantes]] se présentant sous la forme de [[satyre]]s monstrueux ouvrant sur un intérieur orné de fresques (animaux en reliefs, cailloux, coquillages, etc.). Son architecture due à [[Sebastiano Serlio|Serlio]] ou à [[Le Primatice|Primatice]] (les avis sont divergents) dénote une influence certaine des réalisations contemporaines de [[Giulio Romano|Jules Romain]]<ref>L.M. Golson, ''Serlio, Primatice, and the Architectural Grotto'', in Gazette des Beaux-Arts, février 1971, {{p.|95}}.</ref>, fut très vraisemblablement réalisée en [[1545 en France|1545]]<ref>{{harvsp|Thomas Clouet|2012|p=209-212}}.</ref>, tandis que le décor intérieur ne fut terminé que sous [[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Grâce à deux dessins préparatoires conservés au [[musée du Louvre]], on sait que [[Le Primatice|Primatice]] est le concepteur des compartiments peints à [[fresque]]s. La ''Grotte des Pins'' a fait l'objet d'importantes restaurations, en 1984-1986 puis en 2007, qui ont permis de rétablir la composition initiale du décor de la [[voûte]] et de replacer le sol à son niveau ancien.
 
Située au milieu du jardin, au creux d'un [[bosquet]]<ref name="SitewebCh">[http://www.musee-chateau-fontainebleau.fr/homes/home_id20479_u1l2.htm Site officiel du château]</ref>, la ''fontaine Bliaud ou Blaut'', appelée Belle-Eau dès le {{s-|XVI}} et qui donna son nom au château, s'écoule dans un ''petit bassin'' carré à pans coupés.
 
[[파일:Château de Fontainebleau 2011 (199).JPG|오른쪽|섬네일|253x253px|La Grotte de Pins.]]
 
Le « [[Parterre (jardinage)|Parterre]] », ou « Grand Jardin », ou encore « jardin du Roi » a été créé sous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et retracé sous [[Henri IV (roi de France)|Henri IV]] puis redessiné par [[André Le Nôtre]]. Les bassins du [[Tibre]] et de [[Romulus et Rémus|Romulus]] puisent leur nom dans un groupe sculptural qui les orna successivement aux {{sp-|XVI|-|XVII|s}}. Fondu pendant la [[Révolution française|Révolution]], le [[Tibre]], moulé à nouveau d'après l'original conservé au [[musée du Louvre]], a aujourd'hui retrouvé sa place. Le bassin central fut orné en [[1817]] d'une vasque succédant à une [[Fontaine (bassin)|fontaine]] en forme de rocher dite le « pot bouillant » qui existait à cet emplacement au {{s-|XVII}}. Clos de murs entre [[1528]] et [[1533]], [[Sebastiano Serlio|Serlio]] avait imaginé pour ce jardin un pavillon d'agrément. Aménagé entre [[1660]] et [[1664]], il comportait des rinceaux formant les chiffres du roi [[Louis XIV]] et de la reine-mère [[Anne d'Autriche (1601-1666)|Anne d'Autriche]], qui disparurent au {{s-|XVIII}}. Les [[Culture en terrasses|terrasses]] furent plantées de tilleuls sous [[Napoléon Ier|Napoléon 1세]].
 
Le bassin des cascades a été édifié en [[1661]]-[[1662]] à l'extrémité du [[Parterre (jardinage)|Parterre]], mais depuis le {{s-|XVIII}}, ne présente plus qu'un bassin aux niches ornées de marbre. Le bassin est orné en son centre depuis [[1866]] d'un ''Aigle défendant sa proie'' en bronze, par Cain (fonte par [[Roger Vittoz|Vittoz]])<ref name="JPSp??2">{{harvsp|Jean-Pierre Samoyault|1991|p=??}}</ref>.
 
Le parc de près de {{unité|80 hectares}} a été créé sous [[Henri IV (roi de France)|Henri IV]], qui y fait creuser le Grand canal de {{Unité|1,2 km}} de long entre [[1606]] et [[1609]], et y fait planter plusieurs [[Essence forestière|essences]] d'arbres, notamment des [[sapin]]s, des [[orme]]s et des [[Arbre fruitier|arbres fruitiers]]. Précédemment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avait vers 1530 établi la « treille du roi », longue elle aussi de {{Unité|1,2 km}}, où était cultivé sur la face sud du mur le [[Chasselas de Thomery|chasselas doré de Fontainebleau]]<ref>Ouvrage collectif sous la direction Jean-René Tronchet, Jean-Jacques Péru, et Jean-Michel Roy, ''Jardinage en région parisienne'' - {{s mini-|XVII}} au {{s-|XX}}s, éditions Créaphis, Paris, 2003, {{p.|49-50}}, {{ISBN|978-2-913610-18-7}}</ref>. Le [[Canal (voie d'eau)|canal]], précédant de près de 60 ans celui des [[Château de Versailles|jardins de Versailles]], devient vite un lieu d'attraction. On pouvait s'y promener en bateau et [[Louis XIII]] y fit naviguer une [[Galère (navire)|galère]]. Il est alimenté par plusieurs [[aqueduc]]s établis au {{s|XVI}}.
 
=== Le château de Saint-Germain-en-Laye ===
[[파일:Portrait_des_Chasteaux_Royaux_de_Sainct_Germain_en_Laye_par_A_Francini_1614_-_Gallica_2010_(adjusted).jpg|왼쪽|섬네일|290x290px|Les [[Château de Saint-Germain-en-Laye|châteaux royaux de Saint-Germain-en-Laye]], [[Famille Francine|Alessandro Francini]], 1614,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BnF]].]]
Les jardins du [[château de Saint-Germain-en-Laye]] marquent le début de la transition vers un nouveau style, qui sera appelé par la suite « [[jardin à la française]] ». Ces jardins ont été tracés en 1595 par le jardinier royal [[Claude Mollet]], pour le roi Henri IV<ref name="wenzler14" />.
 
Les dessins faits par [[Famille Francine|Alessandro Francini]] en [[1614 en France|1614]] montrent qu'à cette date les escaliers en hémicycles partant de la première terrasse réalisée devant le château en [[1563 en France|1563]] et entourant la ''Fontaine de [[Mercure (mythologie)|Mercure]]'' sont réalisés, probablement dès [[1594 en France|1594]], ainsi que les escaliers menant à la troisième [[Culture en terrasses|terrasse]].
 
En [[1599 en France|1599]], [[Henri IV (roi de France)|Henri IV]] a décidé de changer le plan du jardin et décide de construire sur la troisième terrasse une galerie dorique contre le mur de soutènement s'ouvrant sur le jardin et contenant des grottes aménagées sous la deuxième terrasse. Thomas Platter indique dans son récit de voyage qu'en novembre 1599, [[Tommaso Francini]] avait terminé la ''Fontaine du Dragon'', au centre de la galerie, et le ''Grotte de [[Neptune (mythologie)|Neptune]]'' ou du ''Triomphe marin'', sous la rampe sud, il était en train de construire la ''Grotte des Orgues (ou de la Demoiselle)'' sous la rampe nord. Des grottes sont aménagées sous la troisième [[Culture en terrasses|terrasse]] : la ''Grotte de [[Persée]]'', la ''Grotte d'[[Orphée]]'' et la ''Grotte des Flambeaux''. L'histoire de la réalisation de cette partie du jardin est mieux comprise à partir des archives retrouvées à Florence<ref name="wenzler14" />.
 
[[파일:Saint-Germain-en-Laye_château2_dessin.jpg|오른쪽|섬네일|193x193px|Le [[Château Neuf de Saint-Germain-en-Laye]] en [[1637 en France|1637]], Auguste Alexandre Guillaumot (1815-1892), ''[[Gallica]]''.]]
 
Les travaux se poursuivant avec l'aménagement des grottes avec leurs [[automate]]s mus par des jets d'eau, dus aux [[Tommaso Francini|frères Thomas et Alexandre Francini]]. Les [[Parterre (jardinage)|parterres]] du jardin à la française, qui s'étalent jusqu'à la [[Seine]] sur cinq [[Culture en terrasses|terrasses]], ont été conçus par le paysagiste [[Étienne Dupérac]] et le jardinier [[Claude Mollet]]. Celui-ci écrit dans son livre ''Théâtre des plans et jardinages'' qui a reçu l'ordre du roi de planter le jardin du [[Château Neuf de Saint-Germain-en-Laye|château neuf]] en [[1595 en France|1595]]<ref>Claude Mollet, ''Théâtre des plans et jardinages : contenant des secrets et des inventions incognues à tous ceux qui jusqu'à présent se sont meslez d'escrire sur cette matière, avec un traicté d'astrologie, propre pour toutes sortes de personnes, & particulièrement pour ceux qui s'occupent à la culture des jardins'', {{p.|202-203}}, chez Charles de Sercy, Paris, 1652 [https://gallica.bnf.fr/ark:/12148/bpt6k1042641w/f233.image.r= (''lire en ligne'')]</ref>.
 
[[Charles Normand (historien)|Charles Normand]] indique avoir trouvé dans les [[Archives nationales (France)|archives nationales]] un contrat d'échange avec le seigneur de Bréhant daté du {{1er}} septembre 1605 permettant au roi d'acquérir les terres et seigneuries du [[Le Pecq|''Pec'']] et du [[Le Vésinet|''Vézinay'']]. Par lettres patentes du 17 février 1623, le roi accorde à [[Tommaso Francini]], sieur des Grands-Maisons (commune de [[Villepreux]]), « ''la charge d'intendant des eaux et [[Fontaine (bassin)|fontaines]] des maisons, chasteaux et jardins de [[Paris]], [[Saint-Germain-en-Laye]], [[Fontainebleau]] et autres généralement quelconques, pour en jouir aux honneurs et pouvoirs y mentionnez, et aux gages de douze cens livres par an, pour y faire avec dix-huit cens livres dont il jouissait la somme de trois mil livres'' ». En 1625, [[Tommaso Francini]] est cité dans un acte comme ingénieur en artifice d'eaux reçoit « ''pour l'entretenement des grottes dud. [[Château Neuf de Saint-Germain-en-Laye|chasteau de Sainct-Germain]], la somme de douze cens livres'' ». En 1636, il reçoit 900 livres pour les grottes du [[Château Neuf de Saint-Germain-en-Laye|château de Saint-Germain]].
 
[[André Du Chesne]] décrit le jardin avec ses grottes en [[1630 en France|1630]] dans ''Les Antiquitez et recherches des villes, chasteaux et places plus remarquables de toute la [[France]]''<ref>André Du Chesne, ''Les Antiquitez et recherches des villes, chasteaux et places plus remarquables de toute la France selon l'ordre et ressort des huict parlements'', {{p.|219-224}}, chez Nicolas et Jean de la Coste, Paris, 1631 ({{6e}} édition) [https://books.google.fr/books?id=FdZP54wfWJ8C&pg=PA219#v=onepage&q&f=false (''lire en ligne'')]</ref>.
 
À partir de [[1649 en France|1649]], les jardins ne sont plus entretenus à cause des guerres de la [[Fronde (histoire)|Fronde]].
 
Vers [[1660 en France|1660]], la terrasse supérieure s'effondre en détériorant l'escalier en hémicycle et les grottes de la galerie dorique. Un nouvel escalier à rampes droites est construit en 1662 et les grottes sont restaurées mais pas les mécanismes hydrauliques.
 
Lorsque la [[Révolution française|Révolution]] arrive, le [[château Neuf de Saint-Germain-en-Laye]] est saisi comme [[bien national]]. Il est alors vendu à l'ancien régisseur du [[Charles X de France|comte d'Artois]] qui le démolit afin de lotir le terrain et de vendre les matériaux. Il n'en reste aujourd'hui que le [[Pavillon Henri IV]], le ''Pavillon du jardiner'', une terrasse et ses deux rampes au bout de la ''Rue [[Adolphe Thiers|Thiers]]'' qui surplombe l'''Avenue du Maréchal de Lattre de Tassigny'' et quelques vestiges dans les caves du quartier (au 3 rue des Arcades, par exemple).
 
=== Le château de Villandry ===
[[파일:Chateau-Villandry-JardinsEtChateau.jpg|오른쪽|섬네일|303x303px|[[Parterre (jardinage)|Parterres]] reconstitués du [[château de Villandry]].]]
Les jardins du [[château de Villandry]], dans le département d'Indre-et-Loire, sont la reconstitution à partir de textes anciens d'un [[Jardins de la Renaissance française|jardin de la Renaissance]] typique du {{s-|XVI}}.
 
Ces jardins sont divisés en quatre [[Culture en terrasses|terrasses]] : une terrasse supérieure comportant le ''jardin du soleil'' (création 2008), une avec le ''jardin d'eau'' entouré d'un cloître de tilleuls, puis une terrasse accueillant le ''jardin d'ornement'' ou ''jardin de broderies'' de [[buis]] taillés et d'[[If (botanique)|ifs]] en [[Art topiaire|topiaire]] et enfin une terrasse inférieure avec le ''potager décoratif'', lui aussi formant un dessin de broderie.
 
Le jardin d'ornement situé au-dessus du potager prolonge les salons du château. Monter jusqu'au belvédère permet d'avoir une vue magnifique sur l'ensemble. Il est constitué des ''jardins d'amour'' divisés en 4 ensembles :
* ''L'amour tendre'' symbolisé par des cœurs séparés de petites flammes.
* ''L'amour passionné'' avec des cœurs brisés par la passion, gravés dans un mouvement rappelant la danse.
* ''L'amour volage'' avec {{nombre|4|éventails}} dans les angles pour représenter la légèreté des sentiments.
* ''L'amour tragique'' avec des poignards et des glaives pour représenter la rivalité amoureuse.
 
Le jardin d'eau à l'extrémité sud de l'ensemble est de création classique autour d'une large pièce d'eau représentant un miroir Louis XV et entouré d'un cloître végétal de tilleuls.
 
L'ensemble comprend aussi un labyrinthe planté de charmilles, dont le but est de s'élever spirituellement jusqu'à la plateforme centrale, un ''jardin des simples'', c'est-à-dire des plantes aromatiques et médicinales, traditionnel au Moyen Âge, ''la Forêt'' avec des terrasses fleuries autour d'une serre et d'un beau pavillon du {{s-|XVIII}}, ''le Pavillon de l'Audience'', enfin ''le jardin du soleil'', le dernier-né, avec 3 espaces de verdure, la chambre des nuages aux tons bleus et blancs, la chambre du soleil où dominent les jaune-orangé et la chambre des enfants avec ses pommiers.
 
Les fontaines et tonnelles du jardin ont été restaurées à partir de 1994<ref name="merimee">{{Base Mérimée|PA00098286|Château de Villandry}}</ref>. Les jardins forment un ensemble limité au nord par la route de Tours, au sud par le chemin rural de la Bergerie, à l'ouest par le mur de clôture longeant le [[labyrinthe]] végétal.
 
Ils ont obtenu le label de [[Jardin remarquable]]<ref>[http://www.parcsetjardins.fr/centre/indre_et_loire/jardins_du_ch_teau_de_villandry-100.html Comité des Parcs et Jardins de France].</ref>
 
=== Chronologie du jardin de la Renaissance française<ref>Selon Yves-Marie Allain et Janine Christiany, ''L'Art des jardins en Europe'', {{p.|610}}.</ref> ===
[[파일:Chateau chenonceau fr.jpg|섬네일|Jardin de [[Diane de Poitiers]] à [[Château de Chenonceau|Chenonceau]] (créé en 1551).|204x204px]]
[[파일:Valleri jardin.jpg|섬네일|203x203px|Jardin du [[château de Vallery]] (1550-fin {{s-|XVI}}).]]
[[파일:Ambleville1.JPG|섬네일|204x204px|Jardins du [[château d'Ambleville]] (Reconstitution moderne).]]
* [[Château-Gaillard (Amboise)]] (1496)
* [[앙부아즈 성]] (1498)
* [[블루아 성]] (1499) - ([[19세기]] 정원이 파괴되었음)
* [[Château de Gaillon]] (1502 à 1550)
* [[Molineuf#.C3.89difices et sites|Château de Bury]] (1511–1520)
* [[슈농소 성]], (1515–1589) jardins de [[Diane de Poitiers]] (1551) et de [[Catherine de Médicis]] (1560)
* [[샹티이 성]] (1524)
* [[퐁텐블로 성]] (1528-1447)
* [[Château de Saint-Maur]] (1536)
* [[Château d'Anet]] (1536)
* [[Château de Saint-Germain-en-Laye]] (1539–1547) - château vieux et jardins
* [[빌랑드리 성]] (1536)
* [[Château d'Anet]] (1546–1559)
* [[Château de Montceaux]] (1549–1560)
* [[Château de Vallery]] (1550)
* [[Château de la Bastie d'Urfé]] (1551)
* [[Château de Dampierre-sur-Boutonne]] (1552–1600)
* [[Château de Saint-Germain-en-Laye]] (1539–1547) - château neuf et terrasses
* Château de [[Charleval (Eure)|Charleval]] (1560)
* [[튀일리궁]]과 [[튀일리 정원]] (1564–1593)
* [[Château de Verneuil-en-Halatte|Château de Verneuil]] (1565)
* [[Château d'Anet]] (1582) 정원 신축
* [[퐁텐블로 성]] (1594–1609) 클로드 몰레가 정원 신축
* 파리의 [[튀일리 정원]] (1599), [[클로드 몰레]], 드로름, 뒤페라가 설계
* 파리의 [[뤽상부르 정원]] (1612–1630)
* Jardin du [[château d'Ambleville]] (Reconstitution moderne commencée vers 1928)
 
== La Peinture ==
Voir : [[Liste de peintres français#XVIe&nbsp;siècle|Peintres français du {{s-|XVI}}]]
 
La [[peinture]] française est, en France davantage qu'en [[Italie]], portée par le mouvement d'édification des châteaux lancé par les princes. Ainsi le [[Connétable de France]] [[Anne de Montmorency (1493-1567)|Anne de Montmorency]], lorsqu'il fit bâtir sa plus grande demeure, le [[château d'Écouen]], engagea un grand nombre d'artistes, célèbres ou inconnus, pour créer des décorations intérieures Certains d'entre eux vinrent depuis l'[[Italie]] et furent rendus célèbres par leurs créations à [[Château d'Écouen|Écouen]]. Ainsi, toutes les cheminées du château sont peintes dans un style très italien, les murs comportent de larges frises et les sols sont en [[faïence]]s colorées.
 
De nombreux peintres italiens puis flamands sont engagés à la cour d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et de ses successeurs et participent à la décoration des demeures royales et des châteaux de la noblesse. Ces artistes créent une école de peinture inspirée du [[maniérisme]] italien tempéré appelée [[école de Fontainebleau]], rappelant le rôle décisif de ce chantier des rois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et [[Henri IV (roi de France)|Henri IV]] dans l'implantation et la diffusion du style [[Renaissance]] en [[France]]. Ses représentants les plus célèbres sont [[Rosso Fiorentino]], [[Le Primatice]] et [[Nicolò dell'Abbate]] sous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puis, sous [[Henri IV (roi de France)|Henri IV]], [[Ambroise Dubois]] et [[Toussaint Dubreuil]].
 
En [[France]], l'art du portrait peint était déjà connu et répandu depuis le milieu du {{s-|XV}}, notamment grâce à [[Jean Fouquet]] puis [[Jean Perréal]], mais il prend véritablement de l'ampleur au cours de la Renaissance, au {{s-|XVI}}, grâce à [[Pierre Dumonstier I|Pierre]] et [[Daniel Dumonstier]]. Les portraitistes attitrés du roi [[Jean Clouet]] et son fils [[François Clouet|François]], au style d'une grande précision et d'une grande finesse (dessins préparatoires réalisés avant l'exécution des portraits peints), perpétue le style du [[Rosso Fiorentino|Rosso]]. Ils influencent des portraitistes plus tardifs tels que [[Corneille de Lyon]] et [[François Quesnel]] alors qu'[[Antoine Caron]], ancien collaborateur du [[Le Primatice|Primatice]], évoque aussi bien les fêtes de la Cour des [[Maison capétienne de Valois|Valois]] que les violences des [[Guerres de Religion (France)|guerres civiles dites « de religion »]], marquées par le [[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ref name="Muchembled" />.
 
=== Les Italiens ===
==== Fiorentino Rosso (1494-1540) ====
<gallery mode="packed">
Casa vasari FI, salone, ritratti a, rosso fiorentino frontal view.jpg|Portrait posthume du [[Rosso Fiorentino]] par [[Giorgio Vasari]] (vers 1572, Casa Vasari, [[Florence]]).
Fontainebleau 041.jpg|Décor de peintures, de frises, de fresques et de modèles de [[Cuir découpé|cuirs découpés]] et de stucs de la [[Galerie François-Ier (château de Fontainebleau)|Galerie François 1세]].
Fontainebleau 047.jpg|Stuc représentant un jeune homme de la galeri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Fontainebleau 036.jpg|''Le Sacrifice'' de la galeri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du [[Rosso Fiorentino|Rosso]] à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1534-1539).
Fontainebleau Galerie Éléphant.JPG|Eléphant à fleurs de lys de la galeri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du [[Rosso Fiorentino|Rosso]] à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1534-1539).
Rosso fiorentino (attr.), bacco, venere e marte.jpg|''[[Bacchus]], [[Vénus (mythologie)|Vénus]] et l’[[Eros|Amour]]'' (vers 1531, [[musée du Luxembourg]]).
Rosso Fiorentino - Pietà - WGA20135.jpg|''La Pietà'' (entre 1537 et 1540, [[musée du Louvre]]).
</gallery>
Giovanni Battista di Iacopo (1495-1540) fut surnommé [[Rosso Fiorentino]], « le rouquin florentin », en raison de sa couleur de cheveux et de sa ville d’origine. Formé à [[Florence]] dans l’atelier d’[[Andrea del Sarto]], et très influencé par l’art de [[Michel-Ange|Michel- Ange]], il exerça une activité à [[Florence]], puis à [[Rome]] de 1524 à 1527, avant de revenir en [[Toscane]]. En 1530, alors qu'il se trouve à [[Venise]], invité par le dramaturge italien [[Pierre l'Arétin]], il a la chance d’être présenté à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qui, charmé, ne tarde pas à l'appeler en [[Royaume de France|France]]<ref name="italieaparis">{{Lien web | langue= fr | titre= L'école de Fontainebleau | url= http://www.italieaparis.net/ecolefontainebleau.php | site= [http://www.italieaparis.net italieaparis.net] | lieu= Paris, 28, rue Château Landon, 75010 | éditeur= la société DRI | date= | consulté le= juin 2017 }}.</ref>. Son arrivée à [[Paris]], en octobre 1530 va marquer un véritable tournant dans l'art français, par la pleine acceptation de la [[Renaissance]] dans tous les domaines artistiques. Il est avec [[le Primatice]] le créateur de l'[[école de Fontainebleau]]<ref>Jean-François Solnon, ''La Cour de France'', Fayard, 1987, 734 pages. Lire page 90</ref>.
 
En pleine [[Renaissance artistique|Renaissance]] française, le roi [[Maison capétienne de Valois|Valois]] est un admirateur de l'art italien. La [[cour de France]] va alors donner les moyens au [[Rosso Fiorentino|Rosso]] de développer réellement tous ses talents d’artiste de cour : peintre, dessinateur, concepteur de décors fixes et éphémères, et d’objets d’art<ref name="italieaparis" />… Sa Majesté est conquise par cet artiste cultivé et musicien. Elle le comble alors de largesses et lui confie la décoration du [[château de Fontainebleau]]. C'est ainsi que [[Rosso Fiorentino|le Rosso]] réunit autour de lui une équipe d’artistes italiens pour l’aider à la réalisation de décors .
 
