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 (오호 십육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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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前秦 [[351년]]~[[394년]])은 [[오호십육국시대]] 티베트계 [[저족]](氐族)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 국호는 '''진'''(秦)이지만,
== 역사 ==
[[간쑤성]](甘肅省) 일대에 거주하던 저족은
[[352년]]에 황제에 즉위한 부건은 두홍의 잔당이나 동진의 북벌군과 싸우면서 점차 관중을 평정해 나갔으며 [[354년]]에 환온(桓溫)의 북벌군을 물리치고 관중을 평정하였다. [[355년]]에 부건이 죽고 아들 [[부생]](苻生)이 황제에 즉위하였는데, 부생은 폭정을 행하여 민심을 잃었다. 부생의 치세 동안 [[전량]](前凉)이 신속하고 강족의 [[요양]](姚襄)을 물리치는 등의 사건이 있었다. [[357년]]에 부홍의 손자 [[부견]](苻堅)이 반정을 일으켜 부생을 폐위하고 천왕에 즉위하였다.
부견은 한족 [[왕맹]](王猛)을 중용하여 내치를 다지고 개혁을 실시하였다.왕맹은 부견의 총애를 등에 업고 법을 엄하게 적용하고 정치를 바로잡아 전진의 국력을 크게 성장시켰다. [[366년]]부터 적극적으로 외정에 나선 부견은 [[전연]](前燕)을 침공한 환온의 북벌군을 물리치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370년]]에는 전연을 멸망시키고 화북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었으며 [[373년]]에 동진의 사천(四川) 지방을 정복하고 [[376년]]에는 전량과 [[대나라|대]](代)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였다. 화북을 통일할 무렵 재상 왕맹이 죽었고, 이후 부견은 무리한 전쟁을 거듭하고 사치를 일삼았다. 또한 이상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펼쳐 수도인 장안 인근에 [[선비족]]과 [[강족]]을 이주시키고 화북 곳곳의 거점에 지배민족인 [[저족]]을 이주시켜 지배권의 강화를 꾀하였다. [[378년]]에는 동진의 양양(襄陽)을 점령하였다.
[[383년]], 부견은 천하 통일을 목표로 [[여광]](呂光)에게 서역을 정벌을 명하는 한편 동진 토벌을 위해 96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였다. 부견의 원정군은 동진의 국경 전체에 걸쳐서 공격해 들어갔으나 부견이 직접 참여한 비수(淝水) 방면의 전선에서 배반으로 인해 크게 패배하여 전군이 패주하였다. ([[비수대전]](淝水大戰)) 비수의 패전으로 전진은 혼란에 빠졌으며 하북에서는 모용수가 [[후연]](後燕)을 건국하고 관중에서는 [[요장]](姚萇)의 [[후진 (오호십육국)|후진]](後秦), [[걸복국인]](乞伏國仁)의 [[서진 (오호십육국)|서진]](西秦), 여광의 [[후량]](後凉), [[모용홍]](慕容泓)의 [[서연 (오호십육국)|서연]](西燕) 등이 건국되었다. 부견은 모용홍, 모용충의 서연의 공격을 받아 장안을 버리고 도주하였으며, 요장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다.([[385년]])
부견의 서장자 [[부비 (전진)|부비]](苻丕)는 업에서 모용수의 공격을 받아 1년여 동안 농성을 벌이다 탈출하여 진양(晉陽)에 이르렀는데, 부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진양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부비는 부견의 복수를 위해 후진을 공격하기 위해 전열을 정비하였으나 [[386년]], [[모용영]](慕容永)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동진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농서 지역의 전진 세력을 이끌던 [[부등]](苻登)은 부비의 사망 소식을 듣고 황제에 즉위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후진을 공격하였다. 부등과 관중 일대의 전진계 군벌들과 제휴하여 후진의 요장을 수 년 동안 공격하였는데 [[389년]]에 본거지를 기습당해 세력이 쇠퇴하였다. 이후 [[393년]], 후진의 요장이 죽자 부등은 후진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요흥]](姚興)의 반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여 살해되었으며 태자 [[부숭]](苻崇)이 황중(湟中)으로 도망쳐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서진의 공격을 받아 부숭은 살해되었고 이로써 전진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 역대황제일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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