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천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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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패망과 동시에 당나라는 백제의 고토를 병탄해 [[웅진 도독부]]를 설치했다. 이에 충청남도 일대는 [[백제 부흥운동]]과 [[나당 전쟁]]의 전장이 되고 말았다.
[[나당 전쟁]]중인 [[671년]] [[문무왕]] 11년에 [[신라]]는 옛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 (지명)| 사비성]]을 [[당나라]]로부터 탈환해 이곳을 치소로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했다. 동시에 지금의 아산시 일원을 중심으로 [[온양군|탕정주]]를 설치했다.
그 후 전쟁 뒤인 [[681년]] [[신문왕]] 6년 주 치소가 [[웅진]]으로 옮겨지면서 사비는 [[주 (행정 구역)| 주]] 치소로서의 지위를 상실해 명칭도 웅천주로 변경되었다. [[680년]]에는 탕정주도 웅천주에 합병되었다.
[[757년]] [[경덕왕]] 16년에 전국의 행정체제및 행정단위의 명칭을 개혁하면서 웅주로 바뀌었지만 웅천주라는 명칭도 계속 사용되었다.
이 지역의 신라군으로는 황자•황청색의 [[만보당]](萬步幢)과 고량부리정(古梁夫里停)이 주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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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군]]<br /> 서산시 지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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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양군|탕정군]](湯井郡)
| 탕정군(湯井郡)
| 충청남도<br /> [[아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