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니콜라우스 폰 코우덴호페칼레르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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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도]]에서 하인리히 코우덴호페칼레르기와 아오야마 미쓰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하인리히 코우덴호페칼레르기({{llang|de|Heinrich Coudenhove-Kalergi}}, 1859년 ~ 1906년)는 오스트리아의 코우덴호페칼레르기(Coudenhove-Kalergi) 가문 출신의 [[백작]], 외교관으로서 일본 주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사를 역임했다. 그의 어머니인 아오야마 미쓰({{llang|ja|青山 みつ}}, 1874년 ~ 1941년)는 일본 도쿄에서 석유 상인, 골동품 상인, 지주로 일했다. 국제 범유럽 연합을 취재한 [[휘태커 체임버스]]의 보도에 따르면 "코우덴호페 가문은 원래 부유한 [[플람스인]] 가문이었는데 [[프랑스 혁명]] 시기에 오스트리아로 탈출한 기록을 갖고 있다. 칼레르기스 가문은 [[그리스]] [[크레타]] 출신 가문으로서 폴란드인, 노르웨이인, 발트인, 프랑스인, 독일인과 같은 다양한 혈통을 갖고 있다."고 한다.
 
[[1917년]]에는1917년에는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1919년]]에는1919년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 국적을 취득했다. [[1923년]]에는1923년에는 저서인 《판유로파》(Pan-Europa, "범(汎)유럽"이라는 뜻)를 출간했고 같은 해에 [[1926년국제 범유럽 연합]]에는을 설립했다. 1926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제1차 범유럽 운동 회의를 개최했다.개최했고 [[1927년]]에는1927년에는 프랑스의 [[아리스티드 브리앙]] 총리로부터 국제 범유럽 연합의 명예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범유럽 회의에 참석했던 주요 인사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토마스 만]],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이 있다.
 
[[1930년대]]부터1930년대부터 42차례에 걸쳐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수상자로 선정되지는 않았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작곡한 《[[환희의 송가]]》를 [[유럽가]]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는 한편 [[유럽의 날]] 제정, 유럽 우표 발행을 제안하는 등 범유럽 운동을 전개했다.
 
[[1938년]]에는1938년에는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계기로 국제 범유럽 연합이 나치 독일 당국의 탄압을 받게 되면서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1939년]]에는1939년에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1940년]]에는1940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인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1942년]]부터1942년부터 1945년까지 [[뉴욕 대학교]] 교수로 근무했다. [[1945년]]에는1945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프랑스로 귀환했다.
 
[[1950년]]에는1950년에는 유럽 통합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카롤루스 대제상]]을 수상했다. [[1954년]]에는1954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오피시에 훈장(Légion d'honneur Officier)을, [[1962년]]에는1962년에는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대명예은현장(Großes Silbernes Ehrenzeichen mit dem Stern)을 받았다. [[1967년]]에는1967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서보장(瑞寶章)을, [[1972년]]에는1972년에는 [[서독]] 정부부터 대연방공로십자성장(Großes Bundesverdienstkreuz mit Stern)을 받았다.
 
== 외부 링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