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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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도제찰사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여, 그 행방을 캐기 위해 종의 아비를 잡아들였다. [[윤근수]]가 눈감아 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김덕령은 거절하였고, 결국 매를 때려 숨지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윤근수]]에게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풀려났다. 후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난 뒤, 반군을 문초하던 중 최, 홍, 김이 적힌 패가 나와 문초하니 고문에 견디다 못한 졸개가 [[최담령]], [[홍계남]], 김덕령 등 명망 있는 장수들의 이름을 무고했다. 윤근수가 이를 빌미로 과거의 원을 풀고자 김덕령을 체포하였고, [[조선 선조|선조]]가 친히 국문을 열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류성룡]]은 김덕령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서인 [[판중추부사]] [[윤두수]]는 엄벌을 주장했다. 수백 번의 형장 신문으로심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은 김덕령은 결국 장독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고, 별장 [[최담령]]도 이때 죽었다. 그때 김덕령이 묶인 포승줄을 끊고, 담장을 뛰어넘어 갔다가 다시 국문장으로 다시 오는 등 죄가 없음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은 ‘[[춘산에 불이 나니]]’라는 [[시조]]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후에 신원되고 난 뒤에도 역적죄가 있던 터라 문중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묻혀 있었는데, [[1965년]]에야 [[광산 김씨]]의 무덤이 모여 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로 묘가 옮겨지게 되었다. 밤중에 묘를 이장하던 중 김덕령의 관을 여니 생시와 다름없이 살이 썩지 않고 있어, 이를 본 사람들은 김덕령 장군의 한이 서린 것이라 하여,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와 모습을 남기려 하였으나, 사진기가 흔치 않던 터라, 사진기를 무덤까지 가져와 보니 시신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덕령이 입고 있던 옷이나 철릭 등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현재 광주 [[무등산]]에 있는 충장사에 전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