Pendant près d'une décennie, [[Medardo Rosso|Le Rosso]] tout en créant des œuvres indépendantes dirige la décoration de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Plusieurs des ensembles et des œuvres qu’il a conçus ont disparu. On peut citer le ''pavillon de Pomone'', le ''pavillon des Poesles'', la ''galerie basse''. Mais c'est surtout la grande [[Galerie François-Ier (château de Fontainebleau)|galerie François 1세]] reliant l'ancien et le nouveau [[château de Fontainebleau]], réalisée principalement entre 1533 et 1537, qui demeure son chef-d’œuvre fait d'un décor orné de peintures, de frises, de [[fresque]]s et de modèles de [[Cuir découpé|Cuirs découpés]] et de [[stuc]]s<ref name="italieaparis" /> Un motif récurrent de la galerie est l'emblème animal du roi, la [[Salamandre (animal légendaire)|salamandre]]. [[Rosso Fiorentino|Le Rosso]] est récompensé par sa nomination de premier peintre du roi et de chanoine de la [[Sainte-Chapelle]]. L'artiste participe alors à la création d'une vaiselle somptuaire et crée pour le roi un [[Bâton cantoral|baton cantoral]] (sceptre) avec hampe fleurdelysée, surmontée d'un édicule à colonne portant en son centre une statuette de la [[Marie (mère de Jésus)|Vierge]]. De la dernière période de sa vie, mis à part les dessins préparatoires à l'attention des graveurs Antonio Fantuzzi, [[René Boyvin|Boyvin]] ou l'inconnu maître L.D, il ne reste que de rares peintures à caractère religieux qui nous soit conservée de sa période française, à l'exemple de ''la Pietà'' visible au [[musée du Louvre]]''<ref>[http://cartelfr.louvre.fr/cartelfr/visite?srv=car_not_frame&idNotice=14266&langue=fr Fiche de la ''Pietà''] sur le site du musée du Louvre.</ref>.''
 
La fin de l'artiste est obscure. L'artiste avare aurait accusé son ami fidèle, Francisco di Pellegrino d'avoir volé ses économies. Ce dernier soumis à la torture sauve son innocence. [[Rosso Fiorentino|Le Rosso]], désespéré d'avoir perdu son ami, se serait supprimé par empoisonnement à la fin de l'année 1540. La biographie rédigée par [[Giorgio Vasari]] qui s'appesantit sur cette fin tragique est aujourd'hui mise en doute.
 
[[Le Primatice]], son adjoint [[Fontainebleau|bellifontain]] depuis 1532 et de plus en plus son rival autoritaire et affiché, supprime après 1540 sous prétexte d'agrandissement ou de sa prédilection pour la sculpture en piédestal nombre d'œuvres décoratives du maître roux.
 
C’est l’Arétin, écrivain célèbre et influent, qui avait recommandé [[Rosso Fiorentino|le Rosso]] à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À [[Paris]], où on l’appellait le[[Rosso Fiorentino|maître Roux]], l’ascension sociale de l’artiste [[Florence|florentin]], à la fois peintre sculpteur et architecte, fut extrêmement rapide. Le roi lui assurait un salaire très élevé et, en 1532, le fit chanoine de la Sainte-Chapelle. À ce titre s’ajouta, cinq ans plus tard, le canonicat à Notre-Dame. Mais Rosso souffrait chroniquement d'une humeur instable; elle lui fut fatale le 14 novembre 1540, quand il mit fin à ses jours<ref name="italieaparis" />.
 
Par son influence, [[Rosso Fiorentino|le Rosso]] est le fondateur de la première [[école de Fontainebleau]] qui lance la Renaissance française dans l'art de la peinture<ref>Beauseigneur E, ''Rosso Fiorentino au château de Fontainebleau'', Dossier de l'art de l'art {{N°|184}}, avril 2011, {{p.}}92-95</ref>. Ce décorateur érudit, attiré par le bizarre et le spectaculaire, tout en racontant une histoire à plusieurs niveaux de lecture ou d'émotion, bouscule les genres établis et demeure une source d'évolution durable de l'art d'ornementation des cours princières du Nord de l'[[Europe]].
 
==== Francesco Primatice (1504-1570) ====
<gallery mode="packed">
Francesco Primaticcio 003.jpg|L'Enlèvement d'[[Hélène (mythologie)|Hélène]] (1530-1539, musée Bowes, Angleterre).
Francesco Primaticcio (navolger), Caritas, ca 1550-60 (Bonnefantenmuseum, Maastricht).jpg|''La Charité'', 1550-1560, musée Bonnefanten, [[Maastricht]]
Francesco Primaticcio - Dance of the Hours and three putti with cornucopiae - Google Art Project.jpg|''La Ronde des heures'', 1548, galerie d'Ulysse (Städel, [[Francfort-sur-le-Main]]).
Francesco Primaticcio 002.jpg|[[Ulysse]] et [[Pénélope]] (vers 1563, [[New York]]).
Primaticcio, Francesco – Holy Family with St Elizabeth and John the Baptist.jpg|''La Sainte Famille avec S<sup>te</sup> Elisabeth et {{St.}} Jean-Baptiste'', [[musée de l'Ermitage]].
Fontainebleau escalier roi.jpg|[[Alexandre le Grand|Alexandre]] domptant [[Bucéphale]] du [[Le Primatice|Primatice]], ancienne Chambre de la [[Anne de Pisseleu, duchesse d'Étampes|duchesse d'Étampes]]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1552).
Chaalis fresque.JPG|''Annonciation'', vers 1544, contre-façade de l'[[Abbaye de Chaalis]].
Chaalis fresque annonciation.JPG|L'ange de l'''[[Annonciation]]'' de l'[[Abbaye de Chaalis]] vers 1544.
Chaalis voute nef.JPG|''Les apôtres'', vers 1544, voûte de la nef de l'[[abbaye de Chaalis]].
Chaalis voute abside.JPG|''Les instruments de la passion'', voûtains du chœur, [[abbaye de Chaalis]] vers 1544.
</gallery>
[[파일:Francesco Primaticcio 001.jpg|왼쪽|섬네일|300x300px|''[[Alexandre le Grand|Alexandre]] domptant [[Bucéphale]]'', vers 1550, [[château de Fontainebleau]]).]]
 
'''Francesco Primaticcio''' dit Primatice commence son apprentissage à [[Bologne]], sa ville natale, et c'est auprès d'un élève de [[Raphaël (peintre)|Raphaël]], Bagnacavallo, qu'il reçoit sa première formation, puis à [[Mantoue]], près d'un disciple de [[Raphaël (peintre)|Raphaël]], [[Giulio Romano|Jules Romain]], qui réalise pour Frédéric Gonzague l'un des édifices majeurs de l'époque, le'' [[Palais Te|palais du Té]].'' Dans un décor qui envahit les murs et les voûtes, toutes les ressources du maniérisme sont mises en œuvre pour célébrer l'Amour en évoquant les amours des dieux ou pour suggérer la terreur par la représentation d'affrontements titanesques.
 
[[Le Primatice]] acquiert près de lui l'aptitude aux transpositions fabuleuses et le sens d'un art décoratif complet où les ornements de [[stuc]] prennent une importance nouvelle. Il devient expert en ce domaine, mais c'est en [[Royaume de France|France]], au [[château de Fontainebleau]], qu'il pourra donner sa mesure.
 
Il y arrive en 1532, appelé par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qui veut faire de sa demeure favorite un centre d'art vivant et prestigieux. Jusqu'à sa mort, Primatice consacrera l'essentiel de son activité à cette ambitieuse entreprise. Dans un premier temps, il collabore avec un autre maître italien, le [[Rosso Fiorentino|Rosso fiorentino]], qui assure la direction des travaux et impose son style : une version exacerbée du [[Maniérisme|maniérisme florentin]].
 
L'œuvre du [[Rosso Fiorentino|Rosso]] à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comme celle du [[Le Primatice|Primatice]], a été en grande partie détruite ou défigurée. Pourtant, la restauration de la [[Galerie François-Ier (château de Fontainebleau)|Galerie François 1세,]] au {{s mini-|XX}} permet d'apprécier la cohérence d'un style ornemental où le caprice de l'invention, l'acuité des formes et des rythmes s'expriment également dans les zones peintes et dans les stucs, aux reliefs accentués, aux profils élégants, aux motifs étonnamment diversifiés<ref name="presse4">Dossier de presse de l'exposition ''L’Italie à la cour de France - Primatice, maître de Fontainebleau, 1504 -1570'', Paris, musée du Louvre, 25 septembre 2004 - 3 janvier 2005 (les descriptions et compléments en sont repris quasi intégralement)</ref>.
 
[[Le Primatice]] remplace [[Rosso Fiorentino|le Rosso]] en 1540, à la mort de ce dernier, à la tête des entreprises royales. Il règne en maître sur la pléiade d'artistes et d'ouvriers travaillant aux décors intérieurs du château, aux constructions nouvelles, à l'aménagement des jardins. Il surveille les ateliers de tapisserie et ceux des fondeurs qui exécutent en bronze les statues<ref>[[Carmelo Occhipinti]], ''Primaticcio e l'arte di gettare le statue di bronzo. Il mito della 'seconda Roma' nella Francia del XVI secolo'', Roma 2010</ref>.
 
Les deux missions en [[Italie]] que lui avait confiées le roi sont pour lui l'occasion de reprendre contact avec l'art de la péninsule et d'en connaître les plus récentes formulations, qu'il adapte avec aisance à sa manière personnelle. En [[1541]], [[Hippolyte d'Este]] lui commande la réalisation de [[fresque]]s pour les murs de sa chapelle à l'[[Abbaye de Chaalis]]<ref>{{harvsp|Babelon|2006|p=?}}</ref>{{,}}<ref>{{Lien web|titre=Description des fresques|url=http://www.chaalis.fr/descript.htm|site=Site du service pédagogique du domaine de Chaalis|consulté le=29 août 2010}}</ref>. À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dans la ''galerie d'[[Ulysse]]'' (aujourd'hui détruite), le poème d'[[Homère]] y était illustré en cinquante-huit panneaux répartis entre les fenêtres, et le plafond comportait quatre-vingt-treize sujets [[Mythologie|mythologiques]] sur un fond de [[grotesque]]s<ref name="presse4" />.
 
En même temps qu'il réalise la ''galerie d'Ulysse'', [[le Primatice]] donne les projets des compositions exaltant l’Amour, l’Harmonie et la Concorde, destinées à la ''salle de bal'', exécutées par [[Nicolò dell'Abbate]]<ref name="presse4" />. L'ordonnance de la pièce est de [[Philibert Delorme]] qui, sous la règne de [[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assume la direction des Bâtiments du roi.
 
L'avènement de [[François II (roi de France)|François II]] (1559) rend au [[Le Primatice|Primatice]] toutes ses prérogatives: il s'y ajoute le'' monument du cœur de Henri II'', le tombeau du roi, l'ensemble des sculptures destinées à la ''[[rotonde des Valois]]'' (aujourd'hui détruite) que [[Catherine de Médicis]] fait élever à [[Basilique Saint-Denis|Saint-Denis]] sur les plans [[Le Primatice|du Primatice]].
 
Le génie multiforme du Primatice a réalisé le rêve d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en donnant à l'[[école de Fontainebleau]], non l'éclat éphémère d'un chantier royal temporairement privilégié, mais le rayonnement d'un mouvement novateur qui a marqué en [[France]] de façon décisive l'évolution de la peinture et des arts décoratifs.
 
Primatice redevient grand maitre des œuvres du roi après la mort de [[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À Dampierre, à l'origine manoir devenu princier au {{s|XVI}}, il fera construire dans le pavillon d'angle qui jouxte la tour un véritable sauna, exemple typique de ce goût à l'époque pour un retour à un mode de vie à l'antique.
 
==== Nicolò dell'Abbate (1509/1512 – 1571) ====
<gallery mode="packed">
Fontainebleau (77) Château Salle de Bal 04.JPG|[[Apollon]] et le [[Mont Parnasse|Parnasse]], 1552/1556, [[Château de Fontainebleau|salle de bal de Fontainebleau]].
Fontainebleau 055.jpg|[[Guerre de Troie|La guerre de Troie]] sur la [[tribune (architecture)|tribune]] des musiciens, 1552/1556, [[Château de Fontainebleau|Salle de Bal de Fontainebleau]].
Abbate - Rape of Proserpine hi-res.jpg|Le Rapt de Proserpine, 1552-1570, huile sur toile, [[musée du Louvre]].
Abbate - Orpheus and Eurydice.jpg|[[Orphée]] et [[Eurydice]], 1552-1571, [[National Gallery]], [[Londres]].
Niccolò dell' Abbate 003.jpg|[[Moïse]] sauvé des eaux, vers 1560, huile sur toile, [[musée du Louvre]].
Niccolò dell'abate, vagliatura del grano, 1560-1570 ca. 02.JPG|Le vannage du grain, peut-être dû à Giulio Camillo dell'Abbate, fils de Nicolò, 1560-1570, [[musée du Louvre]].
Écouen (95), château, étage, grande salle du Roi 3.jpg|Cheminée de la [[Victoire (allégorie)|Victoire]], 1558-1560, [[château d'Écouen]].
Esau Hunting apartment of Anne de Montmorency Château Écouen.jpg|[[Esaü]] chassant, vers 1552, [[château d'Écouen]].
Apollo, Pan and a Putto Blowing a Horn LACMA M.88.91.199d.jpg|Gravure du projet pour la Galerie d'[[Ulysse]], 1560, [[musée d'art du comté de Los Angeles]].
</gallery>
[[파일:Niccolò dell'abate, vagliatura del grano, 1560-1570 ca. 03.JPG|왼쪽|섬네일|300x300px|''Le vannage du grain'', Giulio Camillo dell'Abbate ?, fils de [[Nicolò dell'Abbate|Nicolò]], 1560-1570, {{Dunité|98|141|cm}}, [[musée du Louvre]].]]
[[Nicolò dell'Abbate]] était un artiste né à [[Modène]], près de [[Bologne]], et qui devint très célèbre en [[France]], jouant un rôle fondamental dans la [[École de Fontainebleau|première école de Fontainebleau]]. Cette école fut créée par des artistes italiens actifs dans le [[château de Fontainebleau]], où ils ont élaboré un style qui a réverbéré son influence dans l'art français et de l'[[Europe]] du Nord également.
 
Toute la famille {{page h'|Dell'Abbate|dell'Abbate}}, de père en fils, fut vouée aux arts. On cite avec honneur parmi les peintres modénois, son père Jean, son frère Pierre-Paul, son fils Jules-Camille, son petit-fils [[Ercole dell'Abate|Hercule]], et son arrière-petit-fils Pierre-Paul. Formé à [[Modène]], il fit son apprentissage dans l'atelier d'[[Alberto Fontana]] et fut un des élèves d'[[Antonio Begarelli]].
 
En 1540 il entre au service des seigneurs de [[Scandiano]], à {{unité|27|km}} de [[Modène]]. Entre 1540 et 1543, il décora également la Rocca des princes Meli Lupi à [[Soragna]] au nord-ouest de [[Parme]]. Il travailla ensuite à [[Bologne]] entre 1548 et 1552, au service d'une clientèle fortunée d'ecclésiastiques et de banquiers<ref name="Connaissances">{{article|langue=français|titre=De Modène à Bologne sur les pas de Nicolò dell’Abate|périodique=Connaissance des Arts|volume=|numéro=623|jour=|mois=janvier|année=2005|lire en ligne=|pages=80|auteur=Christophe Castandet}}</ref>.
 
À [[Bologne]], son style subit l'influence du [[Le Corrège|Corrège]] et du [[Francesco Mazzola|Parmesan]]. Ses nombreux portraits évoquent ceux de [[Pontormo]].
 
En 1552, Niccolò dell' Abate est invité en [[France]] au service d'[[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ref name="Louvre2">{{ouvrage|langue=français|prénom1=Vincent|nom1=Pomarède|titre=1001 peintures au Louvre|sous-titre=De l’Antiquité au {{s-|XIX}}|volume=|passage=p.317|éditeur=Musée du Louvre Editions|année=2005|pages totales=331|isbn=2-35031-032-9|lire en ligne=}}</ref> (on l'appelle alors souvent Nicolas Labbé). Au [[château de Fontainebleau]], il collabore à la décoration de l'édifice royal, sous la supervision du [[Le Primatice|Primatice]] (1504 – 1570), un autre artiste fondamental de l'[[École de Fontainebleau]], ainsi que le peintre florentin [[Rosso Fiorentino|Rosso]] (1494 – 1540). Deux ans plus tard, il donne le'' dessin du projet de décor en l'honneur du Connétable [[Anne de Montmorency (1493-1567)|Anne de Montmorency]]. ''
 
À [[Paris]], il exécute des [[fresque]]s aux plafond de l'[[Hôtel de Soubise|Hôtel de Guise]] (maintenant disparues), d'après les dessins du [[Le Primatice|Primatice]]. L'artiste reçoit alors beaucoup de commandes de caractère privé, telles que de petits tableaux portables de sujets [[Mythologie|mythologiques]] insérés dans des paysages. Une bonne partie de sa production artistique est ainsi consacrée au genre des apparats décoratifs éphémères, réalisés à l'occasion de moments importants qui marquaient la vie de la cour royale. Le principal exemple reste le cycle de décorations réalisées pour l'entrée triomphale à [[Paris]] de [[Charles IX (roi de France)|Charles IX]] et de sa femme [[Élisabeth d'Autriche (1554-1592)|Élisabeth d'Autriche]] en 1571, l'année de la mort de [[Nicolò dell'Abbate]] en [[France]].
 
L'héritage du peintre [[Émilie-Romagne|émilien]] est constitué surtout par ses paysages qui forment le décor de scènes [[Mythologie|mythologiques]], motifs qui inspireront les artistes français comme [[Claude Gellée|Claude Lorrain]] (1600 – 1682) et [[Nicolas Poussin]] (1594 – 1665).
 
=== Les Flamands ===
==== 장 클루에 (자네; 1475/85-1540) ====
<gallery mode="nolines">
Guillaume Budé by Jean Clouet.jpg|''[[기욤 뷔데]]'' (1536년 경),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Marguerite d'Angoulême by Jean Clouet.jpg|''[[마르그리트 당굴렘]]'' (1530년 경), [[워커 아트 갤러리]].
Claude of Lorraine.JPG|''[[클로드 드 로렌|클로드 드 로렌, 귀즈 공작]]'', [[Palazzo Pitti]] de [[Florence (ville)|Florence]].
Jean Clouet - Portrait of a Banker.jpg|''은행가의 초상'' (1522), [[생루이 미술관]]
Clouet Renee Duchess of Ferrara.jpg|[[르네 드 프랑스]], 페라라 공작 부인 (1520년 경, [[샹티이]]의 [[콩데 미술관]])
Cardinal de Lorraine.jpg|''[[샤를 드 로렌 (1524-1574)|샤를 드 로렌]] (1555, [[샹티이]]의 [[콩데 미술관]])
Guillaume Gouffier, Seigneur de Bonnivet.jpg|[[기욤 구피예 드 보니베]] (1516, [[샹티이]]의 [[콩데 미술관]])
Anne de Montmorency (1530).jpg|[[안 드 몽모랑시 (1493-1567)|안 드 몽모랑시]] (1530, [[샹티이]]의 [[콩데 미술관]])
</gallery>
[[파일:Jean_Clouet_001.jpg|왼쪽|섬네일|''[[프랑수아 1세 (프랑스)|프랑수아 1세]]'' (1530년 경, [[루브르 박물관]])|227x227px]]
 
소(小) 장 클루에([[1480년]] [[브뤼셀]]에서 태어나 [[1541년]] [[파리]]에서 사망)는 [[16세기]] [[부르고뉴령 네덜란드]] 출신의 [[초상화]] [[프랑스의 화가 목록|화가]]이다. 그의 초창기 작품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Peintre officiel d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Jean Clouet]] figure parmi les ''valets de chambre du roi'' à partir de 1516, sous les ordres de ses confrères [[Jean Perréal]] et [[Jean Bourdichon]]. D'origine [[Flandre (Belgique)|flamande]], il apporta un nouveau style à la peinture de portraits d'apparat en pratiquant, outre la [[Miniature (enluminure)|miniature]] traditionnelle (commentaires de la Guerre gallique), le tableau de chevalet exécuté d'après un dessin au crayon, selon le goût des peintres du Nord.
 
Il est devenu populaire très tôt au point qu'on lui a attribué presque tous les portraits français du début du {{XVIe}} siècle. Des deux seuls tableaux de lui attestés par des textes, l'un n'est connu que par une gravure (''[[Oronce Fine|Oronce Finé]]''), l'autre par une réplique conservée au musée de [[Versailles]] (''[[Guillaume Budé]]'').
 
Mais la célébrité de [[Jean Clouet]] vient du groupe de ''130 dessins'' du [[Musée Condé|musée Condé à Chantilly]]. Les portraits de la famille royale sont généralement attribués au peintre en titre, et par conséquent les tableaux eux-mêmes, comme le célèbre portrait d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au [[musée du Louvre]] (vers 1527), dont l'attribution à [[Jean Clouet]] remonte à une tradition ancienne et sûre.
 
La réputation de [[Jean Clouet]] n'est sans doute pas usurpée et fut reconnue de tout temps quoiqu'on ait vite confondu son œuvre et celle de son fils '''François'''. [[Jean Clouet]] a réellement introduit dans l'art du portrait français une finesse nouvelle et fondé en fait une école de portraitistes officiels qui, par [[Robert Nanteuil]] et [[Hyacinthe Rigaud]], devait assurer la suprématie française dans ce domaine pendant plus de deux siècles.
 
==== Corneille de Lyon (1510-1575) ====
<gallery mode="nolines">
Corneille de Lyon - René de Batarnay, Comte du Bouchage - Google Art Project.jpg|''René de Batarnay, Comte du Bouchage'', [[#Œuvres|DdG]] {{N°|80}}, [[Houston]], [[Musée des beaux-arts de Houston|musée des beaux-arts]], Inv. 44.538.
Lyon Antoine de Bourbon.jpg|''Portrait d'[[Antoine de Bourbon]]'', 1548, [[château royal de Varsovie]]
Attributed to Corneille de Lyon - Mary of Guise, 1515 - 1560. Queen of James V - Google Art Project.jpg|''[[Marie de Guise (1515-1560)|Marie de Guise]]'', vers 1537, [[Scottish National Portrait Gallery]]
Corneille de Lyon - A Young Lady - WGA05240.jpg|''[[Jacqueline de Rohan-Gyé|Jacqueline de Rohan]]'', [[#Œuvres|DdG]] {{N°|25}}, [[Berlin]], [[Gemäldegalerie (Berlin)|Gemäldegalerie]], Inv. 2165.
Corneille de Lyon - Isabeau de Savoie, Comtesse du Bouchage - Google Art Project.jpg|''La comtesse du Bouchage'', [[#Œuvres|DdG]] {{N°|140}}, [[Houston]], [[Musée des beaux-arts de Houston|musée des beaux-arts]]
Corneille de Lyon - Marie de Batarnay - Google Art Project.jpg|''Marie de Batarnay'', [[#Œuvres|DdG]] {{N°|141}}, [[Houston]], [[Musée des beaux-arts de Houston|musée des beaux-arts]]
Corneille de Lyon - Portrait of a Woman - WGA05238.jpg|''Inconnue'', [[#Œuvres|DdG]] {{N°|14}}, Saint-Pétersbourg, [[musée de l'Ermitage]].
Corneille - Inconnue - Musee art decoratif - Lyon - MAD 3436.jpeg|Portrait d'une inconnue, 1536 ?, Lyon, [[Musée des Tissus et des Arts décoratifs|musée des arts décoratifs]].
Corneille de Lyon - Anne de Pisseleu, duchesse d'Etampes (huile sur bois, 1535-1540).jpg|''Anne de Pisseleu, duchesse d'Étampes'', [[#Œuvres|DdG]] {{N°|28}}, 1535-1540, [[New York]], [[Metropolitan Museum of Art]].
Corneille de Lyon - Béatrix Pacheco, comtesse d'Entremont (huile sur bois, 1533).jpg|''Béatrix Pacheco, comtesse d'Entremont'' (1533, [[château de Versail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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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orneille_de_Lyon_-_Pierre_Aymeric.jpg|왼쪽|섬네일|''Pierre Aymeric, marchand de Saint-Flour'', 1533, [[musée du Louvre]].]]
Corneille de Lyon ou ''Corneille de la Haye'' (né entre 1500 et 1510 à [[La Haye]] et mort en 1575 à [[Lyon]]) est un [[Peinture de la Renaissance|peintre]] [[Roi de France|royal]] de [[portrait]] [[France|franco]]-[[Pays-Bas|hollandais]] du {{s-|XVI}}.
 
