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Logicprmer(토론)의 29509923판 편집을 되돌림/불필요한 정보입니다
36번째 줄:
위만은 유이민 집단과 토착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위만은 중국에서 철을 가져와 고조선에 널리 전파했다) 중국 문물(대표적인 문물 '철')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임둔]] 등의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나라는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위만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는 누선장군 [[양복 (전한)|양복]]과 [[순체]] 등에게 명하여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이끌고 각각 위만조선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위산을 사신으로 보내 다시 외교적 절충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결국 전쟁이 재개되었는데,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이탈되었다. 조선상 역계경(歷谿卿)은 화친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진국으로 갔다. 또한 조선상 [[노인 (고조선)|노인]](朝鮮相 路人), 상(相) [[한도|한음]](韓陰), [[삼 (위만조선)|이계상 삼]](尼谿相參), 장군(將軍) [[왕겹]](王唊)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 (고조선)|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기원전 108년]]에 [[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이후 고조선은 한나라의 지배 아래 있다가 313년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완전히 망하게 되며 약 400년간 존속하게 된다.<ref>{{뉴스 인용 |url=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663878|제목=[화폐로 보는 인류史(6)] 우리나라 화폐사, 고대화폐|날짜=2019-09-03|출판사=천지일보}}</ref> 한나라는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군]]·[[임둔군]]·[[현도군]]·[[진번군]]의 [[한사군]]을 설치하였고 많은 고조선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철기가 도입된 시기에 관하여 북한에서는 기원전 8∼7세기에 이미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많아서 지지 받기 어렵다. 남한에서는 대체로 위만조선 이전에 철기가 도입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철은 기원전 8∼7세기에 이미 압록강과 두만강유역에서 생산되었으며, 연철 단계는 기원전 8∼7세기, 고온환원법의 발전된 방법은 기원전 3∼2세기에 시작되었다고 보았다.<ref>박영초,<고조선시대에서의 제철 및 철제가공기술>,≪조선고고연구≫89-1</ref> 燕에서 전파된 발전된 방법 이전에 독자적인 제철기술이 함경도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만조선 시기 고조선 지역에서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된것은 사실이며, 기원전 3∼2세기에 보급이 시작되어 사회 전반적인 철제 농기구와 무기가 제작되는 등 철기문화가 사회의 발전 및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다. 청천강 이북지역에 명도전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이후에는 세형동검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대체로 4세기경으로 보여진다.<ref>李淸圭,<청동기를 통해 본 고조선>(≪國史館論叢≫42, 1993)</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