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독립운동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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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월, [[대한제국 순종|순종]] 황제의 평안도 순시에 동행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동지 몇 사람과 함께 평양역 부근에서 대기했으나, 황제의 안전을 우려한 [[안창호]]의 만류로 포기했다.<ref name="seoul1" /> 이후, [[원산]]을 거쳐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겼다가, 같은 해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1909년 12월 22일, 종현천주교회당(<small>鍾峴天主敎會堂, 현 [[명동성당|서울 명동성당]]</small>)에서 같은 달 17일에 사망한 [[벨기에]] 국왕 [[벨기에의 레오폴 2세|레오폴 2세]] 추도식이 열렸다. 이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신문 기사를 본 이재명은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교회당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오전 11시 30분경 식장에서 나와 인력거를 타고 지나는 이완용을 보고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인력거꾼 [[박원문]]이 제지하자 칼로 제압한 뒤,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이완용이 인력거 아래로 떨어지자 어깨 등을 여러 차례 찌른 뒤, 이완용이 죽었다고 판단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거사 직후, 일본 순사의 칼에 왼쪽 넓적다리를 찔리는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ref name="seoul1" />
 
[[이완용]]은 갈비뼈 사이로 폐를 찔리고 치명상을 입은 듯 했으나, [[대한의원]](<small>현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small>)으로 후송돼 일본인 의사들이 집도한 외과 수술로 겨우 목숨만은 건졌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18/2008121800585.html "서울대병원, 매국노 이완용 수술기록 발견" --2008년 12월 18일 조선일보 기사]{{깨진 링크|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18/2008121800585.html%7C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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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이 일에 찬성한 사람은 2000만 민족이다. 왜법(倭法)이 불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기는 하나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법에서 사형 선고가 확정된 뒤, 다음과 같은 최후 진술을 남겼다.<ref name="seoul1" />
1910년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후 경성감옥(<small>현 [[서대문형무소]]</small>) 형장에서 24세의 나이로 [[순국선열|순국]]했다.
 
{{인용문2|'''공평치 못한 법률로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나의 충혼, 의혼(義魂)은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번 죽음은 슬프지 않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내 결코 죽어서 그 원한을 갚을 것이다.'''}}
[[송병준]], [[이용구]] 등 다른 매국 인사들의 암살을 준비 중이던 이동수, 조창호, 김정익 등 11명의 관련자들도 중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0년 그는9월 사형 선고를 받은 후30일, 경성감옥(<small>현 [[서대문형무소]]</small>) 형장에서 24세의 나이로 [[순국선열|순국]]했다.
 
[[송병준]],의거를 [[이용구]]공모한 등 다른 매국 인사들의 암살을 준비 중이던조창호, 이동수, 조창호, 김정익 등 11명의 관련자들도 중형을 선고받고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