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네케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9번째 줄:
삼부회는 해결점을 못찾고 첨예한 대립만 오고가며 파행이 장기화되던 끝에 제3신분인 평민대표들은 자신들이 국민의 96%를 대표한다는 주장과 함께 6월 17일에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ref name="다니엘 리비에르 252">다니엘 리비에르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3.11 p252</ref> 아울러 어떠한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 없이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ref name="다니엘 리비에르 252" /> 평민대표들의 도발에 분노한 루이 16세는 측근들과 귀족대표들의 의견에 따라 '국민의회'의 해산을 명한후 회의장을 폐쇄해 버렸다.<ref name="다니엘 리비에르 252" /><ref>알베르 마띠에 <프랑스 혁명사> 창작과비평사 1982.8.15, p57</ref>
 
6월 20일, 평민대표들은 테니스 코트로 이동하여 헌법을 제정할 것과 그때까지헌법이 제정될때까지 절대로 '국민의회'를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서약했다. 6월 23일, 루이 16세는 평민대표들에게 서약 파기와 신분별 표결방식의 수용을 명했으나 평민대표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런 와중에 몇몇 성직자와 귀족대표들이 국민의회에 합류하였다.<ref>알베르 마띠에 <프랑스 혁명사> 창작과비평사 1982.8.15, p60......6월 24일, 이번에는 성직자의 다수파가 왕에 불복하면서 제3신분의 토의에 합류했다. 이튿날 오를레앙 공작이 이끄는 47명의 귀족대표가 똑같은 행동을 했다.</ref> 삼부회의 원만한 진행 실패등의 이유로 인하여 네케르는 [[7월 11일]] 해임당했다.<ref>알베르 마띠에 <프랑스 혁명사> 창작과비평사 1982.8.15, p62</ref>
 
네케르의 해임에 [[파리 시|파리]]시민들이 분노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을 감행했다.<ref name=":0">김상환 <교실밖 세계사여행> 사계절 1999.8.5, p175</ref> 이로써 본격적인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7월 20일]] 루이 16세는 사태수습을 위해서 네케르를 복직시켰다. 그는 혼자서 프랑스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 미라보]]나 [[질베르 뒤 모티에 드 라파예트]] 등과 협력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는 늘어나는 재정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혁명적인 재정개혁안을 내놓은 미라보 백작이나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 등에 가려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1790년]] [[9월 18일]] 네케르는 마지막으로 사임하였다. 그 후 그는 [[1784년]]에 매입해 두었던 [[제네바]] 근처의 [[코페]]의 사유지로 이주하였으며, 이 곳에서 문학을 벗 삼아 조용히 지냈다. 아내인 [[수잔 네케르]]는 파리의 살롱에 남았고, [[1794년]]에 사망하였다. 네케르는 그의 딸과 조카와 함께 만년을 보냈다. [[1804년]] 코페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