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학 (189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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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했을때 서대문에 있는 그의 집에 머물기도 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는 등 최창학의 부일 협력 행위에 대한 인식은 있었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1945년]] 12월 조선광업중앙관위원회에 인계이사로 참여하여 일본인 소유였던 광산의 관리와 인계에 관여했고, [[1949년]] 10월 제2차 전국광업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는 등 광공업계에서 계속 활동한 기록이 남아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경제 부문과 친일단체 부문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