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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희'''(慕容熙, [[385년]] ~ [[407년]], 재위 : [[401년]] ~ [[407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의 [[후연]]의 제4대(마지막) 황제(재위:[[401년]] ~ [[407년]])군주이다. 자는 도문(道文)., 시호는 소문제(昭文帝). 후연의 건국자인 모용수의 막내아들이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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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희'''(慕容熙, [[385년]] ~ [[407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의 [[후연]]의 제4대(마지막) 황제(재위:[[401년]] ~ [[407년]]). 자는 도문(道文). 시호는 소문제(昭文帝). 후연의 건국자인 모용수의 막내아들이다.
 
== 생애 ==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아들로 모친은 귀빈 단씨(段氏)이다. 모용수의 말년에 태어나 총애를 받았으며 하간왕(河間王)에 책봉되었다. [[398년]]에 용성에서 모반이 일어나 [[모용보]](慕容寶)가 죽고 [[난한]](蘭汗)이 권력을 잡았는데 모용희는 나이가 어려서 주살되지 않았다. 곧이어 [[모용성]](慕容盛)이 난한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모용희는 하간공(河間公)에 책봉되었다. [[400년]]에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종군하여 큰 전공을 세웠으며 용맹함이 모용수에 버금간다고 평가되었다. [[401년]]에 반란이 일어나 모용성이 난 중에 죽자 태후 정씨(丁氏)에 의해 후연의 군주로 옹립되었다.
그는 성격이 광폭한 폭군이었다. 407년 황후인 부(苻)씨가 죽자 신하들에게 큰소리로 곡하게 한 다음 크게 울지 않는 자들을 처벌한 것이 발단이 되었는데, [[풍발]]은 [[고운]]을 추대할 거사계획을 알리고 황제가 되도록 부추겼다. [[고운]]은 썩 내켜하지 않았으나 풍발 등이 뜻을 굽히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에도 2번이나 패해 국력을 상실하였다.
 
모용희는 왕후 부씨(苻氏)를 총애하여 부씨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었는데, 부씨의 사치를 위해 각종 토목공사를 남발하여 국력을 낭비하였다. [[402년]]부터 [[404년]]까지 고구려가 후연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숙군성(宿軍城), 연군(燕郡) 등을 공격당하고 요동 일대를 빼앗겼다. [[405년]]에 고구려에게 빼앗긴 요동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를 공격한 모용희는 요동성을 거의 함락할 뻔 하였으나 성에 자신과 왕후가 최초로 입성하기 위해 공격을 늦추게 하였다가 패퇴하였다. 405년 말에는 거란을 공격하러 출정하였다가 목표를 변경, 치중도 버리고 고구려의 목저성(木底城)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모용희가 황후의 장례식 때 상여를 몸소 메고 성 밖으로 나간 것을 틈타 성문을 닫고 모용희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백성들의 동조를 얻은 후 모용희가 수도인 용성(龍城)에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다. 모용희는 군사를 거느리고 용성을 공격했으나 도리어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407년]], 왕후 부씨가 죽자 모용희는 슬픔에 빠져 거대한 무덤을 축조하고 공신들을 순장하려 하였다. 무덤이 완성되자 모용희는 부씨의 상여를 직접 메고 장례를 위해 용성을 나섰는데, 이때를 틈타 [[풍발]](馮跋)이 모반을 일으켜 [[고운 (북연)|모용운]](慕容雲)을 추대하였다. 모반 소식을 들은 모용희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용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군대가 흩어지면서 모용희도 사로잡혀서 처형되었다.
 
== 참고문헌 ==
*《[[자치통감]](資治通鑑)》
*《[[진서]](晉書)》
 
{{왕 계승표|
앞선 왕 이름= [[모용성]](慕容盛)|
재위 숫자= 4|
재위 연도= [[401년]] ~ [[407년]] |
다음 왕 이름= [[고운 (북연)|고운]](高雲)|
}}
 
[[분류:후연]]
[[분류:암살된오호십육국시대 사람]]
[[분류:385년 태어남]]
[[분류:407년 죽음]]
[[분류:암살된 사람]]
 
[[en:Murong Xi]]
[[zh:慕容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