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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서동요 (드라마)}}
'''서동요'''(薯童謠)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대(599[[599년]] 이전)에 이루어진 동요이다.
 
[[백제 무왕]](武王)이 소년 시절에 지어 아이들에게 널리 부르게 했다했다고 하며 [[향가]] 중의 가장 오랜 형태로 그 형식은 4구체이다한다. 이 작품의 유래가 《[[삼국유사]]》 권2 무왕조(武王條)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이 <서동요>는 서동이라는 개인의 창작으로 당시 아동들에게 불린 동요이기는 하나, 전대에 그러한 형식의 민요가 널리 불려 이것이 4구체의 향가로 정착된 것으로 추측된다.
{{인용문|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 일찍이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용(龍)과 정을 맺어 그를 낳았다. 아명(兒名)은 서동(薯童). 그 도량이 비상하고 항상 서여(=마)를 캐어 팔아서 생계로 삼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아명을 그리 부른 것이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더벅머리를 깎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주며 자신을 따르게 했다. 드디어 노래 하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 그즈기(몰래) 열어(嫁) 두고 서동방(님)을 밤에 몰(몰래) 안고 가다 (善花公主主隱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之 夜矣卯乙抱遣去如). 이 동요는 서울에 퍼져 대궐에까지 스며들어 갔고, 백관(百官)들이 크게 간(諫)하여 공주를 멀리 귀양보내게 되었다. 떠날 때 왕후(王后)는 그 딸에게 순금 한 말을 주었다. 공주가 귀양길에 오를 때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여 시위(侍衛)해 가겠노라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지도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며 정을 나누었다. 그 후에야 서동이란 것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공주는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장차 생계를 꾀하려 하니 이 때 서동은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했다. 공주는 이것이 황금이니 가히 백 년을 넉넉히 살 수 있을 것이라 하자 서동은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땅엔 이런 것이 흙과 같이 쌓였다 하니 공주는 크게 놀라며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이니 그 보물을 부모님이 계신 궁궐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했다. 서동이 좋다 하며 금덩이를 모아 구릉(丘陵)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 금 수송의 방책을 물었다. 법사는 내 신력(神力)으로 옮기리라 하니, 공주가 편지와 함께 금덩이를 절간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옮겨 놓았다. 신라의 진평왕은 그 신이(神異)함에 더욱 존경하고, 항상 편지를 보내어 문안을 물었다. 서동은 이런 일로써 민심을 얻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향가]] 중의 가장 오랜 형태로 그 형식은 4구체이다.
이 <서동요>는 서동이라는 개인의 창작으로 당시 아동들에게 불린 동요이기는 하나 전대에 그러한 형식의 민요가 널리 불려 이것이 4구체의 향가로 정착된 것으로 추측된다.
 
== 서동요 전문 ==
 
이 작품의 유래가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인용문|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 일찍이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서라벌]])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용(龍)과 정을 맺어 그를 낳았다. 아명(兒名)은 서동(薯童). 그 도량이 비상하고 항상 서여(마)를 캐어 팔아서 생계로 삼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아명을 그리 부른 것이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더벅머리를 깎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주며 자신을 따르게 했다. 드디어 노래 하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인용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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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동요 전문 ==
善化公主主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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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矣卯乙抱遣去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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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 공주니믄(선화공주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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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매 몰 안고 가다.(밤에 몰래 안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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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요는 서울([[서라벌]])에 퍼져 대궐에까지 스며들어 갔고, 백관(百官)들이 크게 간(諫)하여 공주를 멀리 귀양보내게 되었다. 떠날 때 왕후(王后)는 그 딸에게 순금 한 말을 주었다. 공주가 귀양길에 오를 때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여 시위(侍衛)해 가겠노라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지도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며 정을 나누었다. 그 후에야 서동이란 것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공주는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장차 생계를 꾀하려 하니 이 때 서동은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했다. 공주는 "이것이 황금이니 가히 백 년을 넉넉히 살 수 있을 것"이라 하자 서동은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땅엔 이런 것이 흙과 같이 쌓였다." 하니 공주는 크게 놀라며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이니 그 보물을 부모님이 계신 궁궐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했다. 서동이 좋다 하며 금덩이를 모아 구릉(丘陵)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 금 수송의 방책을 물었다. 법사는 "내 신력(神力)으로 옮기리라." 하니, 공주가 편지와 함께 금덩이를 절간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옮겨 놓았다.
 
신라의 진평왕은 그 신이(神異)함에 더욱 존경하고, 항상 편지를 보내어 문안을 물었다. 서동은 이런 일로써 민심을 얻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삼국유사]]》|권2 무왕조(武王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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