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시리 카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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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순 (연호)|지순]] 3년([[1332년]]) [[8월]], [[투그테무르]](문종)가 [[상도 (지명)|상도]](上都)에서 사망하면서 쿠살라(명종)의 아들을 계승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권신 [[엘 테무르]](燕鐵木兒)는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연첩고사(燕帖古思, [[엘 테구스]])를 즉위시키자고 건의하였지만 부다시리 카툰은 선왕의 유언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엘테부르]]는 다시 [[광시 좡족 자치구|광시]](廣西)에 추방된 쿠살라의 장남인 [[토곤테무르]](妥懽帖睦爾)대신 불과 6살의 차남 [[린친발]](懿璘質班)을 선택, 즉위시켰다.
 
=== 황태후, 명목상의 섭정 시절 ===
=== 생애 후반 ===
[[1332년]], 린첸발(영종)이 황제로 즉위하자 그해 [[11월]] 부다시리는 [[황태후]]가 되었다. 부다시리는 형식적으로 섭정이었으나, 정치적 실권은 [[엝테무르]]에게 있었다. 그러나 린첸발은 황제가 된지 2개월만에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부다시리는 [[광시성|광서]]에 있던 [[원 혜종|토곤테무르]]에게 사람을 보내 상경할 것을 권했다.
 
린친발이 사망하자, 엘 테무르는 다시 투그테무르의 차남 연첩고사(燕帖古思, [[엘 테구스]])를 즉위시키자고 건의하였지만 엘 테무르의 권세가 커질 것을 염려한 부다시리는 그것을 거부, 린친발의 이복형 토곤 테무르를 즉위시켰다. 혹은 자기 아들이 정쟁에 휘말릴 것을 염려하여 반대하였다반대하였다는 설도 있다. [[1333년]] [[2월]] 토곤 테무르는 린친발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대도]]로 올라오려 했으나 [[엘테무르]]가 말과 수레 이용을 금지하여, 그의 상경을 저지하였다.
 
[[원통 (연호)|원통]] 원년([[1333년]]), 토곤 테무르(순제)가 즉위 함으로 인해 부다시리는 [[태황태후]]의 칭호를 받고 [[임조칭제]](临朝称制, 섭정)를 칭하는 동시, 자신의 2자인 연첩고사를 황태자로 올리자고 토곤 테무르(순제)에게 건의하였다.
 
=== 폐출과 최후 ===
[[지원 (원 혜종)|지원]] 6년([[1340년]]) [[2월]], 권신 [[메르키트 바얀|바얀]](伯顏)이 실각되고 살해되었다. 복답실리는 자신의 2자(次子)인 황태자 연첩고사와 반역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인해 태황태후에서 폐위(廢位), [[대도]](大都)에서 추방된 뒤, 동안주(東安州)로 유배가던 중 토곤 테무르로 인해 사사당했다. [[원 혜종|혜종 토곤테무르]]는 조서를 내려 그가 [[바부샤 카툰]]을 살해한 것, 자신을 [[원 명종|명종 쿠살라]]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는 등의 이유로 부다시리를 폐위한다는 조서를 발표했다. 향년 36세였다.(연첩고사는 [[고려]]에 귀향가는 도중, 살해되었다.) 복답실리가 음모를 꾸몄다는 정황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며, 일설에는 이는 [[기황후]]의 공작이었다는 설이 있다.
[[지원 (원 혜종)|지원]] 6년([[1340년]]) [[2월]], 권신 [[메르키트 바얀|바얀]](伯顏)이 실각되고 유배가던 길에 [[광둥성|광둥]]에서 사망했다. [[메르키트 바얀]]은 자신이 조종하기 쉬운 [[엘 테구스]]를 차기 황제로 세우려 했고, 부다시리는 이에 동의하였다. [[메르키트 바얀]]의 권력이 강한 것을 두려워한 [[원 혜종|혜종 토곤테무르]]는 친정을 원했고, 이를 눈치챈 [[메르키트 바얀|바얀]]의 조카 [[토크토아]]는 혜종과 짜고 바얀을 실각시켰다.
 
그해 [[6월]] 복답실리는 자신의 2자(次子)인 황태자 연첩고사와 반역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인해 태황태후에서 폐위(廢位), [[대도]](大都)에서 추방된 뒤, 동안주(東安州)로 유배가던 중 토곤 테무르에 인해 사사당했다.
 
[[지원6월 (원 혜종)|지원14일]] 6년([[1340년]]) [[2월]], 권신 [[메르키트 바얀|바얀]](伯顏)이 실각되고 살해되었다. 복답실리는 자신의 2자(次子)인 황태자 연첩고사와 반역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인해 태황태후에서 폐위(廢位), [[대도]](大都)에서 추방된 뒤, 동안주(東安州)로 유배가던 중 토곤 테무르로 인해 사사당했다. [[원 혜종|혜종 토곤테무르]]는 조서를 내려 그가 [[바부샤 카툰]]을 살해한 것, 자신 대신 [[원 영종 (15대)|의린친발]]을 추대했다는 점, 자신을 [[원 명종|명종 쿠살라]]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는 등의 이유로 부다시리를 폐위한다는 조서를 발표했다. 향년 36세였다.(연첩고사는 [[고려]]에 귀향가는 도중, 살해되었다.) 복답실리가 음모를 꾸몄다는 정황은 원사, 원사연의 등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며, 일설에는 이는 [[기황후]]의 공작이었다는 설이 있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