Quoiqu'il soit connu à son époque sous le nom de Corneille de la Haye, on ne sait rien de sa jeunesse hollandaise et il arrive à Lyon au plus tard en [[1533]]. Réalisant dès [[1536]] les portraits de plusieurs membres de la famille royale, il obtient le titre de peintre royal en 1541. Malgré cette fonction, il reste dans la [[Lyon|cité rhodanienne]] tout au long de sa vie. En épousant la fille d'un imprimeur de renom, il s'insère dans la notabilité de la ville, et acquiert une solide position sociale, vivant dans le quartier des imprimeurs, près de [[Église Notre-Dame-de-Confort|Notre-Dame-de-Confort]].
 
Il vit de son métier de peintre, et semble coopérer avec d'autres artistes du quartier (peintres ou graveurs). Son atelier conserve une galerie des copies des tableaux des personnages les plus célèbres dont il a fait le portrait. Cela permet aux clients d'en acquérir une nouvelle copie, ou les incite à se faire faire le portrait par un peintre renommé. Ses affaires semblent prospères jusqu'aux [[Guerres de religion (France)|guerres de religion]], durant lesquelles, malgré son attachement à la [[Protestantisme|religion réformée]], il ne semble pas victime d'agression ou de spoliation. Il se convertit sous la contrainte à la [[Catholicisme|religion catholique]] en 1569.
 
L'art de Corneille du petit portrait sans décor est novateur pour l'époque. Il acquiert un grand prestige au point que les tableaux de ce style finissent par être désigné comme des « Corneilles ». Travaillant à l'[[Peinture à l'huile|huile]] sur du bois, il concentre son travail sur le visage et le buste. Corneille est très précis dans la composition des pilosités, cheveux, barbes, qu'il trace quelquefois presque poil à poil. Ses modèles portent rarement de lourds habits décorés, son style reste très sobre. Le fond de ses tableaux est toujours uni, sans décor et il semble travailler sans dessin préparatoire.
 
Après la [[Renaissance]], la renommée de Corneille s'efface, sa descendance ne prenant pas le relais pour la réalisation de petits portraits. Il est redécouvert au {{s-|XVII}} par [[François Roger de Gaignières]]. Tombant ensuite encore dans l'oubli, son nom ressurgit au {{s-|XIX}}, à partir de citations dans les textes de l'époque. L'extrême difficulté pour trouver des œuvres de références entraînent de sérieux problèmes d'attribution et de reconstitution de son corpus artistique. Plusieurs méprises et confusions sont faites par les [[historien]]s de l'art et les amateurs. La première œuvre attribuable sans ambiguïté est découverte en 1962. Plusieurs travaux reprennent les conclusions antérieures et la première synthèse sur l'artiste est réalisée par Anne Dubois de Groër en 1996.
 
==== Noël Bellemare (actif entre 1512 et 1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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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ël Bellemare.- François Ier chargeant contre les Suisses à Marignan, 14-09-1515.png|Le 14 septembre 1515 :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chargeant contre les Suisses à [[Bataille de Marignan|Marignan]] (vers 1529-1530,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BnF]], fol. 1 v°).
Allégorie de la régence de Louise de Savoie - Gestes de Blanche de Castille BNF Fr5715.jpg|Allégorie de la régence de [[Louise de Savoie]] (vers 1520-1522,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BnF]], Fr5715).
Histoire universelle de Diodore de Sicile - Frontispice - Musée Condé Ms721.jpg|Histoire universelle de [[Diodore de Sicile]] : ''Antoine Macaut devant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1534, [[musée Condé]] de [[Chantilly]]).
Master of the Getty Epistles (French, active about 1528 - about 1549) - Saint Paul - Google Art Project.jpg|Épîtres du Getty, [[Paul de Tarse|Saint Paul]] (1520-1530, [[Getty Center]]).
Master of the Getty Epistles (French, active about 1528 - about 1549) - Saint Jerome - Google Art Project.jpg|''[[Jérôme de Stridon|Saint Jérome]]'' (1520-1530, [[Getty Center]]).
P1010346 Paris Ier Eglise Saint-Germain l'Auxerrois Rose méridionnale-La Pentecôte reductwk.JPG|Vitrail de la [[Pentecôte]] de l'[[église Saint-Germain-l'Auxerrois de Paris]], [[Jean Chastellain]], début {{s mini-|XVI}} s.
P1010347 Paris Ier Eglise Saint-Germain l'Auxerrois Verrière transept droit incrédulité de Saint-Thomas reductwk.JPG| ''L'incrédulité de [[Thomas (apôtre)|Saaint Thomas]]'', début du {{s mini-|XVI}} s., [[Jean Chastellain]], [[église Saint-Germain-l'Auxerrois de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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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ël Bellemare]] est un peintre et enlumineur français d'origine flamande, actif entre 1512 et 1546, à [[Anvers]] puis à Paris. On lui attribue des cartons de vitraux ainsi que des [[Miniature (enluminure)|miniatures]]. Une partie de ses enluminures ont été regroupées sous le nom de convention de '''Maître des Épîtres Getty''', sans doute à la tête d'un atelier désigné par ailleurs sous le nom d'Atelier des années 1520.
 
Noël Bellemare est le fils d'un Anversois et d'une Parisienne. Sa présence est attestée à Anvers en 1512, mais on retrouve sa trace dès 1515 à Paris où il termine et achève sa carrière. Il est installé dans la ville en tant que peintre et enlumineur sur le [[pont Notre-Dame]], aux côtés d'autres artistes et libraires<ref name="Louvre3">''Les Enluminures du Louvre'', {{p.|246}}</ref>.
 
Les archives documentent plusieurs commandes officielles à [[Paris]] : il peint le plafond de l'[[Hôtel-Dieu de Paris|hôtel-Dieu]] en 1515, il décore l'entrée du [[pont Notre-Dame]] en 1531 pour l'entrée d'[[Éléonore de Habsbourg|Éléonore d'Autriche]] en 1531, un décor du [[palais du Louvre]] en collaboration avec Matteo del Nassaro pour la venue de [[Charles Quint]] en 1540. Il réalise aussi des dorures au [[château de Fontainebleau]]<ref name="Louvre3" />. Il est mentionné en 1536 comme peintre-enlumineur juré<ref>Leproux, 2001</ref>.
 
Les premières œuvres du peintre sont influencées par le [[maniérisme anversois]] ainsi que par la gravure d'[[Albrecht Dürer]]. Par la suite, s'y substitue une influence des peintures de [[Raphaël (peintre)|Raphaël]] ainsi que de [[Giulio Romano]]. Cette influence lui vient sans doute de la fréquentation de l'[[École de Fontainebleau]] qu'il côtoie en participant aux décors du château<ref>Leproux, 2001, {{p.|112}}</ref>.
 
Une seule œuvre est réellement attestée par les sources de la main de Noël Bellemare : il s'agit du carton d'un vitrail de la [[Pentecôte]] de l'église [[Église Saint-Germain-l'Auxerrois de Paris|Saint-Germain-l'Auxerrois]] de [[Paris]]. Par analogie et comparaison stylistique, un ensemble d'enluminures et de cartons de vitraux lui sont attribués par l'historien de l'art [[Guy-Michel Leproux]].
 
Le corpus des [[enluminure]]s qui lui sont attribuées a longtemps été désigné sous le nom de convention de [[Noël Bellemare|Maître des Épîtres Getty]]. Ces œuvres ont aussi été regroupées un temps par l'historienne de l'art américaine [[Myra Orth]] dans un ensemble plus large de 25 manuscrits et sous le nom d'Atelier des années 1520<ref>{{article|prénom1=Myra D.|nom1=Orth|titre=French Renaissance Manuscripts: The 1520s Hours Workshop and the Master of the Getty Epistles|périodique=The J. Paul Getty Museum Journal|volume=16|année=1988|pages=33-60}}</ref>. Noël Bellemare pourrait en avoir été le chef. Parmi elles, les miniatures attribuées au Maître des Heures Doheny pourraient correspondre à une période plus ancienne du même peintre.
 
Enfin, certaines des miniatures du Maître des Épîtres Getty sont postérieures à sa mort : il semble que ce même atelier a perduré quelque temps après sa disparition<ref name="Louvre3" />.
 
==== Grégoire Guérard (actif vers 1518-1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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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 de saint Jérôme.jpg|Vie de saint Jérôme (1512-1530, [[musée municipal de Bourg-en-Bresse]]).
The capture of Christ mg 1677.jpg|L'arrestation du Christ (vers 1520, [[musée des beaux-arts de Dij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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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égoire Guérard]] est un peintre originaire des [[Pays-Bas]], établi à [[Tournus]] et actif en [[Bourgogne (ancienne région administrative)|Bourgogne]] entre 1512 et 1530, dans la région d’[[Autun]], de [[Chalon-sur-Saône]] et de [[Bourg-en-Bresse]].
 
C'est un artiste formé dans les [[Pays-Bas]] septentrionaux et dont la manière semble redevable d’un séjour en [[Italie]] dans les années 1515 et 1518
 
Selon les sources, il a fourni un triptyque pour l’église des Carmes de [[Chalon-sur-Saône|Chalon]], un autre pour l’église de Saint-Laurent-lès-Chalon, travaillé au [[château de Brancion]] et à celui de [[Château de Balleure|Balleure]] pour Claude de Saint-Julien de Balleure, dont le fils Pierre loue les « beaux tableaux, de singuliers et exquis ouvrage, faicts de la divinement docte main de l’excellent peintre Guererd Gregoire Hollandois compatriote et parent d’[[Érasme|Érasme de Rotterdam]] ».
 
On a récemment attribué à Grégoire Guérard une douzaine de panneaux datés entre 1512 et 1530, conservés, à quelques exceptions près, en [[Bourgogne (ancienne région administrative)|Bourgogne]] du Sud, [[Bresse]] ou [[Franche-Comté]]. L’élément majeur de cet ensemble est le Triptyque de l’Eucharistie à [[Autun]] (1515), et au [[Musée des beaux-arts de Dijon|musée de Dijon]], L’Arrestation du Christ et La Présentation au Temple de [[Dijon]] (1521) en font partie.
 
==== Bartholomeus P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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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ter of the Dinteville Family - Moses and Aaron before Pharaoh-An Allegory of the Dinteville Family', oil on wood, mid 16th century.jpg|[[Moïse]] et Aaron devant le Pharaon (1537, [[Metropolitan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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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ire de [[Haarlem]], [[Bartholomeus]] Pons est documenté précisément en 1518 dans l’atelier de Grégoire Guérard à [[Tournus]]. On peut aujourd’hui l’identifier au '''Maître de Dinteville''' (auteur du retable de la Légende de sainte Eugénie à [[Varzy]]).
 
==== Godefroy le Batave (1515—1526) ====
{{article détaillé|Godefroy le Bat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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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764-folio26recto - Brutus dirige sa flotte contre Vannes.png|[[Brutus de Bretagne|Brutus]] dirige sa flotte contre [[Vannes]] (vers 1520, [[musée Condé]] de [[Chantilly]]).
Ms764-folio23recto - César chez les Vénètes.png|[[Jules César|César]] chez les [[Vénètes]] (vers 1520, [[musée Condé]] de [[Chantilly]]).
Ms764-folio21 - Les otages des Vénètes (manuscrit de 1520).png|Les otages des [[Vénètes]] (vers 1520, [[musée Condé]] de [[Chantilly]]).
Ms764-folio34recto - Liber Tertius Caesaris - La Vengeance de César contre le Sénat de Vannes.png|La Vengeance de [[Jules César|César]] contre le Sénat de [[Vannes]] (vers 1520, [[musée Condé]] de [[Chantilly]]).
Commentaire des guerres galliques - Harley 6205 f3.jpg|Portraits d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et de [[Jules César]] (1519-1520, [[British Library]] à [[Lond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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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efroy le Batave]] est un peintre/enlumineur originaire des [[Pays-Bas]] septentrionaux actif en France. On le connaît seulement par son activité à la cour d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Son nom vient d'une inscription latine l'identifiant comme pictoris batavi dans le {{3e}} volume de son travail le mieux connu, les ''Commentaires de la Guerre française'' (1520, [[musée Condé]], [[Chantilly]]). Il s'y est également signé Godefroy, signature que l'on retrouve dans les ''Triomphes de Petrarque'' (vers 1524, [[Bibliothèque de l'Arsenal]], [[Paris]]). Les ''Commentaires de la Guerre française'' (1520, [[musée Condé]], [[Chantilly]]), le ''Dominus illuminatio mea'' (1516, [[musée Condé]], [[Chantilly]]) et la ''Vie de Magdalena'' (1517, [[musée Condé]], [[Chantilly]]) ont été illuminés sous la surveillance directe de leur auteur Franciscain, François Du Moulin ou Demoulins (fl 1502-24), en vue de leur présentation au Roi et à sa mère [[Louise de Savoie]], Comtesse d'Angoulême (1476-1531).
 
Les manuscrits vernaculaires, minuscules et personnalisés fournissent un aperçu de l'art de cour et du goût français dans les premières années de la Renaissance.
 
=== Les Français ===
==== Jean Cousin : le père (1490 env.-env. 1560) et le fils (1522 env.-env. 1594) ====
[[파일:Jean_Cousin_the_Elder,_Eva_Prima_Pandora.jpg|왼쪽|섬네일|''Eva prima Pandora'' par [[Jean Cousin l'Ancien]] ([[1549]], bois, {{Dunité|97,5|150|cm}}, [[musée du Louvre]], [[Paris]]).]]
[[Jean Cousin l'Ancien]] ([[Soucy (Yonne)|Soucy]], près de [[Sens (Yonne)|Sens]], vers [[1490]] ou [[1500]] - [[Paris]], après [[1560]]), est appelé également le Père, ou le Vieux pour le distinguer de son fils également appelé [[Jean Cousin le Jeune|Jean Cousin]]. Cet artiste est non seulement peintre, dessinateur et décorateur mais il est également graveur. Jean Cousin l'Ancien représente avec [[Jean Clouet]], le principal peintre français du {{s-|XVI}}. Surnommé le « [[Michel-Ange]] français »<ref>{{Ouvrage | langue = fr | auteur1 = [[Henri Zerner]] | titre= L'art de la Renaissance en France - L'invention du classicisme | passage= | lieu= Paris | éditeur= Flammarion | année= 04 oct. 1996 | pages totales= 414 | format livre= {{tunité|2,85|2,24|0,35|cm}} | isbn=978-2080106865 | lire en ligne= }}.</ref>, son tableau ''[[Eva prima Pandora]]'' conservé au [[Musée du Louvre|Louvre]] reste son œuvre la plus célèbre.
 
Sa vie est assez peu connue, et de nombreuses œuvres ne lui sont qu'attribuées, parfois exécutées plus probablement par son fils Jean Cousin le Jeune avec qui il est souvent confondu. Un autre sculpteur, non apparenté, porte également le même nom.
 
C'est dans sa ville natale de [[Sens (Yonne)|Sens]], en 1526, que Jean Cousin le Père commence sa carrière en tant que [[Géomètre-expert|géomètre]], y poursuivant son activité jusqu'en 1540. Après avoir réalisé des [[Carton (art)|cartons]] pour les [[Vitrail|vitraux]] de la [[Cathédrale Saint-Étienne de Sens|cathédrale de Sens]] et un [[retable]] pour l'[[abbaye de Vauluisant]] en 1530, Jean Cousin le Père s'installe vers 1540 à [[Paris]] où il exécute des œuvres importantes<ref name="Grandin">{{Lien web | langue= fr | auteur1= Michèle Grandin | titre= Cousin Jean, le père (1490 env.-env. 1560) & le fils (1522 env.-env. 1594) | url= http://www.universalis.fr/encyclopedie/jean-cousin/|site=Encyclopædia Universalis [en ligne] | date= | consulté le= 26 juin 2017 }}.</ref>.
 
[[파일:Jean Cousin le jugement dernier.jpg|섬네일|오른쪽|[[Jugement dernier|Le jugement dernier]]. Seule peinture attribuée avec certitude à [[Jean Cousin le Jeune|Jean Cousin le fils]] (1585, [[musée du Louvre]]).]]
 
En 1541, on lui commande les cartons pour les [[tapisserie]]s de la ''Vie de sainte Geneviève'' et en 1543, il réalise pour le [[Claude de Longwy de Givry|cardinal de Givry]] les huit [[Carton (art)|cartons]] de l'''Histoire de saint Mammès''. Ces [[tapisserie]]s, qui devaient décorer le chœur de la [[Cathédrale Saint-Mammès de Langres|cathédrale de Langres]], ont été exécutées par des lissiers parisiens. C'est alors qu'en 1549, il collabore à l'entrée triomphale du roi [[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à [[Paris]]<ref name="Grandin" />.
 
Il travaille également pour des verriers, et exécute les cartons des vitraux de la [[Chapelle Saint-Éloi (Paris)|chapelle de l'hôpital des Orfèvres]], un ''Calvaire'' pour l'[[Couvent des Jacobins (rue Saint-Jacques)|église des Jacobins de Paris]], divers vitraux pour l'[[Église Saint-Gervais-Saint-Protais (Paris)|église Saint-Gervais]] (''Le Jugement de Salomon'', ''Le martyre de Saint Laurent'', ''La samaritaine conversant avec le Christ'', et ''La guérison du paralytique''), l'église de Moret, celles de Saint-Patrice et de [[Église Saint-Godard de Rouen|Saint-Godard]] à [[Rouen]]<ref>Louis-Gabriel Michaud dir., ''Biographie universelle, ancienne ou moderne'', t.9, Paris, 1855, {{p.|391}}.</ref> ainsi que pour le [[château de Vincennes]] (''L'Approche du Jugement dernier'', ''D'après l'Apocalypse'', ''L'Annonciation de la Sainte Vierge'') où il exécute également les portraits en pied de [[François 1er de France|François {{1er}}]] et [[Henri II de France|Henri II]]. On attribue également à Jean Cousin des vitraux en [[grisaille]] exécutés pour le [[château d'Anet]] (dont ''Abraham rendant à Agar son fils Ismaël'', ''Les Israélites vainqueurs des Amalécites sous la conduite de Moïse'' et ''Jésus-Christ prêchant dans le désert'').
 
On ne possède qu'un petit nombre de tableaux de Jean Cousin l'Ancien : l'''[[Eva prima Pandora|Eva Prima Pandora]]'', aujourd'hui conservé au [[Musée du Louvre|Louvre]], et ''La Charité''. Ces œuvres attestent, comme les tapisseries de l'Histoire de [[Mammès de Césarée|saint Mammès]], l'influence du [[Rosso Fiorentino|Rosso]], mais Jean Cousin l'Ancien sut interpréter dans un style très personnel l'art de l'[[école de Fontainebleau]]<ref name="Grandin" />.
 
Quelques dessins ''Pénélope'', ''Martyre d'un saint'' et ''Jeux d'enfants'', sont attribués aujourd'hui à Jean Cousin le Père dont on possède également deux gravures signées : l'''Annonciation'' et la ''Mise au tombeau'' .
 
[[파일:Sens Cathédrale St-Étienne Baie 034 208.jpg|왼쪽|섬네일|[[Cathédrale Saint-Étienne de Sens]] (vers 1530).]]
 
Théoricien, l'artiste a publié deux traités illustrés de gravures sur bois, le ''Livre de perspective'' daté de 1560 ainsi que le ''Livre de pourtraicture'' achevé par son fils en 1571<ref name="Grandin" />. Réimprimé en 1589, aucun exemplaire n'a été retrouvé à ce jour. Il est en revanche probable que ce dernier ouvrage soit celui publié juste après la mort de Cousin le Jeune à Paris en 1595 par [[David Leclerc]], avec des planches gravées de [[Jean Le Clerc]]. Ce traité qui constitue d'ailleurs un chef-d’œuvre d’[[illustration anatomique]], fut réimprimé à plusieurs reprises au {{s-|XVII}}.
 
[[Jean Cousin le Jeune]] (1522-1594) dit aussi le Fils fut longtemps confondu avec son père dont il fut l'élève<ref>Peintre et sculpteur souvent comparé à [[Albrecht Dürer|Dürer]] (1490-v. 1560)</ref>. Jean Cousin le Jeune étudia d'abord à l'université de [[Paris]] au moins jusqu'en 1542<ref>Persée, Les deux Jehan Cousin (1490-1560 - 1522-1594), Année 1909, Volume 53, pages 102-107</ref>, puis collabora aux travaux de son père. À la mort de celui-ci, il prit sa suite<ref name="Grandin" />.
 
Sa production semble avoir été importante. En 1563, il collabore aux préparatifs de l'entrée triomphale de [[Charles IX (roi de France)|Charles IX]]. Vers 1565, la contribution de Cousin le Père et de Cousin le Fils au monument funéraire de [[Philippe Chabot]], amiral de [[France]], est controversée ; on attribue au fils le cadre ornemental du monument et les quatre génies ailés traités dans un style [[Maniérisme|maniériste]] très brillant<ref name="Grandin" />.
 
Le seul tableau qu'on attribue a Jean Cousin fils est le ''Jugement dernier'' daté de 1585 et conservé au [[musée du Louvre]]. Cette œuvre reflète à la fois l'influence du [[maniérisme]] [[Florence|florentin]] et celle de l'[[Maniérisme anversois|art flamand]]. Un certain nombre de dessins, les illustrations du ''Livre de Fortune'' (1568), des ''Métamorphoses d'Ovide'' (1570) et des ''Fables d'Ésope'' (1582) révèlent un artiste habile influencé par son père, le [[École de Fontainebleau|milieu bellifontain]] et l'art des [[Maniérisme du Nord|pays nordiques]]<ref name="Grandin" />.
 
