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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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진은 학식이 제법 있었던 터라 [[선덕제]]의 명으로 태자 주기진(朱祁鎭)에게 글을 가르치며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어린 태자는 공부를 싫어하고 놀기를 좋아했는데 왕진은 명색이 선생이라는 자가 가르치라는 글은 안 가르치고 이런저런 방법을 내어 태자의 비위만 맞춰주었다.<ref name=":0">[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55768&cid=62060&categoryId=62060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토목의 변 [土木之變] (중국상하오천년사, 2008. 4. 25., 풍국초, 이원길)</nowiki>]</ref> 1435년 [[정통제|정통제가]] 9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한후에 사례감의 장인 장앙태감이 되었고, 황제의 문서를 대필하며 이를 조작하는등의 전횡을 일삼았다.
 
[[정통제]] 7년([[1442년]])에 섭정을 맡았던 정통제의 할머니 태황태후 장씨([[성효소황후]])가 승하하자, 조정의 유력자가 되었다.<ref>안정애,양정현 <한 권으로 보는 중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7.1.5 p253</ref> 가장먼저 왕진이 한일은 [[홍무제|명태조 주원장]]이 환관억제책의 실행을 분명하게 하기위하여하기 위하여 '환관의 정치 간여금지'를 천명하며 궁문에 세워놓은 철패를 부셔버리는 것이었다.<ref>박영규 <환관과 궁녀> 김영사 2004 p140</ref><ref>강정만 <명나라 역대황제평전> 주류성출판사 2017년 p166</ref> 이후 선대 황제시절의 유능한 신하였던 양사기(楊士奇)·양부(楊溥)등이 차례로 사망하면서,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부정부패를 통해 재산을 축적하며 반대자를 탄압했다. 어린 정통제는 유희를 즐기며 정치에 무관심했기에 왕진은 상주서 비답을 도맡아서 처리하였고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아첨을 일삼는 일부 왕공 귀족들은 그를 ‘옹부(翁父)’라고 부르기까지 했다.<ref name=":0" />
 
정통제 14년([[1449년]])에 [[오이라트]]가 샨시에 침입하면서, [[정통제]]에게 친정을 추천해 같이 종군 하였다. 그러나 명군은 대패해 [[정통제]]는 포로가 되었고 자신도 금위군 군관 번충에게 살해당했다.<ref>안정애,양정현 <한 권으로 보는 중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7.1.5 p254</ref> 이 사건을 [[토목의 변|'토목의 변]]'이라 하는데 이일이 있은후 왕진의 가문은 처벌을 당하고, 재산도 몰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