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상시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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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화루 아래에서 조충, 정광, 하운, 곽승 등이 베이고 군사들은 [[십상시]]의 가족들을 모두 죽였으며 [[환관]]들도 모두 살해했는데 이 때문에 수염 없는 사람들도 [[환관]]으로 오해받아 살해당했다. [[하진 (후한)|하진]]의 동생 [[하묘]]도 난입해 십상시 중 한 명이던 조충을 죽였으나 오광에게 가담자로 오해받아 살해당했고 [[하진 (후한)|하진]]을 살해했던 상방감 [[거목]]을 포함해 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장락궁]]에서 살해당해 십상시의 난이라 불리게 되었다.
 
[[십상시]]들 중 남아있던 장양, 단규, 후람, 조절조절은 [[하태후]]를 납치해 가려고 하나 중랑장 [[노식]]의 참여로 실패하며 결국 이들은 황제 [[후한 소제 (13대)|소제]]와 진류왕 [[후한 헌제|유협]]을 데리고 [[낙양]] [[북망산]]으로 피신한다.
 
== 경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