==== Antoine Caron (1521-15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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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Funérailles de l'Amour Louvre RF1954-4 02.jpg|[[Henri Lerambert]], ''[[Les Funérailles de l'Amour]]'' (1560-1570, [[musée du Louvre]]).
Antoine Caron 001.jpg|''[[Auguste]] et la Sibylle de Tibur'' (vers 1578, [[musée du Louvre]]).
Antoine Caron 002.jpg|''Les Massacres du Triumvirat'' (1566, [[musée du Louvre]]).
Henri Lerambert, Le Christ et la Femme adultère.jpg|[[Henri Lerambert]], ''Le Christ et la Femme adultère'' (vers 1570, [[musée d'Arts de Nantes]]).
Caron-Antoine-triumph-of-winter.jpg|''Le Triomphe de l'hiver'' (vers 1568, Collection particulière).
Antoine Caron Astronomers Studying an Eclipse.jpg|''Astronomes étudiant une éclipse'' (v. 1575, collection Gaskin, Lond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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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ntoine Caron 004.jpg|왼쪽|섬네일|''L'Apothéose de [[Sémélé]] ''ou'' la Mort de [[Didon]]'' (1585, [[château de Saumur]]).]]
Antoine Caron, né en [[1521]] à [[Beauvais]] et mort en [[1599]] à [[Paris]], est un maître verrier, illustrateur et [[Peinture française|peintre français]] [[Maniérisme du Nord|maniériste]] de l’[[école de Fontainebleau]].
 
À la charnière entre les deux [[École de Fontainebleau|écoles de Fontainebleau]], [[Antoine Caron]] est une des personnalités majeures du [[maniérisme]] français. L’un des rares peintres français de son époque à posséder une personnalité artistique prononcée<ref>{{Lien web|url=http://www.ibiblio.org/wm/paint/auth/caron/|éditeur=Ibiblio.org|date=2002-07-14|consulté le=8 novembre 2014|title=Caron, Antoine Web Museum, Paris}}.</ref>. Son œuvre reflète l’ambiance raffinée, bien que très instable de la cour de la [[Maison capétienne de Valois|maison de Valois]], pendant les [[Guerres de religion (France)|guerres de Religion]] de 1560 à 1598.
 
Quittant [[Beauvais]] où il peignait depuis l’adolescence des tableaux religieux perdus depuis, Antoine Caron travaille à l’atelier des vitraux de [[Engrand Leprince|Leprince]], puis fait sa formation dans les ateliers du [[Le Primatice|Primatice]] et de [[Nicolò dell'Abbate]] à l’[[École de Fontainebleau]] de 1540 à 1550. En 1561, il est nommé peintre de la cour de [[Henri II de France|Henri II]] et [[Catherine de Médicis]] et deviendra plus tard le peintre attitré de celle-ci.
 
Sa fonction de peintre de la cour incluaient la responsabilité de l’organisation des représentations officielles. Il a, en tant que tel, participé à l’organisation de la cérémonie et de l’entrée royale à Paris pour le sacre de [[Charles IX de France|Charles IX]] et le mariage d’[[Henri IV de France|Henri IV]] avec [[Marguerite de France (1553-1615)|Marguerite de Valois]]. Certaines de ses illustrations des festivités à la cour de [[Charles IX (roi de France)|Charles IX]] demeurent et constituent vraisemblablement des sources possibles pour la représentation de la cour dans les tapisseries Valois.
 
[[파일:Antoine caron, massacro dei triumviri, 1566, 07.JPG|오른쪽|섬네일|Détail des ''Massacres du Triumvirat'' s'inspirant de l'[[Hercule Farnèse]] (1566, [[musée du Louvre]]).]]
 
Le peu d’œuvres survivantes de Caron comprennent des sujets historiques et allégoriques, des cérémonies de cour et scènes astrologiques. C'est un lettré, et ses scènes savantes et sophistiquées reflètent la brillante culture qui s'est développé à Paris sous le règne des derniers [[Maison capétienne de Valois|Valois]]<ref name="Louvre">{{ouvrage|langue=français|prénom1=Vincent|nom1=Pomarède|titre=1001 peintures au Louvre|sous-titre=De l’Antiquité au {{s-|XIX}}|volume=|passage=92|éditeur=Musée du Louvre Editions|année=2005|pages totales=576|isbn=2-35031-032-9|lire en ligne=}}</ref>.
 
Ses massacres sont réalisées au milieu des années 1560, comme son seul tableau signé et daté, ''Les Massacres du [[Triumvirat]]'' (1566), conservé au Louvre. Il évoque les masscres perpétrés pendant les guerres civiles romaines, en 43 avant J-C par les [[Second triumvirat|triumvirs]] [[Marc Antoine|Antoine]], [[Auguste|Octave]] et [[Lépide]]. Il s'agirait d'une allusion aux massacres dont les [[protestants]] furent victimes, pendant la [[Guerres de religion (France)|guerre de religion]], principalement à partir de 1561, lorsque trois défenseurs du [[catholicisme]], [[Anne de Montmorency (1525)|Anne de Montmorency]], [[Jacques d'Albon de Saint-André]] et [[François de Guise]] se constituèrent en triumvirat pour s'opposer à la politique d'apaisement de Catherine de Médicis<ref name="Louvre" />
 
La composante essentielle de son style est la reprise de la figure très allongée des artistes italiens, même dans les portraits comme ''Portrait de femme'' (1577), une gestuelle éloquente, beaucoup de mouvement et de dynamisme. Il donne un aspect très étrange à ses compositions. Ainsi que la vivacité de ses coloris qui participent à ce caractère souvent [[fantastique]] donné à ses œuvres.
 
L'autre aspect emblématique de son œuvre est l’incorporation d’architectures fantaisistes, qui se mêlent parfois à des ruines romaines<ref>{{en}} Frances A. Yates, « Antoine Caron's Paintings for Triumphal Arches », ''[[Journal of the Warburg and Courtauld Institutes]]'', 1951, 14(1/2), {{p.|132-134}}.</ref>. Comme son maitre [[Nicolò dell'Abbate]], il a souvent placé des figures humaines presque insignifiantes au milieu de scènes immenses.
 
Stylistiquement, son adhésion au [[maniérisme du Nord]] se réfère à la typologie de ses personnages. La critique moderne l’appelle « le grand-père du [[maniérisme]] »<ref name="Louvre" />.
 
Le peu de documentation de la peinture française de cette époque fait que beaucoup d’œuvres qui lui sont attribuées le sont également à d’autres artistes tels que [[Henri Lerambert]]. La relative notoriété d'[[Antoine Caron]] contribue à l’association de son nom à des œuvres comparables aux plus connues des siennes<ref>{{en}} « ''I have already had occasion elsewhere to state my opinion that some of the paintings attributed by M. Ehrmann to Caron may perhaps be by other hands. I still feel it difficult to believe that the Beauvais ''Massacre'' with its sharply Flemish architecture can be a product of the French School, and I do not feel convinced that the ''Semele'', the ''Carrousel with the Elephant'', and the ''Martyrdom of Sir Thomas More'' are necessarily by his hand.'' » Revue de ''Antoine Caron Peintre à la Cour des Valois 1521-1599'' de Jean Ehrmann par Anthony F. Blunt dans ''The Burlington Magazine'', novembre 1956, 98(644), {{p.|418}}.</ref>. Dans certains cas, ces toiles, par exemple, la ''Soumission de Milan à François 1세 en 1515'' (v. 1570)<ref name="Milan">{{lien web|titre=Antoine Caron, Workshop of National Gallery of Canada|url=http://cybermuse.beaux-arts.ca/cybermuse/search/artwork_e.jsp?mkey=9125|éditeur=Cybermuse.beaux-arts.ca|consulté le=8 novembre 2014}}.</ref> sont désormais attribuées « à l’atelier d’Antoine Caron ».
 
== La Sculpture ==
Pour la sculptur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s'est notamment procuré les services de [[Benvenuto Cellini]] dont l'art a influencé toute la statuaire française du {{s-|XVI}}. Ses autres principaux représentants ont été [[Jean Goujon]] et [[Germain Pilon]].
 
La {{2e}} partie du {{s-|XVI}} voit le style [[Maniérisme|Maniériste]] tempéré dominer, malgré une forte tendance au réalisme : on rémarque le [[Rotonde des Valois|Tombeau d'Henri II et de Catherine de médicis]] ainsi que le tombeau du [[René de Birague|Cardinal René de Birague]] de [[Germain Pilon]], dont l'intensité dramatique rappelle parfois [[Michel-Ange]] et annonce le [[Baroque|style Baroque]]<ref name="Muchembled" />.
 
=== La Famille Juste (ou di Giusto di Betti) ===
<gallery mode="packed" heights="140">
Saint-Denis (93), basilique, monument funéraire de Louis XII et Anne de Bretagne, 1515 2.jpg|Le tombeau de [[Louis XI]] (vers 1517, [[basilique Saint-Denis]]).
Gisant louis XII.JPG|[[Transi]] de [[Louis XII]], exécuté d'après le [[masque mortuaire]] du roi (vers 1517, [[basilique Saint-Denis]]).
GrabAnna von Bretagne.jpg|[[Transi]] d'[[Anne de Bretagne]] (vers 1517, [[basilique Saint-Denis]]).
Basilique Saint Denis - MH0002672.JPG|[[Orant]]s de [[Louis XII]] et d'[[Anne de Bretagne]] (vers 1517, [[basilique Saint-Denis]]).
Saint-Denis (93), basilique, monument funéraire de Louis XII et Anne de Bretagne, 1515, la Justice 2.jpg|La Justice (vers 1517, [[basilique Saint-Denis]]).
Saint-Denis (93), basilique, monument funéraire de Louis XII et Anne de Bretagne, 1515, la Prudence.JPG|La Prudence (vers 1517, [[basilique Saint-Denis]]).
Oiron collégiale Saint Maurice gisant (3).JPG|Tombeau d'[[Artus Gouffier de Boisy|Artus Gouffier]] (1532-1537, [[Collégiale Saint-Maurice d'Oiron]]).
Cathédrale Saint-Samson de Dol (Tombeau de Thomas James).jpg|Tombeau de [[Thomas James]] (1507, [[Cathédrale Saint-Samson de Dol-de-Bretagne|Dol-de-Bretagne]]).
Tombeau de Louis XII et d’Anne de Bretagne, Basilique St.-Denis.jpg|Les [[Douze Apôtres|Apôtres]], soubassement du tombeau de [[Louis XI]]I et [[Anne de Bretagne]] (vers 1517, [[basilique Saint-Denis]]).
</gallery>
[[파일:Louvre-Lens_-_Renaissance_-_034_-_MR_1596.JPG|왼쪽|섬네일|''Louis XII'' - sauvegarde de la Porte de Gênes du château de Gaillon par [[Alexandre Lenoir]].]]
Dynastie de sculpteurs, originaires de la région de San Martino a Mensola<ref name="h">Voir : La Gazette des beaux arts, 1876-2, {{p.|361}}.</ref>, près de [[Florence]], les trois frères Giusto di Betti émigrent dès [[1504]] en [[France]], à la suite de l'intervention de [[Louis XII]] en [[Guerres d'Italie|Italie]]. Ils finissent par être naturalisés en [[1513]], sous le nom francisé de « [[Famille Juste|Juste]] » avant de devenir sculpteurs du roi''.''
 
Ils ont été avec [[Francesco Laurana]] les représentants les plus brillants et les plus actifs de la sculpture de la [[Renaissance italienne]] en [[France]].
 
Antonio di Giusto di Betti ou Antoine Juste (1479-{{1er}} septembre 1519), travaille dès [[1507]] au tombeau de [[Thomas James]], évêque de [[Dol-de-Bretagne]], réalisation achevée en collaboration avec son frère Jean Juste<ref>{{Base Palissy|IM35004610|Inventaire général : Tombeau de Thomas James}}</ref>. Très vite, il se voit appelé par le [[Georges d'Amboise|cardinal Georges d'Amboise]] sur le chantier de son [[château de Gaillon]] (détruit en grande partie à la révolution) ; Tout en réalisant pour la chapelle<ref>[http://musee-renaissance.fr/sites/musee-renaissance.fr/files/fiche_de_salle_boiseries_gaillon_0.pdf Musée de la Renaissance : Les boiseries du château de Gaillon]</ref> une série de [[Douze Apôtres|douze apôtres]] en [[terre cuite]]<ref>[http://cartelfr.louvre.fr/cartelfr/visite?srv=car_not_frame&idNotice=2039 Musée du Louvre : Tête de saint Pierre ?, attribué à Antoine Juste].</ref>{{,}}<ref>[http://www.photo.rmn.fr/C.aspx?VP3=SearchResult&VBID=2CO5PC0LZV36E Photo rmn : Giusto Betti Antonio de (1479-1519), Juste Antoine (dit)]</ref>, il exécute un buste du [[Georges d'Amboise|cardinal]] ainsi qu'un [[bas-relief]] représentant la [[Bataille de Gênes]] pour la galerie du palais ; En collaboration avec l'atelier de [[Michel Colombe]], il poursuit le chantier avant-gardiste de la chapelle haute<ref name="mussat54a64">{{Article|langue=Français|auteur1=André Mussat|titre=pp. 54-64|périodique=Annales de Bretagne|volume=61|numéro=1|date=1954|issn=|lire en ligne=http://www.persee.fr/doc/abpo_0003-391x_1954_num_61_1_1949|pages= 54-64}}</ref> devenue véritable manifeste d'un nouveau style [[Renaissance]] en sculpture. Antoine Juste s'installe alors à [[Tours]], où il fait venir des [[Marbre de Carrare|marbres de Carrare]] pour le tombeau de [[Louis XII]] (1516)<ref>''La gazette des beaux-arts'', 1876-2, {{p.|363-364}}.</ref>. On lui doit sans doute les [[bas-relief]]s de ce monument. La collaboration de [[Guido Mazzoni]], est probable car cet artiste arrivé en [[France]] dès [[1494]] et était déjà actif sur le tombeau de [[Charles VIII (roi de France)|Charles VIII]].
 
Andrea di Giusto di Betti, André Juste (né vers 1483), le second des frères, collabore sans doute avec ses frères pour l'établissement du tombeau de Louis XII, de la [[basilique Saint-Denis]], bien qu'il ne soit pas certain aujourd'hui qu'il ait quitté l'Italie<ref name="h" />.
 
[[파일:Bataille d'Agnadel (marbre).jpg|오른쪽|섬네일|440x440px|La [[Bataille d'Agnadel]], soubassement du tombeau de [[Louis XI]]I et [[Anne de Bretagne]] (vers 1517, [[basilique Saint-Denis]]).]]
 
Giovanni di Giusto di Betti ou Jean Juste 1세 (1485-1549) est le dernier des frères. Dès son arrivée en [[France]], il s'installe à [[Tours]] et passe plusieurs années dans l'atelier de [[Michel Colombe]]. Il collabore ainsi à la ''Mise au tombeau'' de l'[[abbaye de Solesmes]]. Découvrant à cette occasion, le travail de [[Claus Sluter]] et le réalisme [[peinture flamande|flamand]]. Jean Juste 1세 devient alors l'un des acteurs principaux d'un nouveau style en sculpture, mélangeant le réalisme flamand et la douceur française appelé [[style Louis XII]]. Après avoir achevé seul le tombeau de [[Thomas James]], il se rend à la [[basilique Saint-Denis]] pour y installer le mausolée de [[Louis XII]]. C'est là qu'il aurait exécuté les [[gisant]]s du roi et de la reine, surmontés de leurs [[orant]]s, grâce aux indications de [[Jean Perréal]], déjà actif au tombeau du duc de Bretagne [[François II de Bretagne|François II]] et aux tombeaux du [[monastère de Brou]] : « Ces statues couchées, les plus dramatiques, représentent les cadavres saisis dans les affres de la mort, pris par les derniers spasmes, le ventre recousu par l’embaumement, les bouches entr’ouvertes par le dernier râle, la peau collée au squelette, les seins affaissés, la tête renversée pour la reine »<ref>{{Lien web|langue=français|titre=Le tombeau de Louis XII et Anne de Bretagne|url=[http://saintdenis-tombeaux.forumculture.net/t43-le-tombeau-de-louis-xii-et-anne-de-bretagne]|site=http://saintdenis-tombeaux.forumculture.net|date=|consulté le=06/05/2017}}</ref>. Les statues des [[Vertu cardinale|vertus cardinales]] sont plutôt attribuées aujourd'hui à son neveu Juste de Juste, qu'il élève d'ailleurs comme son fils<ref>{{Base Palissy|PM93000171|Tombeau de Louis XII, roi de France et d'Anne de Bretagne, son épouse}}</ref>. Jean Juste exécute par la suite le tombeau de [[Jean IV de Rieux|Jean IV]][[Jean IV de Rieux|de Rieulx]], [[maréchal de Bretagne]], à [[Ancenis]], puis le tombeau de [[Thomas Bohier]], fondateur du [[Chenonceaux|château de Chenonceaux]], dans l'[[église Saint-Saturnin de Tours]], et enfin le tombeau de [[Louis de Crevant|Louis de Crevent]], abbé de la [[Abbaye de la Trinité de Vendôme|Trinité de Vendôme]]. De 1532 à 1539, il réalise pour la [[chapelle]] du [[château d'Oiron]], le tombeau de [[Artus Gouffier de Boisy|Artus Gouffier]], réalisé à la demande de sa veuve Hélène de Hangest, ainsi que celui de sa belle-mère, dame de [[Maison de Montmorency|Montmorency]]<ref>[http://www.culture.gouv.fr/public/mistral/memoire_fr?ACTION=CHERCHER&FIELD_5=LBASE&VALUE_5=PA00101296 Base Mistral : photos de l'église d'Oiron]</ref>{{,}}<ref>''Le sculpteur Jean Juste'', {{p.|170-171}}, Nouvelles archives de l'art français, 1872 [https://books.google.fr/books?id=sIAuAAAAMAAJ&pg=PA170#v=onepage&q&f=false (''lire en ligne'')]</ref>.
 
Jean Juste II (1510-1577), fils de Jean Juste 1세, exécute en [[1558 en France|1558]], pour l'église d'[[Oiron]], le tombeau de [[Famille Gouffier|Claude Gouffier]], [[grand écuyer de France]], et de sa première femme, [[Maison de La Trémoille|Jacqueline de La Trémoille]] (détruit en 1793) dont il ne reste malheureusement aujourd'hui que la statue de [[Famille Gouffier|Claude Gouffier]] ; ses réalisations postérieures à [[1558 en France|1558]], étant d'ailleurs en grande partie détruites. Par la suite, Jean II Juste aurait réalisé le tombeau de [[Guillaume Gouffier de Bonnivet|Guillaume Gouffier]], amiral de [[Château de Bonnivet|Bonnivet]], tué à [[Pavie]] en 1525, puis une fontaine en marbre blanc, pour les jardins du [[château d'Oiron]], en grande partie disparue, n'en restant qu'une vasque<ref>Voir, La gazette des Beaux-arts, 1876, {{p.|559-569}}.</ref>. C'est en collaboration avec le peintre François Valence, qu'il participe à la réalisation de trois [[Arc de triomphe|arcs de triomphe]] et coordonne les appareils de fête créés à [[Tours]] à l'occasion de l'entrée du jeune roi [[François II (roi de France)|François II]] et de son épouse [[Marie Stuart]] (1560). Ce succès lui permet de passer un marché le 24 avril 1561 concernant la création une fontaine, place de la Foire-le-Roi achevée en 1562 et aujourd'hui disparue<ref>Voir : Bulletin monumental, 1881, {{p.|853}}.</ref>.
 
=== Philibert Delorme (1514-1570) ===
[[파일:Lyon_5_-_Hôtel_de_Bullioud_02.jpg|왼쪽|섬네일|246x246px|''Galerie [[Philibert Delorme|Delorme]]'', [[hôtel de Bullioud]], rue Juiverie ([[Lyon]], 1536).]]
Né à [[Lyon]], [[Philibert Delorme]] meurt à [[Paris]] en 1570. Issu d'une famille de [[Architecte|maîtres-maçons]], il est formé par son père, notamment sur les travaux de construction des remparts de la [[Lyon]]<ref name="Dico2">{{harvsp|id=Dico|texte=Dico|p=373}}.</ref>. De 1533 à 1536, le futur architecte séjourne à [[Histoire de Rome|Rome]] où il acquiert un solide savoir technique et une bonne connaissance archéologique. L'artiste côtoie ainsi le milieu érudit de la ville et se lie d'amitié avec le cardinal [[Jean du Bellay (1492-1560)|Jean du Bellay]] (ambassadeur de [[France]] à [[Rome]])<ref name="Dico2" />.
 
Dès son retour, commencent alors près de trente ans d'une vie professionnelle intense. En 1536, revenu à [[Lyon]], un ami du [[Jean du Bellay (1492-1560)|cardinal du Bellay]], le marchand Antoine Bullioud, lui confie la tâche de réunir trois [[Hôtel de Bullioud|corps de bâtiment]] indépendants entourant une petite cour, [[Rue Juiverie (Lyon)|rue Juiverie]]. Le jeune architecte y réalise une galerie à trois [[Baie (architecture)|baies]] en [[anse de panier]] voûtées d'arêtes reposant sur deux [[Trompe (architecture)|trompes]]. On attribue également quelques autres réalisations lyonnaises mineures, mais il ne reste pas longtemps dans sa ville natale<ref name="Dico2" />.
 
C'est alors que son ami le cardinal lui confie entre 1541 et 1544 la conception de son [[Château de Saint-Maur|château de Saint-Maur-des-Fossés]]. Manifeste de la Renaissance française, il s'agit d'un quadrilatère inspiré des [[Villa (grande maison)|villas]] italiennes.
 
[[파일:Chateausaintmaur.jpg|오른쪽|섬네일|302x302px|Le [[château de Saint-Maur]], fin {{s-|XVI}}.]]
 
Sa nomination en tant qu'« architecte du roi » par [[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en 1548, lui permet de garder, onze ans durant, la mainmise absolue sur l'[[architecture]] royale, le [[palais du Louvre]] excepté confié à [[Pierre Lescot]]<ref name="Dico2" />.
 
[[Philibert Delorme]] assure ainsi la construction et l'entretien des châteaux, des édifices utilitaires, des fortifications de la [[Bretagne]], l'ordonnance des fêtes et des entrées ainsi que l'administration et le contrôle financier des travaux. La surintendance exercée par l'artiste est un événement considérable dans l'histoire de l'architecture française.
 
[[파일:Château Anet wiki.jpg|왼쪽|섬네일|Porte triomphale du [[château d'Anet]] (1552).]]
 
L'architecte intervient également sur les chantiers du [[château d'Anet]] réalisé pour [[Diane de Poitiers]] et du château royal de [[Saint-Léger-en-Yvelines]]. C'est pour son plus grand tourment qu'il doit ponctuellement intervenir à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en collaboration avec [[Le Primatice]], [[Nicolò dell'Abbate]] et Scibec de Carpi<ref>Arlette Jouanna, ''La France de la Renaissance'', Perrin, 2009, Paris, {{p.|143}}.</ref>. Il réalise également quelques travaux au [[château de Madrid]], au [[bois de Boulogne]], à [[Château de Vincennes|Vincennes]], à [[Paris]], à [[Château de Villers-Cotterêts|Villers-Cotterêts]], à [[Coucy-le-Château-Auffrique|Coucy-le-Château]], à [[Château de Chenonceau|Chenonceaux]], à [[Château de Limours|Limours]] et à [[Château de Roncourt|Boncourt]]...
 
Ses prétentions et sa vanité lui attirent pourtant de lourdes inimitiés, dont celles de [[Pierre de Ronsard]] ou [[Bernard Palissy]]. Au cours de sa carrière, [[Philibert Delorme]] ne cessera d'accumuler des bénéfices (entre 1547 et 1558, il reçoit cinq [[abbaye]]s et n'en a jamais détenu moins de trois en même temps jusqu'à sa mort), n'hésitant pas à solliciter constamment du roi l'attribution de charges et d'offices, pour compenser peut-être le manque à gagner de chantiers difficiles dont il se plaint régulièrement.
 
