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해방 선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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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언 ==
[[파일:Emancipation Proclamation.PNG|섬네일|250px|노예 해방 선언의 대상인 주는 붉은색이며, 푸른색으로 표시된 주는 대상이 아니다.]]
[[1862년]] [[9월 22일]], [[에이브러햄 링컨|링컨]]은 미국 노예
링컨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선 노예제 폐지를 공약으로서 매우 열렬하게 지지하지는 않았는데, 남부 등의 표를 얻기 위해서였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허나 그런 링컨조차 거부감을 가진 남부는 그가 대통령이 되자 즉시 연방을 탈당하고 남북전쟁이 시작된다. 또다른 정치적 시각으로 보자면, 공화당 급진파 측에선 역으로 답답하다고 까이자 링컨이 이들의 불만을 달래고자 노예 해방 선언을 한 것 아니냔 시각도 있다. 허나 어찌됐든 링컨은 노예 해방을 선언하며 "나는 내 삶에서 내가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을, 내가 여기 서명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 느껴본 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한편으론 남부의 군사 및 경제적 기초를 파괴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였다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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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언은 대부분의 북부인들에게는 명분없는 전쟁이었던 남북전쟁에 도덕적 명분을 부여하였다. 당시 많은 남부인들은 노예제도 찬성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 고향을 지키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북부의 부당한 탄압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분위기였으나, 많은 북부인들에게는 전쟁에 대한 확실한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이 선언으로 북부인들은 자유와 인권을 지키고자 한 [[미국 독립 전쟁]] 때와 같은 전쟁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링컨의 선언으로 노예 해방 선언에서 제외된 몇몇 지역에서는 지방관의 선언에 의해 따로 노예가 해방되었다. 또한, 이는 남부가 노예를 부리는 것에 대한 북부 세력의 대외적인 비판으로, 전 미국인들이 노예 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여, 1865년의 헌법 수정에 의해 결국 모든 노예 해방의 기초가 되었다. 예비 선언 다음의 실제 선언은 [[1863년]] [[1월 1일]]에 이루어졌다.
== 한계와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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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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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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