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팔친스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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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돈강]] 유역의 탄광노동자의 생활환경을 조사하는 사업을 맡았다. 팔친스키는 노동자들의 처참한 생활환경을 그대로 보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팔친스키는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큰 정당이었던 [[사회주의혁명당]]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회주의혁명당에서 팔친스키는 당내 중앙파의 편을 들었고, 당내 좌파를 공격했다. 1905년 팔친스키는 혁명당원들의 시국사건에 연루되었다. 팔친스키가 문제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는지, 단순 동조자인지 여부는 사료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판단하기 힘들다. 어쨌든 당시 팔친스키는 재판을 받지 않는 대신 외국으로 망명했다. 팔친스키는 [[런던]], [[토리노]], [[로마]]를 돌아다녔고 1911년 토리노 [[세계산업박람회]]에서 광업 부문을 감독하기도 했다.
 
팔친스키 부부는 8년간의 망명생활을 거쳐 1913년 귀국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팔친스키는 [[전시산업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팔친스키는 [[러시아 임시정부]]에서 다양한 공직을 맡았다. 정식 당원은 아니었으나 사회주의혁명당 중앙파와 의견을 같이했고,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하는 것을 지지했다. 1917년 [[볼셰비키]]가 쿠데타를 일으켜 [[러시아 공화국]] 정부를 와해시키고와해시켰을 팔친스키를 비롯한팔친스키는 각료들을공화국 투옥했다정부의 차관급 각료로서 동궁을 마지막까지 방어하다 붙잡혀 투옥되었다.
 
팔친스키는 처음에는 볼셰비키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으나, 점차적으로 소련에서 추구하는 계획경제, 산업근대화, 과학기술 도입 같은 것들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과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팔친스키는 러시아의 산업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사회적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러시아 공학자들이 세계와 경쟁할 역량을 갖추지 못한 것은 문제를 학술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모든 것을 순전히 기술적인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며, 공학자들이 산업과 경제의 동역학을 알기 위해 정치경제학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