Alors qu'il est ccusé de malversations, la mort du roi [[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en juillet 1559, amène sa disgrâce, laissant le champ libre aux ennemis de l'[[architecte]] ; C'est ainsi qu'il se voit destitué de ses fonctions au profit du [[Le Primatice|Primatice]]. La clientèle princière lui restera pourtant fidèle dans l'adversité dont [[Diane de Poitiers]] qui lui commande l'exécution de travaux pour son [[château de Beynes]]. Le reste de son existence est consacré à la rédaction de traités théoriques dont la rédaction d'une somme de l’architecture. Il a publie notamment un ''[https://gallica.bnf.fr/ark:/12148/bpt6k85636g Traité complet de l'art de bâtir]'' (1567), suivi des ''[https://gallica.bnf.fr/ark:/12148/bpt6k85634s Nouvelles inventions pour bien bâtir et à petits frais] (''Paris, 1561). [[Philibert Delorme|Delorme]] n’ira pas au-delà. Sur la fin de sa vie, il retrouve pourtant le chemin de la cour, la régente [[Catherine de Médicis]] lui confiant la tâche de tracer le [[Palais des Tuileries]]<ref name="Dico2" />.
 
L'essentiel de ses œuvres ont malheureusement été presque détruite au fil du temps. Seuls subsistent l'[[Hôtel de Bullioud|hôtel Bullioud]] (1536) à [[Lyon]], certaines parties du [[château d'Anet]] qu'il exécuta pour [[Diane de Poitiers]] (1545-1555) et le ''tombeau de François 1세'' à la [[basilique Saint-Denis]].
 
=== Pierre Bontemps (vers 1505-1568) ===
[[파일:Tombeau de Charles de Maigny MR 1729 (detail).jpg|오른쪽|섬네일|234x234px|Tombeau de Charles de Maigny (1557, [[musée du Louvre]]).]]
Sculpteur français, [[Pierre Bontemps]] est surtout connu pour les nombreux [[Tombeau (architecture)|monuments funéraires]] qu'il a sculptés et décorés<ref name="Plouin">{{Lien web | langue= fr | auteur1= Renée Plouin | titre= Bontemps Pierre (1507 env. - apr. 1563) | url= http://www.universalis.fr/encyclopedie/pierre-bontemps/ | site= Encyclopædia Universalis [en ligne] | date= | consulté le= 6 juin 2017}}.</ref>.
 
Arrivé à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à partir de [[1536]], il se forme au contact des œuvres antiques apportées par [[Le Primatice|Primatice]]. Il exécute notamment une fonte du ''[[Laocoon]]'' et une autre de l'''[[Apollon du Belvédère]]'' . En [[1548]], il fait partie de l'équipe de sculpteurs que dirige [[Philibert Delorme]] pour le'' tombeau de François 1세'' à la [[basilique Saint-Denis]]<ref name="Plouin" />.
 
Les gisants du roi et de la [[Claude de France (1499-1524)|reine Claude]] sont le résultat de sa collaboration avec [[François Marchand]]. De [[1549 en France|1549]] à [[1551 en France|1551]], il taille seul les [[Orant|statues orantes]] du [[François de France (1518-1536)|dauphin François de France]] et de son frère [[Charles II d'Orléans]]. Il est par ailleurs entièrement responsable des [[bas-relief]]s ornant le soubassement du [[Tombeau (architecture)|tombeau]] de [[François Ier de France|François 1세]], représentant avec une précision remarquable les batailles qui ont eu lieu sous son règne, telles les victoires de [[Marignan]] et de [[Bataille de Cérisoles|Cérisoles]]. Les préparatifs de chaque bataille sont détaillés (passage des Alpes) et les personnages principaux individualisés : on reconnaît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à son [[Monogramme royal|monogramme]] ou encore le [[Pierre Terrail de Bayard|chevalier Bayard]].
 
En [[1556]], [[Pierre Bontemps]] est à nouveau à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où il donne pour la cheminée de la chambre du roi un [[bas-relief]] des ''Quatre Saisons'' . Il exécute ensuite, pour le couvent des Hautes-Bruyères ([[Yvelines]]), le monument en marbre destiné à contenir le ''cœur de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L'[[Urne funéraire|urne]] est décorée de [[bas-relief]]s [[Allégorie|allégoriques]] à la gloire des arts et des sciences, qui ont repris, grâce au souverain, une place importante dans le royaume<ref name="Muchembled" />.
 
On lui doit encore la statue funéraire de ''Charles de Maigny (''vers [[1557 en France|1557]]), conservé au [[musée du Louvre]] et le ''tombeau de [[Guillaume du Bellay]]'' à la [[Cathédrale Saint-Julien du Mans|cathédrale du Mans]].
 
[[Pierre Bontemps]] semble avoir été plutôt un spécialiste du [[bas-relief]] décoratif, très en vogue à l'époque de l'épanouissement de la [[École de Fontainebleau|Première école de Fontainebleau]] ({{2e}} quart du {{s-|XVI}}), qu'un grand créateur de [[ronde-bosse]]. La sensualité et la délicatesse des figures féminines rappelle le style [[Maniérisme|maniériste]] que [[Le Primatice|Primatice]] applique aux stucs de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petites têtes et cous allongés, gestes esquissés et harmonieux). Si l'art gracieux et délicat de [[Pierre Bontemps|Bontemps]] est tout imprégné d'esprit italien, il est tempéré par le souci de la précision dans l'agencement du décor et par le pittoresque des costumes<ref name="Muchembled" />.
 
=== Jean Goujon (1510-vers 1567) ===
<gallery mode="packed">
P1330048 Paris III Carnavalet Goujon bas-reliefs facade rwks.jpg|''Les quatre Saisons'', [[Jean Goujon]] ou son atelier, 1548 à 1550, hôtel de [[Jacques de Ligneris]] - aujourd’hui [[musée Carnavalet]], [[Paris]].
Goujon1.jpg|''Relief au triton et à la nymphe'', [[Fontaine des Innocents]], 1549, [[musée du Louvre]].
Descent from the Cross MET ES6027.jpg|''La [[Déposition du Christ]]'', achevée pour Noël 1545, [[musée du Louvre]].
Relief Mars cour Carree Louvre.jpg|''[[Mars (mythologie)|Mars]]'' (entre 1548 et 1556).
Relief Bellona cour Carree Louvre.jpg|''[[Bellone]]'' (entre 1548 et 1556).
Relief Archimedes cour Carree Louvre.jpg|''[[Archimède]]'' (entre 1548 et 1556).
P1240961 Paris Ier fontaine des Innocents detail rwk.jpg|''[[Naïades|Naïade]]'', [[Fontaine des Innocents]], 1549, [[Paris]].
Paris, détail escalier henri II, palais du louvre 04.jpg|Escalier [[Style Henri II (XIXe siècle)|Henri II]] (1555-1556, [[Palais du Louvre|Louvre]]).
</gallery>
[[파일:Musée du Louvre 3.jpg|왼쪽|섬네일|201x201px|Détail d'une des [[Cariatide]]s de la salle éponyme du [[Palais du Louvre]] (1551).]]
Jean Goujon est probablement né en [[Normandie]] vers [[1510]] et mort selon toute vraisemblance à [[Bologne]], vers 1567<ref name="Colombier" />.
 
Surnommé le « [[Phidias]] français » ou « [[le Corrège]] de la sculpture », [[Jean Goujon]] est avec [[Germain Pilon]] le sculpteur le plus important de la Renaissance française<ref name="Gaehtgens">{{Lien web | langue= fr | auteur1= Thomas W. Gaehtgens | titre= Goujon Jean (env. 1510 - env. 1566) | url= http://www.universalis.fr/encyclopedie/jean-goujon/ | site= Encyclopædia Universalis [en ligne] | date= | consulté le= 06 juin 2017 }}.</ref>.
 
Tout autant sculpteur qu'architecte, il est l'un des premiers artistes dont l'œuvre s'inspire directement de l'[[Antiquité|art antique]] et de la [[Renaissance italienne]] qu'il a étudiés personnellement en [[Italie]]<ref name="Gaehtgens" />. Il sut soumettre son œuvre [[Sculpture|sculpturale]], surtout ses [[bas-relief]]s, au cadre architectural dans lequel elle devait s'inscrire<ref name="Gaehtgens" />.
 
Malgré la richesse de sa production artistique, la carrière de [[Jean Goujon]] ne peut être suivie que durant une vingtaine d'années seulement, de 1540 à 1562 environ<ref name="Gaehtgens" />. Présent à [[Rouen]], entre 1540 et 1542, il exécute ses premières œuvres conservées. Pour la tribune d'orgues de l'[[Église Saint-Maclou de Rouen|église Saint-Maclou]], il sculpte deux colonnes qui sont actuellement encore en place. Premier exemple en [[France]] d'un [[ordre corinthien]] très pur, elles révèlent la connaissance parfaite qu'avait [[jean Goujon]] de l'art antique. On lui attribue aussi le dessin du ''[[Louis de Brézé|tombeau de Louis de Brézé]] ''(1531) dans la [[Cathédrale Notre-Dame de Rouen|cathédrale de Rouen]], et l'architecture de la'' [[Fierte Saint-Romain|chapelle Saint-Romain]]'', appelée populairement la Fierte (1543)<ref name="Gaehtgens" />.
 
[[파일:DianeLouvre.jpg|오른쪽|섬네일|204x204px|La ''Fontaine de [[Diane (mythologie)|Diane]]'' attribuée à l'artiste (vers 1549, [[musée du Louvre]]).]]
 
Arrivé à [[Paris]] vers 1542, il travaille probablement sous la direction de l'architecte [[Pierre Lescot]], en tant qu'« imagier-façonnier ''»'' au [[jubé]] de [[Église Saint-Germain-l'Auxerrois de Paris|Saint-Germain-l'Auxerrois]] (1544 à Noël 1545)<ref name="AnnGeneal">''Les Annales de généalogie'', Éd. Christian, {{3e|trimestre}} 1986, {{p.|42-74}}.</ref>. L'ensemble architectural a disparu dès 1750 mais les [[bas-relief]]s des ''Quatre Évangélistes ''et la ''Déposition du Christ'', connue généralement sous le nom de ''la Vierge de pitié'', sculptés par l'artiste ont survécu et sont conservés aujourd'hui au [[Musée du Louvre|Louvre]]<ref name="Gaehtgens" />. Une estampe du [[Parmigianino|Parmesan]] représentant la [[Mise au tombeau]] a inspiré [[Jean Goujon]] pour la composition de la ''[[Descente de croix|Déposition du Christ]]''. C'est la preuve que l'[[Renaissance italienne|art italien]] l'a influencé directement, sans l'intermédiaire de l'[[École de Fontainebleau|art de Fontainebleau]]. La « draperie mouillée » et les plis parallèles des [[Relief (sculpture)|reliefs]] du [[jubé]] révèlent le style d'un artiste attaché à l'[[Art de la Grèce antique|art antique]], et plus exactement à l'[[art hellénistique]]<ref name="Gaehtgens" />.
 
En 1545, [[Jean Goujon]] travaille pour le connétable [[Anne de Montmorency (1493-1567)|Anne de Montmorency]] et réalise ''Les Quatre Saisons'' (1548 à 1550) pour l’hôtel de [[Jacques de Ligneris]], cousin de [[Pierre Lescot]]<ref name="AnnGeneal" />, devenu aujourd’hui [[musée Carnavalet]].
 
À partir de 1547, l'artiste entre au service du nouveau roi [[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Il travaillera avec d'autres scupteurs à la ''décoration de l'entrée du roi'' à [[Paris]] en 1549, en créant la seule œuvre permanente : la célèbre'' [[fontaine des Innocents]]''. Ses [[bas-relief]]s, représentant des [[nymphe]]s et des [[naïades]], se trouvent aujourd'hui au [[musée du Louvre]].
 
[[파일:Paris - Palais du Louvre - PA00085992 - 226.jpg|왼쪽|섬네일|309x309px|''La Guerre'' et ''La Paix'', [[Palais du Louvre]] (1549, [[Paris]]).]]
 
À la même époque, [[Jean Goujon]] travaille en tant que « maître sculpteur ''»'' sous « les dessins de [[Pierre Lescot]], seigneur de [[Versailles|Clagny]] ''»''<ref name="AnnGeneal" /> aux décorations du [[Palais du Louvre]]. Entre 1548 et le début de 1549, il achève ses [[allégorie]]s de ''La Guerre'' et de ''La Paix'' avant d'être chargé d'exécuter les allégories de ''L'Histoire'', de ''La Victoire'' puis de ''La Renommée'' et de ''La Gloire du roi''. Peu après, il réalise les ''[[Cariatides]]'' de la plateforme des musiciens, achevées en 1551, dans la salle homonyme du [[Palais du Louvre]]. En 1552, il sculpte des statues pour la cheminée du ''cabinet de l'Attique'' situé dans l'aile occidentale et enfin, en 1555-1556, certains bas-reliefs de l'''escalier d'Henri II''<ref name="AnnGeneal" />.
 
On lui attribue généralement les gravures de la version française du ''[[Hypnerotomachia Poliphili|Songe de Poliphile]]'' de [[Francesco Colonna (seigneur de Palestrina)|Francesco Colonna]] (1546), d’après les [[gravure]]s de l’édition originale (peut-être dues au studio d’[[Andrea Mantegna]]). On lui devrait également des [[gravure]]s sur bois illustrant la première édition française des ''Dix Livres d'architecture'' de [[Vitruve]], traduits en 1547 par [[Jean Martin (humaniste)|Jean Martin]]. Il aurait fabriqué aussi des médailles précieuses pour [[Catherine de Médicis]].
 
La ''[[Diane (mythologie)|Diane]] appuyée sur un cerf'' (vers 1549) dite aussi ''Fontaine de Diane'' réalisée pour [[Diane de Poitiers]] au [[château d'Anet]] a été successivement attribuée à [[Benvenuto Cellini]], [[Jean Goujon]] et [[Germain Pilon]]. Toutes ces attributions ont été contestées ou réfutées. Il est difficile de juger de l'œuvre qui a été largement complétée par [[Pierre-Nicolas Beauvallet]] avant son installation au [[musée du Louvre]] en 1799-1800. [[Alexandre Lenoir]], directeur du musée à cette époque, est l'auteur de l'attribution à [[Jean Goujon]]<ref>{{lien web|titre=Fontaine de Diane|url=http://cartelfr.louvre.fr/cartelfr/visite?srv=car_not_frame&idNotice=1870&langue=fr|site=cartelfr.louvre.fr|consulté le=1 mars 2015}} ; {{lien web|titre=La "Diane d'Anet"|url=http://www.louvre.fr/oeuvre-notices/la-diane-d-anet|site=louvre.fr|consulté le=1 mars 2015}} ; {{article|titre=La fontaine de Diane du château d'Anet conservée au Louvre et attribuée à Jean Goujon|périodique=Comptes-rendus des séances de l'Acadé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volume=65|numéro=2|année=1921|lire en ligne=http://www.persee.fr/web/revues/home/prescript/article/crai_0065-0536_1921_num_65_2_74420|nom=Roy|prénom=Maurice|passage=92}}.</ref>.
 
On ignore la date précise de la mort de l'artiste. De [[Protestantisme|religion protestante]], son emploi à la [[cour de France]] et même sa présence à [[Paris]] devinrent difficiles alors que les [[Guerres de religion (France)|tensions religieuses]] augmentaient. Une légende tenace veut que [[Jean Goujon]] ait été assassiné lors de la [[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Saint-Barthélemy]]. Si tel avait été le cas, il aurait été cité ''a posteriori'' comme faisant partie des célèbres martyrs du drame, ce qui ne fut pas le cas. L’histoire de sa mort tragique fut cependant reprise dans de nombreux ouvrages de [[critique d'art]] et de vulgarisation aux {{sp-|XVIII|et|XIX|s}}<ref>Par exemple : {{harvsp|Réveil|1869}} qui cite D'Argenville, ''Vie des fameux architectes...'', 1787 ; {{ouvrage|langue=fr|nom1=Clarac|titre=Description historique et graphique du Louvre et des Tuileries|lieu=Paris|éditeur=Imprimerie impériale|année=1853}} .</ref>. Des recherches plus récentes ont trouvé sa trace dans le milieu des réfugiés [[huguenot]]s de [[Bologne]] en 1562. Il serait mort en [[Italie]] entre cette date et 1569<ref name="Colombier">{{ouvrage | langue= fr | prénom1= Pierre | nom1= du Colombier | titre= Jean Goujon | lieu= Paris | année= 1951}}, d'après [[Charles Picard (archéologue)|Charles Picard]], « Jean Goujon et l’Antique », ''Journal des Savants'', 1951 ; [http://data.bnf.fr/13507896/jean_goujon/ notice d'auteur de la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 [http://www.archivesdefrance.culture.gouv.fr/action-culturelle/celebrations-nationales/brochure-2010/beaux-arts/jean-goujon Jean Goujon, notice des Archives de France].</ref>.
 
[[Jean Goujon]] avait certainement un atelier et des élèves qui l'aidaient. Ses figures sont ovales, sensuelles et fluides. Ses [[drapé]]s révèlent une connaissance de la [[Sculpture grecque antique|sculpture grecque]]. Répandues dans l’ensemble de la [[France]] par des [[gravure]]s réalisées par des artistes de l’[[école de Fontainebleau]], la pureté et la grâce de son modèle ont influencé les [[arts décoratifs]]. Sa réputation connaît, à la fin du {{s-|XVI}}, une légère éclipse au profit de tendances plus [[Maniérisme|maniérées]], avant de grandir à nouveau à l'époque du [[baroque]] et du [[classicisme]] français.
 
=== Germain Pilon (1525/30-1590) ===
<gallery mode="packed">
Pont neuf, mascheroni di germain pilon, 01.JPG|[[Mascarons]] du [[Pont Neuf]] (vers 1588, les six derniers originaux sont au [[musée Carnavalet]]).
Henri II et Catherine de Médicis.JPG|[[Gisant]]s de [[Catherine de Médicis]] et [[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1583, [[basilique Saint-Denis]]).
Henri II Catherine de Médicis Pilon.JPG|Annothomies ([[Gisant|transis]]) du [[Monument funéraire]] d'[[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basilique Saint-Denis]]).
Interior Saint Paul Saint Louis 13.JPG|La ''[[Vierge de douleur]]'' (1586, [[église Saint-Paul-Saint-Louis]])
Détail Christ G Pilon.jpg|Christ de la Résurrection, vers 1572, [[Musée du Louvre|Louvre]]).
Birague médaille Pilon.jpg|Médaillon du chancelier [[René de Birague]] (vers 1577, bronze, [[Musée du Louvre|Louvre]]).
Germain pillon (bottega), enrico III, 1575.JPG|Médaillon d'[[Henri III (roi de France)|Henri III]] (1575, [[château de Blois]]).
Valentine Balbiani Pilon Louvre MR1643.jpg|Tombeau de Valentine Balbiani du [[couvent Sainte-Catherine-du-Val-des-Écoliers]] de [[Paris]] (1574, [[Musée du Louvre|Louvre]]).
</gallery>
[[파일:Monument du coeur d'Henri II.jpg|왼쪽|섬네일|[[Charites|''Les trois grâces'']], [[Tombeau (architecture)|monument funéraire]] surmonté de l'urne qui contenait le cœur d'[[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L'ensemble provient du [[couvent des Célestins de Paris]] aujourd'hui disparu (1561, [[musée du Louvre]]).]]
Germain Pilon, né vers [[1528]] à [[Paris]] et mort en [[1590]] dans la même ville, est avec [[Jean Goujon]], l'un des plus importants [[sculpteur]]s de la [[Renaissance artistique|Renaissance]] française. Participant notamment à la réalisation des tombeaux des derniers [[Maison capétienne de Valois|Valois]], ces œuvres témoignent de son appartenance au [[maniérisme]]<ref name="BabelonPilon">{{Ouvrage | langue= fr | auteur1= Jean Pierre Babelon |directeur1= Georges Wildenstein | titre=Germain Pilon|passage= | lieu= Paris | éditeur= Beaux Arts | collection= L'Art français | année= 1927 | pages totales= 150 | isbn= | lire en ligne= }}.</ref>.
 
Fils du sculpteur André Pilon, il s'initie auprès de ce dernier, et vraisemblablement avec [[Pierre Bontemps]], au [[modelage]] de la [[terre cuite]] et à la taille de pierre. Aucune des créations d'André Pilon n'a pourtant été conservée, de sorte que l'on ne peut apprécier son style. Certaines commandes révèlent toutefois sa prédilection pour les statues en bois peint et pour la terre cuite. Alors qu'il est nommé contrôleur des Poinçons et Monnaies du roi, [[Germain Pilon]] apprend parallèlement l'art de la fonte et du ciselage du bronze<ref name="Bresc">[[Geneviève Bresc-Bautier]] (éd.), ''Germain Pilon et les sculpteurs français de la Renaissance'', Actes du colloque organisé par le Service culturel du musée du Louvre les 26 et 27 octobre 1990, éd. la Documentation française, Paris, [[1993]]</ref>.
 
En 1558, il est chargé par le [[surintendant des Bâtiments]] du roi, [[Philibert Delorme|Philibert de l'Orme]], de sculpter huit « génies funèbres ''»'' ou « figures de Fortune ''»'', destinés au ''[[François Ier (roi de France)|tombeau de François 1세]]'' que [[Philibert Delorme|Philibert de l'Orme]] édifie alors à la [[basilique Saint-Denis]]. C'est à cette occasion que [[Germain Pilon]], alors jeune, réalise une statuette en marbre blanc qui constitue son premier ouvrage connu. Ce ''[[:파일:Écouen (95), château, rdc, salle n° 14, génie funéraire, marbre, Germain Pilon, Paris, 1558.jpg|Génie funéraire (photo)]]'' rappelle fortement la sculpture de [[Michel-Ange]] et témoigne de la virtuosité de [[Germain Pilon]] à imprimer le mouvement. Il ne sera pourtant pas retenue pour orner le tombeau royal et se trouve aujourd'hui exposé au [[musée national de la Renaissance]] d'[[Écouen]]<ref name="Bresc" />.
 
À la mort de [[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le Primatice]] obtint la charge de [[surintendant des Bâtiments]] et décide de conserver [[Germain Pilon]] parmi ses collaborateurs. Pour le [[château de Fontainebleau]], l'artiste façonne des statues de bois, exécutées sous la direction du maître italien dont le style lui était désormais très familier. Ce n'est qu'avec le ''[[:파일:Monument du coeur d'Henri II.jpg|Monument du cœur de Henri II (photo)]]'' ([[Musée du Louvre|Louvre]]) que l'on découvre dans toute sa plénitude l'art du sculpteur. Le monument qu'il conçoit se compose d'un [[piédestal]] décoré, supportant trois personnages féminins soutienant une urne funéraire sur leur tête. À [[Germain Pilon]] échoit la plus grande partie du travail de [[sculpture]], notamment l'exécution des trois statues [[Allégorie|allégoriques]] en lesquelles on peut voir aussi bien les [[Charites|Trois Grâces]] que les [[Vertu théologale|Vertus théologales]]<ref name="Leproux">{{Article | langue= fr | auteur1= Guy-Michel Leproux | titre= Un chef d'œuvre de Germain Pilon retrouvé | périodique= L'Estampille L'Objet d'art | date= 1992 | issn= | lire en ligne= | pages= 76-82 }}.</ref>.
 
