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사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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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개 ==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강상호]](姜相鎬)·[[신현수]](申鉉壽)·[[천석구]](千錫九) 등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들과 [[장지필]](張志弼), [[이학찬]](李學贊) 등 [[백정]] 출신 지식인들이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상호 친목을 도모하여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게 한다.'라는 목적하에 형평사를 설립했다.<ref name=":0">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1996.8.29 p175</ref> 이들은 발기총회에서 결정된 사칙을 통해 진주의 본사를 중심으로 각 도에 지사를, 각 군에 분사를 두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성할 것을 선언했다.
 
이에 호응하여 전국 각지에 지사와 분사가 활발히 설치되자, [[1924년]] 2월 전국의 지사·분사 대표 300여 명이 부산에 모여 '형평사전조선임시총회'를 개최했다. 이때 [[전라도]]·[[충청도]]·[[강원도]]를 기반으로 한 [[장지필]] 등 혁신파는 본사를 [[경성부]]로 이전할 것을 주장했고, [[경상도]]를 기반으로 한 [[강상호]]·[[신현수]] 등 보수파는 진주 본사를 고수할 것을 주장해 내부 대립이 표출되었다. 전자가 형평운동을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한 계급해방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하였지만, 후자는 형평운동을 인권운동으로서 유지하려 했다는 점에서 2파의 노선 차이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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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의와 한계 ==
형평운동은 형평사 창립 초기부터 많은 시련에 부딪혔는데,부딪혔다. 그중 하나는 봉건적 관습에서 탈피하지 못한 일반 농민들의 거부감에서 오는 반(反) 형평운동이었고형평운동이었다.<ref>'''[네이버 지식백과]''' 반형평운동 [反衡平運動]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1923년 백정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형평운동은 백정에 대한 신분차별을 사회적 관습으로 여겨오던 반대 세력들과의 충돌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의 오랜 전통과 관습으로 인해 진주에서 형평사 발기(發起) 직후 열린 축하연에 기생(妓生)도 나가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동자·빈민까지도 형평운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여전히 학교에서는 백정의 자제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신분해방을 주장하는 백정과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평민 간의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ref> 다른 하나는 형평운동이 인권운동의 차원을 넘어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 속에서 다른 사회운동과 제휴하여 전개됨에 따른 일제의 탄압이다.<ref name=":0" /> 이러한 2가지 시련에 대한 투쟁은 형평운동이 반제국주의적·반봉건적인 성격을 갖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형평운동은 백정들의 신분해방·인권운동인 동시에 다른 사회운동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 진행된 민족해방운동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