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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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대 선조와 선왕(先王)이래 묘에 비석을 갖추지 못하여 묘지기 연호들이 착오를 일으켰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은 선조와 선왕의 무덤에 모두 비석을 세우고 그 연호(烟戶)를 새겨 착오가 없도록 하셨다. 또 묘지기 제도를 제정하여 앞으로는 묘지기를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게 하셨다. 아무리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마음대로 사지 못하게 하고, 법령을 어기는 자 가운데서 파는 자는 벌주고 사는 자는 법을 만들어 그 자신이 묘지기가 되도록 하였다<ref>[http://www.palhae.org/zb4/view.php?id=pds2&page=1&sn1=&divpage=1&sn=off&ss=on&sc=on&keyword=%EA%B4%91%EA%B0%9C%ED%86%A0%ED%83%9C%EC%99%95%EB%B9%84&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3 고구려 발해 학회] </ref>.}}
 
== 신묘년조 논란 ==
=== 신묘년조 논란 ===
 
신묘년조 논란은 영락 6년(395년) 기사에 실린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시작된 논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