C'est encore sous le contrôle du [[Le Primatice|Primatice]] que [[Germain Pilon]] crée ses œuvres suivantes. Lorsque [[Catherine de Médicis]] fait édifier un [[mausolée]] en [[Rotonde (architecture)|rotonde]] à l'[[Basilique Saint-Denis|église abbatiale de Saint-Denis]], [[Germain Pilon]] se trouve parmi les artistes responsables de la décoration sculptée. Il participe tout d'abord à la réalisation du'' tombeau du roi défunt'' et de la reine, à côté d'autres sculpteurs comme [[Girolamo della Robbia]] et [[Ponce Jacquiot|Maître Ponce]]. Cependant, la plus grande partie des travaux finissent par lui incomber<ref name="Bresc" />. Il est ainsi l'auteur des [[gisant]]s, des [[Orant|priants]], de deux [[Vertu]]s de bronze et de deux [[Relief (sculpture)|reliefs]] de marbre appartenant à l'[[édicule]]. C'est dans le [[gisant]] de la reine, imitation d'une statue antique appelée aujourd'hui [[Vénus de Médicis|Vénus des Médicis]], qu'il se libère le plus de ses attaches, peut-être parce qu'on l'y avait engagé. Les [[orant]]s révèlent une grande liberté dans le mouvement et une reproduction très personnelle de la [[Physiognomonie|physionomie]] qui permettent de constater que [[Germain Pilon]] a abandonné le [[Art gothique|gothique tardif]] pour l'art de la [[Renaissance]]<ref name="Leproux" />.
 
[[파일:Rotonde des Valois Intérieur.jpg|오른쪽|섬네일|La [[Rotonde des Valois]] restée inachevée en 1589 : vue intérieure de Pierre Giffart représentant le tombeau de [[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et de [[Catherine de Médicis]], avec aux angles, les [[Vertu théologale|vertus théologales]] de [[Germain Pilon]] ({{s|XVII}}),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Bnf]]).]]
 
À partir de 1570, [[Germain Pilon]], désormais très occupé, possédait à [[Paris]] un grand atelier. Parmi ses réalisations du moment ont été conservées la ''Vierge de [[Église Notre-Dame de la Couture|Notre-Dame-de-la-Couture]] ''([[Le Mans]]) et les principales sculptures du ''[[:파일:Tombeau Valentine Balbiani details Pilon LP397 MR1643.png|tombeau de Valentine Balbiani]]'' (morte en 1572)<ref name="Bresc" />. Dans ce tombeau, où se mêlent des éléments italiens et français, la défunte est représentée, selon la tradition française, sous deux aspects. Valentine Balbiani, vêtue d'un costume somptueux, à demi étendue, s'appuyant sur un coude et feuilletant un livre, correspond à un type italien déjà bien connu en [[France]] avant [[Germain Pilon]]<ref name="BabelonPilon" />. Pour autant, selon la tradition française, le [[bas-relief]] placé au-dessous présente la défunte en [[gisant]]e avec un réalisme si impressionnant qu'elle place l'œuvre dans la tradition des [[Gisant|transis]] « cadavéreux ''»'' de la sculpture [[Moyen Âge|médiévale]] française<ref name="Leproux" />. Aujourd'hui, la plupart des tombeaux exécutés par [[Germain Pilon]] ne sont plus connue que par des documents de commande ou des [[esquisse]]s<ref name="Bresc" />.
 
En 1572, l'artiste obtient la charge de « contrôleur général des effigies à la cour des Monnaies ». On lui doit alors la série de [[Médaillon (bijou)|médaillons]] aux effigies des membres de la famille royale ainsi que divers [[Buste (sculpture)|bustes]] en marbre et en bronze, parmi lesquels se distinguent celui de [[Charles IX (roi de France)|Charles IX]] et celui de [[Jean de Morvillier]]s. Dans les dix dernières années de sa vie, alors qu'il est apprécié de l'aristocratie française, il dispose d'un vaste atelier : l'abondance des commandes et la réalisation des 380 mascarons du [[Pont Neuf]], l'oblige à s'adjoindre ses fils, ainsi que des collaborateurs tel que Mathieu Jacquet dit Grenoble, lesquels assurent le succès du style de [[Germain Pilon]] sur plusieurs décennies<ref name="Bresc" />.
 
Jusqu'à 1585 environ, [[Germain Pilon]] est occupé par de nouvelles sculptures en marbre destinées à la ''[[Rotonde des Valois|chapelle funéraire des Valois]]'' de [[Basilique Saint-Denis|Saint-Denis]]. Un [[pathos]] et un dramatisme nouveau caractérisent alors les dernières années de production du sculpteur<ref name="BabelonPilon" />. On retiendra notamment le ''Christ de la Résurrection avec deux soldats romains'' ([[Musée du Louvre|Louvre]])<ref name="Leproux" />, un ''[[François d'Assise|Saint François d'Assise]]'' ([[Cathédrale Sainte-Croix de Paris des Arméniens]]) ainsi que deux nouvelles ''statues funéraires'' de [[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et de [[Catherine de Médicis]], représentés cette fois en [[gisant]]s ([[Basilique Saint-Denis|Saint-Denis]]). La ''Vierge de Pitié'', dernière réalisation de l'énsemble, emprunte à l'iconographie des scènes de dépositions de croix ou de [[Mise au tombeau|mises au tombeau]], son voile retombant en avant du visage ainsi que ses mains croisées sur la poitrine. Dans le ''tombeau de [[René de Birague]]'', réalisé vers 1583, [[Germain Pilon]] reprend la tradition [[Moyen Âge|médiévale]] en peignant le bronze de l'[[orant]] tout en faisant disparaître presque entièrement le corps du défunt sous l'ample manteau aux plis profonds dont la longue traîne est aujourd'hui disparue. Dans les dernières années de sa vie, le [[Relief (sculpture)|relief]] en bronze de la ''[[Descente de croix|Déposition du Christ]]'' (aujourd'hui conservé au [[Musée du Louvre|Louvre]]), s'inspire de la [[Descente de croix|Déposition du Christ]] exécuté vers 1544 par [[Jean Goujon]] ([[Musée du Louvre|Louvre]])<ref name="Bresc" />.
 
=== Hugues Sambin (1520-1601) ===
<gallery mode="packed" heights="200">
Dijon - Maison Milsand -4.jpg|[[Maison Maillard]] à [[Dijon]] (1561).
Dijon - Palais du Parlement.jpg|Porte du Scrin (1580, ancien [[Parlement de Bourgogne]] à [[Dijon]]).
Dijon - Hôtel Bénigne Le Compasseur -3.jpg|[[Hôtel Bénigne Le Compasseur]] (1573-1581, [[Dijon]]).
Maison Maillard 001.jpg|[[Maison Maillard]] à [[Dijon]] (1561).
Hôtel Fyot-de-Mimeure 03.jpg|[[Hôtel Fyot-de-Mimeure]] (1562).
Besancon Rathaus 2.JPG|La façade de l'ancien [[Parlement de Besançon]] (1585).
Cabinet MET ES5023.jpg|Cabinet ({{s mini-|XVI}} s., [[Metropolitan Museum of Art|Metropolitan Museum]], [[New York]]).
</gallery>
[[파일:Hugues Sambin - Jupiter et Lycaon.jpg|왼쪽|섬네일|Dessin de ''[[Lycaon (Arcadie)|Jupiter et Lycaon]]'' (1595, [[musée des Tissus et des Arts décoratifs]] de [[Lyon]]).|299x299px]]
[[Hugues Sambin]] (1520-1601) est une figure artistique caractéristique de la Renaissance par la variété de ses centres d’intérêt et par l’étendue de ses talents. Il exerça une influence durable sur le répertoire ornemental de son temps<ref name="Sambin">{{Lien web | langue= fr | titre= Hugues Sambin : créateur au {{s-|XVI}} | url= http://www.proantic.com/magazine/hugues-sambin-createur-au-xvie-siecle/ | site= [http://www.proantic.com proantic.com] | éditeur= Copyright Proantic 2017 | date= 30 janv. 2016 | consulté le= 29 juill. 2017 }}.</ref>.
 
Comme beaucoup d’artistes de son époque, Hugues Sambin réunit de nombreuses qualités : [[menuisier]] (ce terme désigne les artisans qui construisent les meubles), sculpteur, ingénieur hydraulique<ref name="SambinColloque">Colloque : « Autour de la figure d’Hugues Sambin. Un menuisier-architecte du {{s-|XVI}} » (3-5 septembre 2015, Besançon, Université de Franche-Comté).
</ref>, architecte, décorateur ainsi que graveur.
 
Bien qu'il travaille partout en [[France]], il s’est vite imposé dans l’Est de la France<ref name="SambinColloque" />, principalement à [[Dijon]] et [[Besançon]] pendant la seconde moitié du {{s-|XVI}} (où il obtient le titre officiel d’[[architecte]])<ref name="Sambin" />. Il apparaît alors comme l'une des rares personnalités de la région capable de proposer des plans pour la réalisation de [[fortification]]s ([[Salins-les-Bains|Salins-les-Balins]], Dijon) ou de projets pour divers chantiers urbains : On lui attribue notamment certaines maisons de Dijon dont l'[[hôtel Fyot-de-Mimeure]] (1562), la [[maison Maillard]] (1561) ou encore la porte du Scrin de l'ancien [[Parlement de Dijon|parlement de Bourgogne]] (1580). Malgré ces engagements, l'artiste parvient à conserver une intense activité dans la confection de meubles dont plusieurs exemples sont encore exposés dans les musées. Pour autant, on dispose d’assez peu d’éléments sur sa vie et un certain nombre d’œuvres lui sont attribuées sans être authentifiés avec certitude<ref name="Sambin" /> : une [[armoire]] à deux portes aux [[musée des arts décoratifs de Paris|Arts décoratifs de Paris]] et au [[musée du Louvre]] (vers 1580), la table des Gauthiot d'Ancier au [[musée du Temps de Besançon]] et deux autres meubles au [[Château d'Écouen|musée de la Renaissance d’Écouen]] et au [[Metropolitan Museum of Art|Metropolitan Museum]] de [[New York]].
 
Né à [[Gray (Haute-Saône)|Gray]] vers 1520 d’un père [[menuisier]], de la [[Bourgogne (ancienne région administrative)|Bourgogne]] d'[[Saint-Empire romain germanique|Empire]] ou [[Franche-Comté]], il s'initie très tôt à l'art de la [[menuiserie]] et de la [[Charpentier|charpente]], ainsi qu'à l'architecture. Durant l’année 1544, l'artiste travaille dans l'équipe des [[menuisier]]s du [[château de Fontainebleau]], sous la direction du [[Le Primatice|Primatice]], et surtout avec le dessinateur [[Sebastiano Serlio]]<ref name="Sambin" />, qui utilisent notamment la technique italienne du ''designo''<ref name="SambinColloque" />.
 
C'est à la suite de cette expérience que le jeune [[Compagnonnage|compagnon]] fait peut-être un voyage en [[Italie]], car il montrera par la suite une parfaite connaissance de la sculpture et de l'architecture [[Italie|ultramontaine]].
 
[[파일:Capital in the Composite Order and Various Architectural Details MET DP312229.jpg|오른쪽|섬네일|209x209px|Dessin d'un [[Ordre corinthien|chapiteau corinthien]] (1554–60, [[Metropolitan Museum of Art]] de [[New York]]).]]
 
Revenu à Dijon en [[1547]], il épouse la fille de Jean Boudrillet, maître [[menuisier]], dont il reprend, quelques années plus tard, en [[1564]], la direction pratique de l'atelier après avoir été reçu entre-temps maître [[menuisier]] en [[1548]]<ref name="SambinColloque" />. Il sera par ailleurs juré de la [[Corporation sous le royaume de France|corporation]] à plusieurs reprises. À l'époque, l'activité la plus prospère de l'atelier Boudrillet reste la fabrication de meubles et d'[[armoire]]s<ref name="SambinColloque" /> qui, sous l'influence d'Hugues Sambin, seront dès lors conçus suivant les codes graphiques du [[Design|''designo'']] comme une véritable « encyclopédie de l'architecture » de son temps<ref name="Sambin" />. Reconnu, l'artiste devient l’un des chef de file de l’art du mobilier [[Bourgogne (ancienne région administrative)|bourguignon]], surtout actif pour de riches commanditaires de Bourgogne et de Franche-Comté. C'est ainsi qu'en 1550 la ville de Dijon lui commande trois statues pour l’entrée triomphale du [[Liste des seigneurs puis ducs d'Aumale|duc d’Aumale]].
 
Poursuivant son activité de sculpteur, il termine peu avant 1560, la réalisation d'une œuvre sur le [[Jour du jugement|Jugement dernier]], conçue pour orner le portique central de l'[[église Saint-Michel de Dijon]], devenant par la suite, en [[1564]], [[Surintendant des Bâtiments|surintendant]] et conducteurs des travaux effectués en vue de l'accueil du roi [[Charles IX (roi de France)|Charles IX]] à Dijon.
 
[[파일:Hugues_Sambin_-_Œuvre_de_la_diversité_des_termes_dont_on_use_en_architecture.jpg|왼쪽|섬네일|217x217px|[[Frontispice (livre)|Frontispice]] du recueil dessiné par [[Hugues Sambin]] : ''Œuvre de la diversité des termes dont on use en architecture'', imprimé à Lyon, chez Jean Marcorelle et Jean Durand (1572, [[Bibliothèque municipale de Lyon]]).]]
 
Malgré tout, il semble que la mort de son beau-père en 1565 lui fasse perdre le contrôle technique de l'atelier de menuiserie : ''Maistre Sambin'' diversifie alors son activité à titre individuel, s'éloignant probablement de l'atelier Boudrillet, où il ne travaillera plus qu'occasionnellement. Désormais, de plus en plus fréquemment loin de Dijon, il travaille régulièrement, particulier comme dessinateur, ornemaniste, ingénieur et architecte''<ref name="SambinColloque" />.''
 
De passage à [[Lyon]] en 1572, il fait paraître un important recueil constitué de 36 planches gravées, intitulé ''Œuvre de la diversité des termes dont on use en architecture''<ref group="note">Le mot terme désigne dans l'art de la sculpture classique les divers éléments d’architecture sculptés, à l'origine composés d’un buste humain, à défaut du dieu Hermès ou d'être mythologique sans bras, se terminant en gaine (formant parfois un [[piedestal]]).</ref>, qui faisant preuve d’une imagination débridée, représente encore aujourd'hui un travail remarquable de classification des [[Ordre architectural|ordres d’architecture]] suivant le modèle [[Antiquité|antique]]. Ses activités le mème quelques années vers les [[Pays-Bas espagnols]], se faisant alors engager comme sculpteur et menuisier par le [[Duché de Luxembourg|gouverneur de Luxembourg]]. C'est ainsi son influence touchera non seulement les peintres de Bourgogne et de [[Lorraine]], voire d'[[Saint-Empire romain germanique|Allemagne du Sud]], mais également des architectes et des décorateurs, à l'instar de [[Joseph Boillot]] ou [[Wendel Dietterlin]]<ref group="note">Au début des années 1590, les termes proposés Sambin sont devenues des références célèbres. D'autres figures de termes sont proposées par Boillot en 1592, ainsi que des variations bestiales par Dietterlin.</ref>.
 
En [[1571]], l'artiste semble retourner momentanément en [[Franche-Comté|France-Comté]] puis en Bourgogne où il recevra le titre d'[[architecte]] de la ville de Dijon. En [[1581]], les gouverneurs de [[Besançon]] lui commandent la façade sur cour de l'ancien [[parlement de Besançon]] (actuel [[Palais de justice de Besançon|palais de justice]]) dont il supervise les tâches entre 1582 et 1587<ref name="SambinColloque" />, tout en réalisant en parallèle les plans du toit à l'impériale de la [[Lanterne (architecture)|tour de croisée]] de la [[Basilique Notre-Dame de Beaune|collégiale Notre-Dame de Beaune]]<ref name="SambinColloque" />, réalisé entre 1580 et 1588.
 
On peut conclure, qu'Hugues Sambin restera fortement influencé, tout au long de sa carrière, par son passage au sein des équipes de [[Château de Fontainebleau|Fontainebleau]]. Le système ornemental élaboré par [[Rosso Fiorentino|le Rosso]] et le [[Le Primatice|Primatice]] notamment dans la [[Galerie François-Ier (château de Fontainebleau)|galerie François 1세]], explose littéralement dans l'ensemble de son œuvre. Marqué pour toujours par ce court séjour [[Fontainebleau|bellifontain]]<ref name="Sambin" />, ses racines bourguignonnes n’en demeurent pas moins présentes, s'exprimant notamment par sa prédilection pour certains ornements régionaux comme le fameux « chou bourguignon ''» ''ou encore l'emploi de [[rinceau]]x de [[Lierre grimpant|lierre]] en lieu et place des traditionnels motifs d’[[Feuille d'acanthe|acanthe]]<ref name="Sambin" />.
 
Parallèlement, les [[Terme (sculpture)|termes]] (éléments d’architecture sculptés, composés d’un buste humain se terminant en [[Gaine (statuaire)|gaine]]) dessinés et sculptés par Hugues Sambin connaissent un grand succès en France, dans la seconde moitié du {{s-|XVI}}, en particulier à l’échelle du mobilier [[Lyon|lyonnais]], qui vient dès lors très semblable, du point de vue décoratif, au mobilier bourguignon<ref name="Sambin" /> : un véritable « style Sambin ''»'' est ainsi né, marquant la seconde moitié {{s-|XVI}}<ref name="Sambin" />.
 
C'est par des comparaisons effectuées avec son recueil, qu'on a attribué à l'artiste non seulement, tout meuble mélant des [[Terme (sculpture)|termes]] à une accumulation de [[Ornement (architecture)|motifs ornementaux]] mais également, par extension, toute architecture au décor exubérant<ref name="Sambin" />. Pour autant, il persiste d'assez grandes difficultés à prouver les commandes ou œuvres réalisées par Hugues Sambin et son atelier, car elles ont été imitées ou copiées sans vergogne y compris au {{s-|XIX}} sous le nom de « Style Henri II »<ref name="SambinColloque" />.
 
== Le Mobilier ==
Durant toute la Première [[Renaissance]] française, le mobilier n'évolue guère et reste dans la continuité du [[Style Louis XII]]. Pour autant, l'ornementation abandonne définitivement les derniers éléments [[Architecture gothique|gothiques]] du style précédent tels que les pinacles, les ''orbes voie'' [[Art gothique|flamboyants]] ou encore les [[Accolade (architecture)|arcs brisés en accolade]] pour une décoration de purement Renaissance composée principalement de [[Médaillon (architecture)|médaillons]] et d'[[Arabesque (beaux-arts)|arabesques]]<ref>{{Ouvrage | langue= fr | auteur1= Monique Blanc | titre= Le mobilier français | sous-titre= Moyen Âge-Renaissance | passage= | lieu= Paris | éditeur= Massin | année= 1999 | pages totales= 92 | format livre= relié sous jaquette, {{Dunité|21|28|cm}} | isbn= 978-2-7072-0346-5 | lire en ligne= }}.</ref>.
 
Il faut attendre le règne d'[[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pour constater une réelle évolution<ref name="Oursel">Hervé Oursel et Julia Fritsch, ''Henri II et les arts : Actes du colloque international, école du Louvre et musée national de la Renaissance-Écouen'', La Documentation Française, coll. « Rencontres de l'École du Louvre », 2003.</ref> avec des productions aux formes architecturales marquées<ref name="nitescence">http://www.nitescence-meublesetpatine.com/siege-style-henri.php</ref>, le plus souvent ornées d'incrustation de marbre et de plaques en camaïeu de bronze. Cette période marque d'ailleurs l'apparition de nouveaux meubles comme le [[caquetoire]] (ou caqueteuse), la [[chaise à bras]], la chaise à [[vertugadin]], le siège tenaille<ref name="nitescence" /> (également dit [[Jérôme Savonarole|savonarole]], ou [[faudesteuil]]) et le retour en force du siège pliant à piétement en X, apparus dès le {{s-|VII}} ([[Trône de Dagobert|Trône en bronze du roi Dagobert]])<ref name="Oursel" />.
 
Ces créations de la Renaissance imitées dès le milieu du {{s-|XIX}} sous l'appellation [[style Henri II (XIXe siècle)|style Henri II]], fait qu'aujourd'hui les meubles authentiques sont devenus rares et restent extrêmement restaurés et modifiés<ref name="nitescence" />.
 
=== Techniques et outillage ===
* Le [[Garnissage (meuble)|garnissage]] : Pour les sièges, les surfaces dures en bois naturel seront progressivement remplacées par une garniture de cuir, de [[tapisserie]] ou de tissu fin. Tendu sur des sangles et rembourré de feutre.
* La [[marqueterie]] : Au {{s-|XIV}}, la [[marqueterie]] est remise à la mode en [[Toscane]]. Le bois de rapport d’une épaisseur de 3 à {{unité|5|millimètres}} est taillé soit au [[ciseau]], soit avec des instruments de sciage, proches des outils du [[Menuiserie|menuisier]]. Le décor en placage recouvre entièrement un support en bois ordinaire. Les éléments sont découpés, ombrés à la chaleur et ajustés pour être collés sur leur support les uns après les autres. Le {{s-|XV}} est une époque importante dans le développement du décor marqueté. À [[Florence]], une école va se créer, spécialisée dans le décor marqueté : les ''[[Intarsia]]toris''. [[Benedetto da Maiano]] fut le représentant le plus illustre du procédé à incrustations : l’''[[intarsia]]''. Les [[incrustation]]s (Le ''tarsia atoppo'' et ''tarsia certosina''). Les [[Entrelacs (ornement)|entrelacs]] géométriques sont des bandes préparées en bloc et incrustées dans la masse du bois (''tarsia atoppo''). La représentation d'une ville traitée en perspective, est le sujet préféré des artistes du Nord de l'[[Italie]] et est réalisée avant le montage et incrustée ensuite (''tarsia certosina'').
* Technique dite « mauresque » : Cette technique consiste à faire des incisions profondes que l'on remplit de filets de pâte blanc [[ivoire]] dits à « [[Style mauresque|la mauresque]] » ou « mauresque blanche »; les motifs préférés sont les enroulements de [[rinceau]]x très fins.
 
