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네케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9번째 줄:
삼부회는 해결점을 못찾고 첨예한 대립만 오고가며 파행이 장기화되던 끝에 제3신분인 평민대표들은 자신들이 국민의 96%를 대표한다는 주장과 함께 6월 17일에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ref name="다니엘 리비에르 252">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3.11 p252</ref> 아울러 어떠한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 없이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ref name="다니엘 리비에르 252" /> 평민대표들의 도발에 분노한 루이 16세는 측근들과 귀족대표들의 의견에 따라 '국민의회'의 해산을 명한후 회의장을 폐쇄해 버렸다.<ref name="다니엘 리비에르 252" /><ref>알베르 마띠에 <프랑스 혁명사> 창작과비평사 1982.8.15, p57</ref>
6월 20일, 평민대표들은 테니스 코트로 이동하여 헌법을 제정할 것과
네케르의 해임에 [[파리 시|파리]]시민들이 분노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을 감행했다.<ref name=":0">김상환 <교실밖 세계사여행> 사계절 1999.8.5, p175</ref> 이로써 본격적인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7월 20일]] 루이 16세는 사태수습을 위해서 네케르를 복직시켰다. 그는 혼자서 프랑스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 미라보]]나 [[질베르 뒤 모티에 드 라파예트]] 등과 협력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는 늘어나는 재정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혁명적인 재정개혁안을 내놓은 미라보 백작이나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 등에 가려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1790년]] [[9월 18일]] 네케르는 마지막으로 사임하였다. 그 후 그는 [[1784년]]에 매입해 두었던 [[제네바]] 근처의 [[코페]]의 사유지로 이주하였으며, 이 곳에서 문학을 벗 삼아 조용히 지냈다. 아내인 [[수잔 네케르]]는 파리의 살롱에 남았고, [[1794년]]에 사망하였다. 네케르는 그의 딸과 조카와 함께 만년을 보냈다. [[1804년]] 코페에서 사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