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봉쇄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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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가 없는 대륙봉쇄의 실상을 보게 된 러시아 제국은 [[1810년]] 대륙봉쇄령을 파기하고 영국과 무역을 재개했다. 황제 나폴레옹 1세는 법령을 파기한 러시아를 본보기로 삼아 처벌하기 위해 [[러시아 원정]](1812년)을 감행했으나, 러시아의 [[초토화 작전]]에 따라 대패를 당해 몰락을 초래하였다.
 
=== 영국의 역봉쇄 ===
영국이 프랑스를 봉쇄하기 위해 해상봉쇄에 나서게 되자, 처음엔 중립을 선언한 [[미국]]과 이해관계가 대립하여 [[1812년]] [[영미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측도 아무 상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후 경제는 불황을 맞이했고, 프랑스측의 해적선이 암암리에 활동을 벌여 상선은 약탈당했고, 국내에서는 국민의 폭동, 수상의 암살, 영국국왕의 발광, 그리고 영미 전쟁등으로 영국 역사상 가장 어려운 국면을 맞았다.
 
당시 영국은 산업 혁명이 진행되어 대륙 여러 나라의 산업이 영국의 산업에 압도되었다. 프랑스는 대륙 봉쇄령으로 대륙의 시장을 독점하려 하였으나 생산력이 따르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물자의 부족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영국도 역봉쇄령을 내려 프랑스나 그 동맹국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영국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지배 아래에 있던 여러 나라가 고통을 받았고 봉쇄령을 위반하였다.
 
=== 대륙봉쇄의 문제점 ===
대륙봉쇄는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모순을 안고 있었다. 첫 번째, 영국을 대신해 프랑스 산업이 유럽시장을 독점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군사지배와 연결된 프랑스의 종속정책에 대한 불만이 강해졌다. 두 번째, 영국에 비해 산업화의 진행이 늦은 프랑스 산업은 영국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었다. 세 번째, 대륙 여러 국가들은 교역을 기반으로 한 네덜란드 및 [[한자 도시]], 농업국인 러시아, 프로이센, 이탈리아, 스페인, 공업이 비교적 발달된 서남 독일 등 다양한 국민경제를 갖고 있었고, 이것은 영국과의 교역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