=== Meubles courant ===
<gallery widths="250" heigt="200px" perrow="3" mode="packed">
Chambre Renaissance du château d'Azay-le-Rideau, lit restitué.JPG|Lit à quenouille (copie de 1840, [[château d'Azay-le-Rideau]]).
Écouen (95), château, étage, appt du connétable 3.jpg|La [[Chaire (église)|Chaire]] (vers 1530, [[château d'Écouen]]).
Écouen (95), château, rdc, chambre de Catherine de Medicis 6.jpg|[[Coffre]] dit de [[Catherine de Médicis]] ({{s-|XVI}} quart du {{s-|XVI}}, [[château d'Écouen]]).
Coffre de mariage aux armes des familles Bertholon et Bellièvre.jpg|Coffre de mariage aux armes des familles Bertholon et Bellièvre (1512, [[musée des Beaux-Arts de Lyon]]).
Écouen (95), château, étage, appt du connétable 8.jpg|Dressoir de [[Château du Grand Jardin|Joinville]] (1524, [[château d'Écouen]]).
Écouen (95), château, rdc, chambre de Catherine de Medicis 4.jpg|[[Buffet (meuble)|Buffet]] à deux corps (fin {{s-|XVI}}, [[château d'Écouen]]).
Buffet à deux corps - MBA Lyon 2015.jpg|[[Buffet (meuble)|Buffet]] à deux corps (vers 1560/1570, [[musée des Beaux-Arts de Lyon]]).
Armoire à deux corps aux divinités.jpg|[[Armoire]] à deux corps aux divinités (fin {{s-|XVI}}, [[musée des Beaux-Arts de Lyon]]).
Hughes Sambin - Cabinet - Walters 652.jpg|[[Armoire]] d'[[Hugues Sambin]] (vers 1580, [[Walters Art Museum|Baltimore]]).
SchlossBloisSchlafzimmerdesKoenigs.jpg|Lit de la chambre dite « de la Reine » (milieu {{s-|XVI}}, [[château de Blois]]).
</gallery>
* Le [[Coffre]] (ou ''arche'') : élément incontournable du mobilier, il sert tout à la fois d'[[armoire]], de banc et de bagage. Il pouvait ou non être équipé de pieds et de poignées ou d'une ou plusieurs serrures et n'a souvent en façade qu'un seul panneau sculpté<ref>{{ouvrage| langue= fr | auteur= Paul Delsalle | titre= Le cadre de vie en France aux {{XVIe}}, {{XVIIe}} et {{s-|XVI}}s | passage= 56 | éditeur= Ophrys | date= 1995 | isbn= | lire en ligne= }}.</ref>.
* Le [[Buffet (meuble)|Buffet]] : Au {{s-|XVI}} l'usage du buffet armoire devient plus courant, aux dépens du [[Dressoir (meuble)|dressoir]] plus ostentatoire et conservant moins efficacement les vêtements et les objets précieux. Le buffet, utilitaire continue à être utilisé dans la salle à manger et dans les cuisines. Il est ensuite garni de tiroirs où l'on rangera les couverts et ustensiles utiles à la table ou à la cuisine<ref name="hist">[http://www.cosmovisions.com/artBuffet.htm Page de présentation historique du « Buffet »]</ref>. S'il conserve la même composition qu'au [[Moyen Âge]], le corps supérieur est légèrement plus petit et en retrait par rapport au corps inférieur.
* L'[[armoire]] : On appelle alors définitivement [[armoire]] les meubles à deux corps uniformes, formés de quatre vantaux. L'armoire prend peu à peu la place du [[Dressoir (meuble)|dressoir]] dans les chambres à coucher et les salons. Elle est constituée de deux corps et comporte souvent une décoration abondante.
* [[Chaire (église)|Chaire]] : à cette époque le dossier peut cacher un [[coffre]]<ref name="Storck">{{Ouvrage | langue= fr | auteur1= J. Storck (impr. de L. Maretheux) | titre= Le Dictionnaire Pratique de Menuiserie, Ebénisterie, Charpente | passage= | lieu= Paris | éditeur= Lardy, S. | année= 1900 | pages totales= | format livre= {{Dunité|280|200|mm}} | isbn= 9782851010711 |lire en ligne= }} .</ref>.
* Le [[Lit (mobilier)|lit]] : Élément central de la chambre, le lit est placé sur une [[estrade]]. Ainsi surélevé, il est protégé du froid du sol, alors en tomette.toujours surmonté d'un baldaquin, supporté par des colonnes d'angles, généralement tournées (Lit à quenouille).
* le [[Dressoir (meuble)|dressoir]] : Sa fonction est proche de celle du buffet d’apparat : il s’agit de deux meubles ostentatoires liés aux obligations sociales de l’hôte qui doit exhiber ses richesses et faire honneur à ses invités. Le buffet comme la credenza italienne est un assemblage de tablettes disposées en gradins et recouvertes d’une étoffe de grande qualité généralement blanche, destiné à présenter un ensemble de pièces d’apparat ou un service. Si le buffet et la table de banquet étaient de simples œuvres de menuiserie éphémères, le dressoir est plus pérenne et, doté de portes, il demeure dans la grande salle ou dans la chambre une fois le repas achevé<ref name="MNdeR">Musée national de la renaissance : [http://www.musee-renaissance.fr/homes/home_id20463_u1l2.htm Les collections]</ref>.
 
=== Nouveaux meubles ===
<gallery mode="packed">
MAKK franz. Armlehnstuhl 16.Jhd.jpg|Chaise à bras (milieu {{s-|XVI}}, [[Musée des arts appliqués (Cologne)|musée des arts appliqués de Cologne]]).
Écouen (95), château, étage, appt du connétable 4.jpg|[[Table]] « en éventail » ({{3e}} quart du {{s-|XVI}}, [[château d'Écouen]]).
Écouen (95), château, étage, appt du connétable 7.jpg|[[Table]] « en éventail » ({{3e}} quart du {{s-|XVI}}, [[château d'Écouen]]).
Sgabello MET ES10070.jpg|[[Table]] « en éventail » ({{3e}} quart du {{s-|XVI}}, [[Metropolitan Museum of Art]]).
Écouen (95), château, étage, chambre de Madeleine de Savoie 2.jpg|[[Cabinet (meuble)|Cabinet]] en [[Maroquin]] (Premier quart du {{s-|XVII}}, [[château d'Écouen]]).
Sgabello (one of a pair) MET DP269026.jpg|[[Chaise à vertugadin]] (vers 1575–1600, [[Metropolitan Museum of Art]]).
Sgabello (one of a pair) MET ES7837.jpg|Dossier de [[chaise à vertugadin]] (vers 1575–1600, [[Metropolitan Museum of Art|MET]]).
French - "Sgabello"-Type Chair with Scrolls - Walters 6525 - Three Quarter.jpg|[[Chaise à vertugadin]] (vers 1575–1600, [[Walters Art Museum|Baltimore]]).
</gallery>
* [[Cabinet (meuble)|Le cabinet]] : apparaît durant le dernier quart du {{s-|XVI}}<ref name="MNdeR" />. À l’origine conçu comme une [[écritoire]] pourvue de compartiments destinés à abriter des lettres ou des documents, il est muni de poignées latérales permettant de le transporter et de le poser sur une table. L’architecture des années 1580 a fortement influencé ce style de meuble où l’on retrouve le même style puissant et sobre.
* [[Caquetoire|La Caquetoire]] ou caqueteuse<ref name="Boccador">{{Ouvrage | langue= fr | auteur1= Jacqueline Boccador | titre= Le mobilier français du Moyen Âge à la Renaissance | passage= | lieu= Paris | éditeur= édition d'Art Monelle Hayot | année= 1988 | pages totales= 352 | format livre= {{Dunité|21.5|30|cm}} | isbn= 9782903824136 | lire en ligne= }}.</ref> : est un petit [[Chaise|siège]] rudimentaire de l’époque [[Style Renaissance|Renaissance]] utilisé pour ''caqueter'' (bavarder). Apparu avec les meubles de [[seconde Renaissance française|style Henri II]], c’est le premier spécimen de la [[chaise à bras]] (non rembourré) munie d’[[accotoir]]s au {{s-|XVI}} ou aussi du [[faudesteuil]] devenu le [[fauteuil]] en 1636<ref name="MNdeR" />. Son dossier est alors incliné d'environ 12 degrés afin d'en augmenter le confort.
* [[Chaise à bras]] : est un [[Siège (meuble)|siège]], dérivé de la [[caquetoire]] et du [[fauteuil]], munie d’[[accoudoir]]s et d’un dossier dont la hauteur est réduite et ne dépasse plus la tête de l'occupant. C'est sur ce type de siège qu'apparaissent les premières [[Garnissage (meuble)|garnitures]] en [[France]] (en Italie elles apparaissent plus tôt).
* [[Chaise à vertugadin]] : ou vertugale est une réplique du [[Style Renaissance#Nouveaux meubles|sgabello]] Italien<ref name="Boccador" />.
* Siège à tenaille ou dantesca (réminiscence du faudesteuil ployant des {{sp-|XII|et|XIII|s}})<ref name="Boccador" />.
* La [[Table]] : est une « invention » de la [[Renaissance]]. Le [[Moyen Âge]] les ignorait qui dressait un plateau volant sur des [[tréteau]]x lorsqu'il en avait besoin. Elles deviennent donc au {{s-|XVI}} un meuble construit, réalisé en bois<ref name="Ecouen">[[Château d'Écouen]] abritant le musée de la renaissance d'Écouen [http://www.musee-renaissance.fr/pages/page_id18388_u1l2.htm <nowiki>[1]</nowiki>]</ref> ou en pierre<ref>[http://www.metmuseum.org/toah/ho/08/eusts/ho_58.57.htm Table Farnèse]</ref>, dont le plateau est fixé à ses extrémités sur des pieds souvent réunis par une [[traverse]] en arcature ou en motif ajouré. La table « en éventail », dont le modèle est probablement originaire d'[[Italie]], constitue l'apothéose de cette inventivité. Les pieds disposés de part et d'autre du plateau, s'évasent progressivement depuis la partie basse jusqu'à la partie supérieure, prenant alors la forme d'un [[éventail]], prétexte à présenter un décor richement sculpté de [[volute]]s, [[rinceau]]x et fruits, souvent rattachés en leur milieu par un [[pilastre]] cannelé<ref name="MNdeR" />.
 
=== Les émaux peints de Limoges ===
<gallery mode="packed">
Pierre Courteys - Coffret - Scènes de l'Ancien Testament (émail peint sur cuivre, bois doré, Limoges, 1550-1560).jpg|Coffret avec scènes de l'[[Ancien Testament]] par [[Pierre Courteys]] (1550-1560, [[musée du Louvre|Louvre]]).
Courteys Dish with the Gathering of Manna.jpg|''Coupe de la [[Manne|récolte de la Manne]]'', [[Pierre Courteys]] (vers 1550, [[musée national de Varsovie]]).
Pierre Reymond - Aiguière Le Festin de Balthasar-02.jpg|Le [[L'inscription sur le mur|''Festin de Balthasar'']] par [[Pierre Reymond]] (Vers 1550-1575, [[musée du Louvre|Louvre]]).
Plateau d’aiguière - Moïse et Jethro - détouré.jpg|Plateau d’[[aiguière]] avec [[Moïse]] et [[Jethro]] par [[Pierre Reymond]] ([[musée des beaux-arts de Lyon]]).
Alexander Ordering Homer's Iliad to Be Placed in a Coffer.jpg|''Alexandre fait placer l'Iliade d'[[Homère]] dans un coffre très précieux'' par Jean Pénicaud III (fin xvie, [[musée d'art de Saint-Louis]]).
Joshua Nouailher Louvre MR2526.jpg|''[[Josué]]'' (l'un des neuf preux), [[Colin Nouailher]] (vers 1550, [[musée du Louvre|Louvre]]).
Plate September MBA Lyon L439.jpg|''Le mois de Septembre'', Pierre Reymond (1562, [[musée des beaux-arts de Lyon]]).
Adoration of the Infant Christ MET ES6637.jpg|''L'adoration de l'enfant Jésus'', Jean II Pénicaud (vers 1550, [[Metropolitan Museum of Art|New York]]).
Abram Being Presented with Bread and Wine by Melchizedek.jpg|Plaque émaillée de l'école de [[Pierre Courteys]] (vers 1580, [[Saint Louis Art Museum]]).
</gallery>
[[파일:Clouet-montmorencyanne.jpg|왼쪽|섬네일|278x278px|[[Anne de Montmorency (1493-1567)|Anne de Montmorency]] par [[Léonard Limosin]] (1556, [[musée du Louvre]]).]]
Surnommé ''opus lemovicense'', « l'œuvre de [[Limoges]] » en [[latin]], la technique de l'[[Émail de Limoges|émail]] sur cuivre avait fait la fortune de cette ville aux {{sp-|XII|et|XIII|s}}, avec ses célèbres émaux [[champlevé]]s, pseudo-champlevés ou [[cloisonné]]s<ref name="emauxLimMÂ">{{Article | langue= fr | auteur1= | titre= Les Émaux de Limoges au Moyen Âge | périodique= Dossier de l'art | numéro= 26H | date= nov.-déc. 1995 | issn= | lire en ligne= | pages= }}.</ref>. Après avoir connu un vif succès en [[Europe]] occidentale, la ville est touchée de plein fouet par la [[guerre de Cent Ans]] avant d'être mise à sac par les armées d'[[Édouard de Woodstock]] au mois de septembre 1370<ref>{{ValBor}}</ref>. La production semble alors avoir cessé pendant plus d'un siècle avant de réapparaître dans le dernier quart du {{s-|XV}}, mais selon une technique différente, les émaux sont désormais peints sur des plaques de cuivre. Sans que soit connus les circonstances de sa renaissance ni les liens éventuels avec des expériences réalisées au {{s-|XV}} en [[France]], en [[Flandre des États|Flandre]] ou en [[Italie]], la technique apparait d'emblée parfaitement maîtrisée<ref name="EmauxPeints">{{Lien web|langue=fr | titre= Les émaux peints de Limoges | url= https://beaux-arts.dijon.fr/sites/default/files/Collections/pdf/les_emaux_peints_de_limoges.pdf | site= [https://beaux-arts.dijon.fr/ beaux-arts.dijon.fr] | éditeur= société I-com interactive | date= fév. 2017 | consulté le= 18 juin 2017}}.</ref>. Les émaux peints devinrent, comme en leur temps les [[Champlevé|émaux champlevés]], le monopole des ateliers [[Limoges|limousins]]<ref name="emauxLimMÂ" />.
 
Les premiers émaux peints sont exécutés au moyen d’[[Émail (verre)|émaux]] de couleur sur un [[Émail (verre)|émail]] qui, étendu sur une plaque de cuivre, sert de support. Ce sont plutôt des peintures sur verre que des émaux translucides. Aussi n’est-il pas étonnant de trouver à l’origine de la peinture en émailles les verriers de [[Murano]], en [[Italie]] et les peintres de [[Vitrail|vitraux]] de [[Limoges]]. Mais, tandis qu’en [[Italie]] l’[[Émail de Limoges|émail]] peint ne fit pas de progrès, il subit à [[Limoges]] de nombreux perfectionnements. Alors que beaucoup d’artistes italiens peignaient leurs émaux sur argent, les émailleurs [[Limoges|limousins]] adoptèrent le cuivre en minces feuilles, moins coûteux et par suite, d’une vente plus facile. Le caractère commercial est en effet, très accentué dans les premiers produits sortis des ateliers de [[Limoges]]<ref name="emaux1900">{{Article | langue= fr | auteur1= | titre= Les émaux peints | périodique= La Science Illustrée | numéro= 653 | date= 2 juin 1900 | issn= | lire en ligne= | pages= }}.</ref>.
 
[[파일:Léonard Limosin - Resurrection - WGA13044.jpg|오른쪽|섬네일|288x288px|La résurrection par [[Léonard Limosin]] (1553, [[Musée du Louvre|Louvre]]).]]
 
L'émail peint devient, au {{s-|XVI}}, la spécialité presque exclusive des émailleurs de [[Limoges]]. Ils sont en effet les seuls à avoir tiré parti de la technique de l'[[Émail de Limoges|émail]] peint pour faire de leurs créations les supports de représentations figurées<ref name="EmauxPeints"/>.
 
Si l'émail, qui ne résiste pas aux chocs, est adapté pour des objets de dévotion, il ne convient guère pour une vaisselle utilitaire : [[aiguière]]s, coupes couvertes et assiettes sont donc des objets d'apparat, destinés à être exposés et à manifester, comme les pièces d'[[orfèvrerie]] ou les [[Majolique|majoliques italiennes]], la richesse, le raffinement et la culture de leur propriétaire<ref name="EmauxPeints" />.
 
Les années 1530-1540 sont maquées par de nombreux changements et représente un véritable âge d'or. Le revers des plaques est désormais recouvert d'un ''contre-émail'' translucide. Dans la continuité du [[style Louis XII]], les émailleurs perpétuent la production d'objets à caractère religieux mais se mettent à créer également de la vaisselle : coupes, [[Salière (ustensile de cuisine)|salières]] ainsi que des objets d'usage personnel, comme des coffrets<ref name="EmauxPeints" />.
 
La [[grisaille]] devient un mode privilégié d'expression et les thèmes [[profane]]s ou [[Mythologie|mythologiques]] font leur apparition. Enfin, le style de la [[Renaissance]], connu par l'intermédiaire des [[gravure]]s qui inspirent les compositions, est désormais adopté<ref name="EmauxPeints" />.
 
L'étude des pièces, parfois signées, [[Monogramme|monogrammées]] ou marquées de [[poinçon]]s, et les mentions relevées dans les archives [[Limoges|limougeaudes]], permettent de cerner les principales personnalités artistiques : Les Pénicaud, Colin Nouailher, [[Pierre Reymond]] ou [[Pierre Courteys]]. Toutefois des congusions demeurent en raison de fréquentes homonymies : Les initiales I.C. pourraient aussi bien recouvrir plusieurs ''Jean Court'' dit Vergier. Le rôle des collaborateurs et la production des ateliers secondaires reste assez peu documentés<ref name="EmauxPeints" />.
 
L'émailleur le plus célèbre est [[Léonard Limosin]], par la diversité et la qualité de sa production, en particulier ses remarquables portraits. Introduit par l'évêque de Limoges [[Jean de Langeac]] à la [[cour de France]] vers 1535, il travaille pour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et [[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et pour de grands personnages comme le [[Anne de Montmorency (1493-1567)|connétable de Montmorency]]. À leur imitation, le goût pour l'émail touche une clientèle [[Aristocratie|aristocratique]]<ref name="EmauxPeints" />
 
Au milieu du {{s-|XVI}}, l'[[émail de Limoges]] est apprécié dans toute l'[[Europe]]. C'est ainsi qu'un service, comportant une [[aiguière]], un plateau et plusieurs coupes, réalisé pour la famille Tucher de Nuremberg, fut envoyé à [[Limoges]] entre 1558 et 1562 pour être émaillé dans l'atelier de [[Pierre Reymond]], avant d'être monté par l'orfèvre [[Wenzel Jamnitzer]].
 
Au début du {{s|XVII}}, la production reste importante quantitativement, mais elle n'atteint plus qu'exceptionnellement les niveaux de qualité et d'inventivité du siècle précédent : Elle s'adresse alors à une clientèle moins aristocratique<ref name="EmauxPeints" />.
 
=== Bijoux et orfévrerie ===
En orfévrerie le maitre Pierre Mongo exécute des coffrets recouverts de nacre sur âme de bois. Les montures en argent doré soutiennent de petits portraits en tondo répartis sur le pourtour.
 
Sous l'impulsion d'[[Henri II (roi de France)|Henri II]] puis de [[Charles IX (roi de France)|Charles IX]] l'orfévrerie devient un art très abouti et recherché car il résume en peu de place un art raffiné et dont les œuvres sont faciles à transporter.
 
[[François Briot]] est considéré, avec sa fameuse [[aiguière]] et son bassin, comme le chef de file de l'école lyonnaise de la poterie d'étain. Il a vraisemblablement quitté [[Lyon]] vers 1572 et se retrouve à [[Damblain]], où il est signalé en 1576 et 1578. Outre les monnaies du comté de [[Montbéliard]], il a gravé quelques [[médaille]]s, tant à [[Montbéliard]] qu'à [[Stuttgart]], une pierre précieuse pour la [[Liste des monarques d'Angleterre|couronne d'Angleterre]]. Comme [[potier d'étain]], outre le bassin et l'[[aiguière]] de la « tempérance », qui appartiennent respectivement au [[musée du Louvre]] et au [[Château d'Écouen|musée d'Écouen]], nous lui devons l'[[aiguière]] dite « de [[Mars (mythologie)|mars]] », dont un exemplaire est conservé au [[Germanisches Nationalmuseum|musée de Nuremberg]], et son bassin, dont le [[Musée d'archéologie et d'histoire naturelle de Montbéliard|musée de Montbéliard]] possède un exemplaire. Nous connaissons l'existence d'un moule pour vase et d'un autre pour salière.
 
=== Art du vitrail ===
[[Noël Bellemare|Noel Bellemard]] : modéles et cartons pour le Jugement de Salomon et son vitrail à [[Église Saint-Gervais-Saint-Protais de Paris|Saint Gervais-Saint Protais de Paris]].
 
[[Engrand Leprince]] : Vitrail [[Charles V le Sage|Charles V]], à [[L'Isle-Adam|l'Isle Adam.]]
 
== 언어와 문학 ==
[[파일:Villers-Cot.jpg|오른쪽|섬네일|283x283px|Copie du préambule et des articles toujours appliqués de l'[[Ordonnance de Villers-Cotterêts]].]]
프랑수아 1세는 [[퐁텐블로]]에 자리를 잡으며, 그곳을 왕실 도서관으로 바꾼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어]]에 대한 여러가지 작업을 한다: en [[1539]], il signe l'[[ordonnance de Villers-Cotterêts]], qui donne à la langue française son statut de [[langue]] du [[droit]] et de l'[[Administration française|administration]]. L'un des traits les plus caractéristiques de la renaissance en France, et des plus durables, est l'apparition du [[français]] comme [[langue officielle]] unique, statut accordé par le souverain. Pourtant, l'immense majorité de la population – surtout dans les provinces – continue de parler des [[dialecte]]s (picard, normand{{etc.}}) et des langues différentes du français (tel est le cas par exemple des territoires de langue d'oc où l'on parle l'[[occitan]]). Parallèlemeent, [[Joachim Du Bellay|Du Bellay]] dénonçait l'italianisation de la langue française.
 
Parmi les écrivains les plus célèbres de la Renaissance française peuvent être cités [[François Rabelais]], [[Marguerite de Navarre (1492-1549)|Marguerite de Navarre]], [[Clément Marot]], [[Maurice Scève]], [[Louise Labbé]], [[Pierre de Ronsard]], [[Joachim du Bellay]], [[Étienne de La Boétie]] et [[Michel de Montaigne]].
 
참조 :
* [[프랑스어의 역사]]
* [[16세기 프랑스 문학]]
* [[Liste d'écrivains de langue française par ordre chronologique#Nés au XVe.C2.A0siècle|Écrivains français nés au {{s-|XV}}]]
* [[Liste d'écrivains de langue française par ordre chronologique#Nés au XVIe.C2.A0siècle|Écrivains français nés au {{s-|XVI}}]]
 
== Éducation ==
L'[[Ancienne université de Paris|université de Paris]], bien que préservant le prestige acquis au {{s|XIII}} ([[Thomas d'Aquin]]), est en retard par rapport au mouvement de renaissance d'autres [[université]]s [[européenne]]s notamment [[université de Salamanque|Salamanque]], Louvain. Le renouveau devient effectif dans les années 1530, lorsqu'on sent alors l'effervescence intellectuelle se manifester. [[Paris]] est alors la principale ville universitaire d'[[Europe]], avec de nombreux collèges (environ 80). [[Ignace de Loyola]] décide de se former à l'[[Ancienne université de Paris|université de Paris]], essentiellement en raison du prestige que cette université conserve en [[Europe]], mais aussi en raison d'une plus grande tolérance. [[François Xavier]], disciple d'[[Ignace de Loyola]], reçoit également sa formation à l'université de [[Paris]].
 
Les [[Jésuite]]s reprennent cette tradition de l'éducation, en respectant le legs de Thomas d'Aquin : [[Pierre Favre (théologien)|Pierre Favre]] est un helléniste, et connaît très bien la philosophie [[scolastique]], ainsi que la [[philosophie]] d'[[Aristote]].
 
