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고에성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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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경과==
덴분(天文)14년 [[음력 9월 26일|9월 26일]]([[1545년]] [[10월 31일]]) 간토칸레 야마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토모사다, 고가쿠보 아시카가 하루우지의 연합군은 약 7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호조가의 가와고에성을 포위했다.(<ref>일설에는 간토의 모든 다이묘가 포위군에 참가했고, 참가하지 않은 이는 [[시모우사노쿠니|시모우사]](下総)의 지바 도시타네(千葉利胤)뿐이었다고 한다.)</ref> 가와고에성은 [[호조 쓰나시게]]가 약 3천의 병력으로 수비하고 있었지만, 그대로 놔둔다면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우지야스는 본국에서 약 8천의 병력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전황은 수개월동안 교착상태에 빠졌으나, 우지야스의 구원군으로 있는 구시마 가쓰히로(福島勝広 : )<ref>쓰나시게의 동생)</ref>가 사자로 나서, 단기로 우에스기 연합군의 포위를 뚫고 가와고에성에 입성하여 형 쓰나시게에게 기습에 대한 계획을 전했다. 우지야스는 우에스기군에게 거짓으로 항복할 뜻을 내비친다. 우에스기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역으로 호조군을 공격하자 우지야스는 싸우지않고 병사들을 물렸다. 이것을 보고 우에스기군은 호조군이 전의를 상실했다고 보았고, 아군 병사들 다수도 이를 보고 경비와 규율이 허술해지면서 방심하기 시작했다.
 
덴분15년 [[음력 4월 20일|4월 20일]]([[1546년]] [[5월 19일]])밤 우지야스는 아군 8천을 4부대로 나누고 그중 1개부대를 다메 모토타다(多目元忠)에게 지휘를 맡기고, 전투종료때까지 움직이지말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우지야스 자신은 남은 3부대를 이끌고 적진에 돌입했다. 밤 12시경 우지야스는 병사들에게 갑옷을 벗게해 몸을 가볍게 한다음 우에스기연합군에 난입하자 우에스기군은 갑작스런 기습에 대혼란에 빠지고, 이 난전중 오기가야쓰 우에스기가 당주인 우에스기 도모사다가 전사했다. 그러나 우지야스가 깊이 추격해 들어가자, 후방에서 이를보고 위험하다는 것을 느낀 다메 모토타다는 호라카이(法螺貝 : )<ref>일종의 소라고동나팔)</ref>를 불어 우지야스군을 불러들였다. 한편 성안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쓰나시게는 이때 아무것도 모르던 아시카가 하루우지의 진에서 ["이겼다. 이겼다!]"란 고함과 함께 부대를 이끌고 돌진했다. 하루우지군은 앞쪽과 뒷쪽 모두에서 적의 기운을 느끼고 혼란에 빠져 무너지고 말았다. 연합군은 전사자는 13,0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가와고에성 전투는 약 10배에 달하는 병력차를 극복하고 승리한것으로 전사상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