Voir :
* [[Éducation à l'époque moderne]]
* [[Histoire de l'éducation en France]]
 
== Grandes découvertes : Les expéditions françaises ==
{{Article détaillé|Grandes découvertes}}
[[파일:GiovanniVerrazano.jpg|왼쪽|섬네일|'''Giovanni da Verrazzano''' (parfois écrit ''Verrazano''<ref name="MBG51">Manuel Ballesteros Gaibrois, ''Découverte de l'Amérique'', Vrin, 1968 - 339 pages, {{p.|51 et suiv.}} ([https://books.google.fr/books?id=ATSUwk31nzMC&pg=PA51 Lire en ligne]).</ref>), en [[français]] '''Jean de Verrazane''' ou '''Jean Verazani''', est un [[explorateur]] d'origine italienne longtemps au service de [[François Ier de France|François 1세]]. Suivant la controverse, il serait né aux environs de [[1485]] dans la région de [[Florence]]<ref>{{Article|langue=anglais|auteur1=|titre=Giovanni da Verrazzano {{!}} Italian navigator|périodique=Encyclopedia Britannica|date=2008|issn=|lire en ligne=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Giovanni-da-Verrazzano|consulté le=2017-01-06|pages=}}.</ref> ou à Lyon<ref>[[Jacques Habert (homme politique)|Jacques Habert]], ''La Vie et les Voyages de Jean de Verrazane'', Cercle du livre de France, Montréal, 1964, {{p.|182}}.</ref>{{,}}<ref>''Jean de Verrazane : un Lyonnais découvre le site de New-York'' par Alain Bouchet, professeur honoraire à l’université Claude Bernard Lyon-I, 2006.</ref>{{,}}<ref>[http://newyorkcity.blogs.sudouest.com/tag/giovanni+da+verrazano Commentaire sur la fresque à Lyon].</ref> mais meurt bien en [[1528]] aux [[Antilles]].]]
 
La participation de la [[France]] aux [[grandes découvertes]] s'est faite, pour les raisons déjà évoquées, avec un retard par rapport aux pays du sud de l'Europe.
 
Alors que le [[Portugal]] a implanté une première [[Empire colonial portugais|colonie]] en Afrique du Nord dès [[1415]], et s'est lancé dans des explorations autour de l'[[Afrique]], alors que les navigateurs espagnols ont atteint l'Amérique du centre et du sud avant la fin du {{s|XV}}, la France attend la fin [[1523]], pour envoyer [[Giovanni da Verrazzano]], en [[français]] Jean de Verrazane<ref name="MBG51" /> explorer la zone comprise entre la [[Floride]] et [[Terre-Neuve]]. Cette expédition fut missionnée par le roi [[François Ier (roi de France)|François 1세]] dans le but d'y découvrir un accès donnant sur l'[[océan Pacifique]].
 
L'armement du navire de [[Giovanni da Verrazzano|Jean de Verazzane]], ''[[La Dauphine (vaisseau)|La Dauphine]]'' a lieu au [[Le Havre|Havre]]. Il appareille de [[Dieppe (Seine-Maritime)|Dieppe]] en juin 1523, contourne la Bretagne, puis fait route au sud vers le [[golfe de Gascogne]]. Il longe la côte nord de l'[[Espagne]] et met le cap sur [[Madère]] où il fait escale pour se ravitailler. Après avoir reporté son départ à deux reprises, le 17 janvier 1524, à bord de ''La Dauphine'', il entreprend alors la traversée de l'[[Atlantique]], à la tête d'un équipage d'une cinquantaine de marins, qu'il complète près de ''[[Cape Fear (cap)|Cape Fear]]'' le {{1er}} mars 1524.
 
Après un bref mouillage, il longe la côte de ce qui est maintenant la [[Caroline du Nord]] en direction du nord et croit apercevoir l'océan Pacifique derrière une étroite bande de terre. Il ne s'agissait en réalité que du [[lagon]] de la [[baie de Pamlico]], long de cent trente kilomètres et dont la largeur atteint par endroits {{unité|48|kilomètres}}, séparé de l'Atlantique par les ''[[Outer Banks]]'', une barrière d'îles sablonneuses. Cette erreur conduisit les dessinateurs de cartes, à commencer par [[Vesconte Maggiolo]], en 1527, et le frère de Giovanni, [[Girolamo da Verrazzano]], en 1529, à représenter l'[[Amérique du Nord]] quasiment coupée en deux parties reliées par un [[isthme]]. Cette interprétation erronée mit un siècle à être corrigée.
 
Plus loin, au nord, Verrazzano découvre, le 17 avril 1524, la [[baie de New York]], qu’il nomme « [[Nouvelle-Angoulême]] »[[Giovanni da Verrazzano#cite note-8|8]] (de nos jours, le [[pont Verrazano-Narrows]] rappelle cette visite). Il prolonge son voyage vers l'est, en direction du [[Maine (États-Unis)|Maine]], puis de Terre-Neuve et rentre en France.
 
{{Référence incomplète|De retour après six mois de voyage, Verrazzano prépare un nouveau départ pour trouver un passage vers l'[[Asie]]. Cependant, ses navires sont réquisitionnés pour faire la guerre et la capture de François 1세 à la [[Bataille de Pavie (1525)|bataille de Pavie]] met fin à ce projet}}<ref>Wroth, {{op. cit.}} {{p.|12-13}}.</ref>.
 
[[파일:Wpdms verrazano voyage map 2.jpg|섬네일|오른쪽|Voyage de [[Giovanni da Verrazzano|Jean de Verrazane]] en 1524.]]
 
En 1525, Girolamo – le frère de Giovanni Verrazzano – dessine, à Lyon, une carte nautique de la [[Mer Méditerranée|Méditerranée]].
 
{{Référence incomplète|Pendant la captivité du roi de France, Verrazzano fréquente les cours de [[João III]] du Portugal et [[Henri VIII]] d'Angleterre. Alors que l'[[Europe]] apprend le récit de la [[circumnavigation]] de [[Fernand de Magellan|Magellan]] et la découverte des [[Moluques]], l'Espagne envoie, en avril 1526, [[Sébastien Cabot]] trouver un chemin vers le Pacifique. Au printemps de 1526, Verrazzano est de retour en France où un nouveau projet se dessine sous les auspices de l'amiral [[Philippe Chabot]] et de l'armateur [[Jean Ango]]<ref>Wroth, {{op. cit.}}, {{p.|273}} et suiv.</ref>.}}
 
{{Référence incomplète|En juin 1526, Verrazzano quitte de nouveau les mers d'Europe avec son frère Girolamo et trois navires pour tenter de passer le [[cap de Bonne-Espérance]]. Une tempête et une mutinerie empêchent les frères Verrazzano de progresser, mais le troisième navire atteint l'[[océan Indien]]. Voulant gagner [[Madagascar]], celui-ci pique vers l'est et le nord jusqu'à [[Sumatra]] avant de rebrousser chemin vers les [[Maldives]]. L'équipage fait naufrage à Madagascar d'où quelques survivants gagnent le [[Mozambique]]. Pendant ce temps, les frères Verrazzano remontent la côte d’[[Afrique]] pour se rendre au [[Brésil]], où ils font cargaison de [[Pernambouc (arbre)|pernambouc]]. En septembre 1527, ils rentrent en France<ref>Wroth, {{op. cit.}}, {{p.|228-235}}.</ref>.}}
 
Un dernier voyage en 1528, raconté par [[Girolamo da Verrazzano]], les mène aux [[Antilles]] (peut-être en [[Guadeloupe]])<ref>Michel Mollat, ''Giovanni et Girolamo Varrazano, navigateurs de François 1세'' Paris, 1982, {{p.|122}}.</ref> où Giovanni aurait été tué par des indigènes [[anthropophage]]s. [[파일:Jacques Cartier 1851-1852.jpg|섬네일|왼쪽|Portrait de Jacques Cartier par [[Théophile Hamel]], 1844, d'après un portrait aujourd'hui disparu produit en 1839 par [[François Riss]] (1804-1886).—&nbsp;On ignore cependant son vrai visage<ref>{{lien brisé|url=http://collectionscanada.gc.ca/pam_archives/index.php?fuseaction=genitem.displayItem&lang=eng&rec_nbr=2895001&rec_nbr_list=2895001 |titre=Portrait imaginaire de Jacques Cartier }}, d'après [[Bibliothèque et Archives Canada]]. —&nbsp;[http://www.chateauramezay.qc.ca/fra/musee/peinture/1020.htm Conservateur actuel] : le [[Château Ramezay]].</ref>.]]En [[1532]], alors qu'une guerre éclate entre la couronne du Portugal et les armateurs normands au large du [[Brésil]], un certain [[Jacques Cartier]], fils de pêcheur malouin morutier, est présenté à {{François Ier}} par [[Jean Le Veneur]], évêque de Saint-Malo et [[Abbaye du Mont-Saint-Michel|abbé du Mont-Saint-Michel]]. Celui-ci évoque des voyages que Cartier aurait déjà faits « en Brésil et en Terre-Neuve », pour affirmer qu'il était à même « de conduire des navires à la découverte de terres nouvelles dans le nouveau monde »<ref>Baron de La Chapelle, « Jean Le Veneur et le Canada », ''Nova Francia'', vol. 6, 1931, {{p.|341-343}}, d'après un texte généalogique de 1723.</ref>. Recevant une commission du roi de France, et devenant en ce sens le successeur de [[Giovanni da Verrazano]], Cartier dirigera, aux frais du roi, trois voyages vers l'[[Amérique du Nord]] entre [[1534]] et [[1542]], espérant y trouver un [[Passage du Nord-Ouest|passage]] pour l'[[Asie]], sinon des richesses.
 
En [[1534]] lors de sa première expédition vers l'[[Amérique]] : [[Jacques Cartier]] découvre le [[Canada|Québec]], que l'on appellera alors la [[Nouvelle-France|nouvelle France]]. Après seulement vingt jours de traversée (du 20 avril au 10 mai), Cartier atteint [[Terre-Neuve]], avec ses deux navires et un équipage de 61 hommes. Il explore minutieusement le [[golfe du Saint-Laurent]] à partir du [[10 juin]]<ref>[http://www.france-pittoresque.com/almanach/almanach2/1006.htm Quelques événements du 10 juin]</ref>. Le [[vendredi]] [[24 juillet]], il met pied à terre à [[Gaspé (ville)|Gaspé]], y plante une [[Croix de Gaspé|croix]] de trente [[Pied (unité)|pieds]], revendiquant la région pour le roi de [[France]]. La troupe des Français y rencontre des [[Iroquoiens du Saint-Laurent]], venus pour la pêche, qui les accueillent sans grand plaisir. Le chef amérindien, [[Donnacona (chef indien)|Donnacona]], après protestations, finit par permettre à Cartier d'amener deux de ses « fils » en France. La rentrée à Saint-Malo se fait le 5 septembre après une autre courte traversée de 21 jours<ref name="tcetrudel">[http://www.thecanadianencyclopedia.com/index.cfm?PgNm=TCE&Params=f1ARTf0001439 Marcel Trudel, ''Jacques Cartier''], dans l'[[Encyclopédie canadienne]] ([http://www.encyclopediecanadienne.ca/ EC]).</ref>.
 
Un deuxième voyage a lieu en [[1535]]–[[1536]] et débute le 19 mai. Cette expédition compte trois navires, [[La Petite Hermine]] (60 tonneaux), [[L'Émérillon]] (40 tonneaux) et la nef qui transporte Cartier, [[La Grande Hermine (Nef)|la ''Grande Hermine'']] (120 tonneaux). Cartier remonte alors le cours du [[Fleuve Saint-Laurent|Saint-Laurent]], découvrant qu'il navigue sur un fleuve lorsque l'eau devient douce. Le [[3 septembre]] il signale dans son journal de bord avoir aperçu des [[Béluga (baleine)|bélugas]] dans le fleuve<ref>{{ouvrage|titre=Deux cents ans de villégiature dans Charlevoix : l'histoire du pays visité|passage=17|éditeur=Presses de l'Université Laval|date=1986|isbn=|lire en ligne=|auteur=Philippe Dubé}}</ref>.
 
À l'[[île d'Orléans]], le [[7 septembre]], devant [[Stadaconé]], on retrouve [[Donnacona (chef indien)|Donnacona]].Une partie des hommes restent et construisent un fortin, préparant le premier hivernage connu de Français au ''Canada''<ref>Hivernage (1535–1536) : sur la [[rivière Saint-Charles]], dans l'actuel [[quartier Lairet]], arrondissement [[La Cité-Limoilou#Limoilou|Limoilou]] de la ville de [[Québec (ville)|Québec]].</ref>. Cartier continue à remonter le fleuve sur l’''Émérillon'', dont bientôt le [[tirant d'eau]] interdit de poursuivre au-delà du [[lac]] [[Saint-Pierre (lac)|Saint-Pierre]] : il y ancre l’''Émérillon'' et l'équipage poursuit en barques.
 
Le 2 octobre 1535, Jacques Cartier et ses compagnons arrivent dans la région de l'établissement nommé [[Hochelaga (village)|Hochelaga]]. La nuit venue, ils se retirent tous à bord des barques. Tôt le lendemain matin, avec ses gentilshommes et vingt mariniers armés, Cartier entreprend à pied le chemin vers ce village, sur une voie bien aménagée. Marchant ainsi deux lieues (environ {{Unité|8|km}}), ils peuvent enfin apercevoir cette bourgade [[Palissade|palissadée]] de [[Tronc (botanique)|tronc d'arbres]], sur une [[colline]] et entourée de terres cultivées, pleines de [[maïs]] (dit [[blé d'Inde]]), ainsi qu'il décrira le paysage entourant [[Hochelaga (village)|Hochelaga]]. Il nommera [[Mont Royal]], cette ''montagne'' de l'île et de la ville qui est aujourd'hui nommée [[Montréal]].
 
La bourgade n'a dans son rempart circulaire qu'une seule porte d'entrée (sortie). On y compte une cinquantaine de « [[Maison longue amérindienne|maisons longues]] », communautaires. Le chef du village affirme que l'on peut continuer à remonter le fleuve vers l'ouest durant trois lunes et, de la [[rivière des Outaouais]], se diriger vers le nord et pénétrer dans un pays où l'on trouve de l'or (qui est l'actuelle grande région de l'[[Abitibi]]).
[[파일:Cartier First Voyage Map 1 fr.png|오른쪽|섬네일|Carte du premier voyage de [[Jacques Cartier]] (1534).]]
Les rapports avec les [[Iroquoiens du Saint-Laurent]] sont bons, malgré quelques disputes sans gravité, qui ne dégénèrent jamais en violence. Cartier découvre cependant les premiers [[Scalpation|scalps]] dans la maison de [[Donnacona (chef indien)|Donnacona]]. Il y goûte aussi le [[tabac]], qu'il n'apprécie guère. L'hiver de l'[[Amérique du Nord]] arrive et surprend les Français, le fleuve gèle et emprisonne les navires.
 
Cartier et ses hommes hivernent près de la rivière Sainte-Croix (maintenant dite [[rivière Saint-Charles]], à [[Québec (ville)|Québec]]). Les hommes souffrent du [[scorbut]], les [[Iroquoiens du Saint-Laurent|Iroquoiens]] en sont aussi frappés, des Français meurent tandis que les [[Amérindiens]] s'en tirent beaucoup mieux. Cartier, épargné, découvre que les [[Micmacs]] se soignent avec une infusion d'aiguilles et d'écorce de pin<ref>[http://www.passeportsante.net/fr/Solutions/PlantesSupplements/Fiche.aspx?doc=oligo_proanthocyanidines_ps Oligo-proanthocyanidines Infusion anti-scorbut des Micmacs].</ref>{{,}}<ref>[http://www.passeportsante.net/fr/solutions/herbiermedicinal/plante.aspx?doc=pin_hm Pin ''idem''].</ref>. Il applique le traitement à ses hommes et, bientôt, les guérisons se multiplient. En avril, Cartier emmène [[Donnacona (chef indien)|Donnacona]] de force pour le présenter à François 1세 avec ses deux « fils » (neveux ?) et sept autres [[Iroquoiens du Saint-Laurent|Iroquoiens]] ; puis, profitant du dégel, il met le cap sur la France, abandonnant [[La Petite Hermine]], {{Citation|faute d’un équipage assez nombreux}}<ref>[http://www.biographi.ca/009004-119.01-f.php?&id_nbr=107 Marcel Trudel, ''Jacques Cartier''], dans le [[Dictionnaire biographique du Canada]] ([http://www.biographi.ca/ DBC])</ref> (25&nbsp;des {{nombre|110|équipiers}} étaient décédés du scorbut<ref>''Ibid.''</ref>). Après un passage par [[Saint-Pierre-et-Miquelon]], il retourne à [[Saint-Malo]] en juillet [[1536]], croyant avoir exploré une partie de la côte orientale de l'[[Asie]].
 
Le ''[[Parc Cartier-Brébeuf|Lieu historique national Cartier-Brébeuf]]'' commémore cet hivernage de Jacques Cartier.
Le troisième voyage a lieu entre 1541-1542. L'organisation de l'expédition est confiée à [[Jean-François de La Rocque de Roberval]], un homme de cour, ce que Cartier n'est pas. Il ne sera cette fois que le second de Roberval. La colonisation et la propagation de la foi catholique deviennent les deux objectifs. Donnacona meurt en France vers [[1539]], comme d'autres [[Iroquoiens du Saint-Laurent]], d'autres s'y sont mariés, aucun ne reviendra de France. On prépare l'expédition, arme cinq navires, embarque du bétail, libère des prisonniers pour en faire des colons. Roberval prend du retard dans l'organisation et Cartier s'impatiente puis décide de s'engager sur l'océan sans l'attendre. Après une traversée calamiteuse, il arrive enfin sur le site de [[Stadaconé]] en août [[1541]], après trois ans d'absence. Les retrouvailles sont chaleureuses malgré l'annonce du décès de Donnacona, puis les rapports se dégradent et Cartier décide de s'installer ailleurs.
 
[[파일:Cartier Second Voyage Map 1 fr.png|오른쪽|섬네일|Carte du second voyage de [[Jacques Cartier]] (1535-1536).]]
 
Il fait édifier le fort de [[Charlesbourg-Royal]] au confluent du [[Fleuve Saint-Laurent|Saint-Laurent]] et la [[Cap-Rouge|rivière du Cap Rouge]], pour préparer la colonisation. Bientôt, l'hiver arrive et Roberval est toujours invisible, avec le reste de l'expédition. En attendant, Cartier accumule « l'or et les diamants », qu'il négocie avec les [[Iroquoiens du Saint-Laurent]], qui disent les avoir ramassés près du camp. En [[1542]], Cartier lève le camp, rencontre Roberval à [[Terre-Neuve]]. Malgré l'ordre que ce dernier lui donne de rebrousser chemin et de retourner sur le [[Fleuve Saint-Laurent|Saint-Laurent]], Cartier met le cap vers la France.
 
Aussitôt arrivé en France, il fait expertiser le minerai, apprenant qu'il ne rapporte que de la [[pyrite]] et du [[Quartz (minéral)|quartz]], sans valeur. Sa mésaventure est à l'origine de l'expression « faux comme des diamants du Canada »… et du toponyme actuel, « [[Cap Diamant]] », pour désigner l'extrémité est du promontoire de Québec.
 
Cartier se retire alors dans son [[manoir de Limoëlou]] à [[Rothéneuf]], près de Saint-Malo. On présume qu'il fut anobli, car il est qualifié de ''Sieur de Limoilou'', dans un acte du chapitre de [[Saint-Malo|Saint- Malo]], en date du {{date-| 29 septembre 1549}}; dans un autre acte, en date du {{date-|5 février 1550}}, il porte le titre de noble homme<ref>{{harvsp|Guérin|1846}}</ref>.
 
Il succombe le {{1er}} septembre<ref>[[Frédéric Joüon des Longrais]] a retrouvé la date de décès du pilote malouin en marge d'un registre, dont voici l'extrait : « Ce dict mercredy au matin environ cinq heures décéda Jacques Cartier » -&nbsp;voir son livre intitulé ''Jacques Cartier…'', {{p.|106}}.</ref> [[1557]], probablement de la [[Liste des épidémies de peste|peste]] qui frappe la ville cette année-là. Ses restes supposés, retrouvés en [[1944]], reposent aujourd'hui dans la cathédrale de [[Saint-Malo]]. D'après un extrait des papiers de famille des Garnier de Fougeray, il est écrit que son corps a été inhumé le jour même de son décès, dans la cathédrale, par son parent et compère Michel Audiepvre<ref>Extrait publié par le capitaine Cleret de Langavant, « Documents pour servir à l'Histoire de Saint-Malo », Annales de la Société Historique et Archéologique de l'Arrondissement de Saint-Malo, 1903, {{p.|88}}.</ref>.
 
== Art de vivre ==
L'époque de la Renaissance correspond à un renouvellement profond de la manière de vivre. On voit apparaître dans toute l'[[Europe]] de nouveaux [[fruit (alimentation humaine)|fruits]] et [[légume]]s. La [[gastronomie]] et les [[arts de la table]] évoluent progressivement. Les habitudes vestimentaires changent également.
 
== Économie ==
Les aménagements urbains dans Paris durant cette époque (rues plus grandes, maisons bourgeoises, hôtels de ville), favorisent le développement des commerces (boulangers, bouchers, tenanciers)<ref>http://lionel.mesnard.free.fr/lesite/4-1-paris-renaissance-1.html</ref>. La bourgeoisie se tourne de moins en moins vers le commerce et de plus en plus vers le droit.
 
== 주해와 각주 ==
=== 주해 ===
{{각주|group=note}}
=== 각주 ===
{{각주|colwidth=30em}}
 
== 함께 보기 ==
=== 참고 문헌 ===
* ''Une histoire de la Renaissance', [[Jean Delumeau]], Perrin, [[1999]], {{ISBN|2-262-01288-1}}
* ''La France de la Renaissance'', ouvrage collectif regroupant les meilleurs historiens, France Loisirs, août [[1998]], {{ISBN|2-7441-1743-9}}
* ''La France médiévale'', ouvrage collectif d'une équipe d'historiens, d'universitaires et de médiévistes réputés, France Loisirs, août [[1997]], imprimé en Italie, 2-7441-0884-7
* ''Atlas de la civilisation occidentale, généalogie de l'Europe'', sous la direction de [[Pierre Lamaison]], mai [[1995]], {{ISBN|2-7242-8528-X}}
* ''Le Grand Livre des explorateurs et des explorations'', sous la direction de Michel Gavet-Imbert et Perrine Cambounac, préface de [[Paul-Émile Victor]], France Loisirs, [[1991]],
* ''Bourges, l'Histoire et l'Art'', texte de Jean Favière, éditions La goélette, [[1996]], {{ISBN|2-906 880-40-X}},
* ''La Civilisation de l'Europe et la Renaissance'', [[John Hale]], Perrin, [[1998]] pour la traduction française. {{ISBN |2-262-01471-X}}
* ''Atlas historique Nathan''
* ''Les Sources d'idées au XVI siècle'', [[Pierre Villey]], Plon, Paris, 1912
* {{서적 인용|langue=|저자1=[[Didier Le Fur]]|제목=Une autre histoire de la Renaissance|passage=|장소=Paris|출판사=Perrin|연도=2018|쪽수=250|isbn=9782262070595|url=http://www.editions-perrin.fr/livre/une-autre-histoire-de-la-renaissance/9782262070595}}.
 
=== 관련 문서 ===
* [[프랑스의 문화]]
* [[프랑스어의 역사]]
* [[Jean Delumeau]]
* [[Centre d'études supérieures de la Renaissance]]
* [[Guerre au XVIe siècle|La guerre au {{s-|XVI}}]]
* [[Jardins de la Renaissance française]]
* [[이탈리아 르네상스]]
* [[플랑드르 르네상스]]
* [[잉글랜드 르네상스]]
* [[루이 12세 양식]]
* [[프랑스 르네상스 제2기]]
 
{{르네상스}}
{{포탈|예술사|르네상스}}
 
[[분류:프랑스 르네상스|*]]
[[분류:프랑수아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