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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군(泗川郡)'''은 경상남도 [[사천시]]의 옛 행정구역이다. 역사상의 사천군은 1914년 일제에 의해 [[곤양군]]등을 통폐합 하기 전의 영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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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사천시 동부지역으로 그 중심은 지금의 [[사천읍]]과 [[정동면]]일대이다.
 
== 유래 ==
사천의 옛 이름은 사물(史勿, 四水)이다. 물가 마을이라는 의미로 여겨진다. 현재의 사천은 중세에 "사가람"이라도 읽히기도 했다.
사천시의 시지역의 옛 이름인 "삼천포(三千浦)"는 고려시대의 조창인 통양창(通陽倉)에서 유래되었다 하는데 이것이 수도인 개경에서 수로(水路)로
삼천리 떨어져서라고도 하고 인근 인구가 3000명이나 될 정도로 많이 모여서 삼천리(三千里)이고 부른데서 유래돼서라고도 하는데 불분명하다.
조선 초에 [[왜구]]의 침공일 방어하기 위해 삼천진(三千鎭)이 설치된 적이 있다. 여담으로 옛 속어중에 "삼천포로 빠지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경전선 철도에서 옛 [[진삼선]]철도가 분기하는 개양역에서 열차를 잘못타면 삼천포행 열차로 탈 때가 있어서였다는데 분명치는 않다. 이 속담때문에
지역주민들이 "삼천포"라는 이름을 싫어해 지명 개명요구까지 있었다고 한다.
 
== 역사 ==
 
* 사천 늑도(勒島)에서 조개무지등의 청동기 유적이 대거 발굴되었다.
 
* 가야시대에 사물국(史勿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당시에 [[늑도]]는 사물국의 관문이자 국제무역항이었다.
 
* 3세기경에 [[포상팔국]]에 가맹해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금관가야]]에 대항했다.
 
* 5세기경에 금관가야가 패망하여 전기 금관가야가 와해되자 반파국 중심의 [[대가야]]에 합류했다.
 
* 6세기 중반에 가야가 남북으로 분단되자 [[안라국]]중심의 남가야에 들어갔다가 [[559년]] 신라에 저항없이 합병되었다.
 
* 신라에 의해 육지 본토에 '''사물현(史勿縣)'''이 설치되었다.
 
* [[757년]] [[경덕왕]] 16년에 전국의 행정체제및 행정단위의 명칭을 개혁하면서 사물현을 '''사수현(泗水縣)''' 으로 개명하고 [[소가야|고성군]]의 영현이 되었다.
이 시기 사수현의 치소는 [[정동면]] 고읍리
 
* [[995년]] [[고려 성종]]14년에 산남도의 진주목에 소속되었다.
 
* [[1015년]] [[고려 현종]]9년 州로 승격되어 사주(泗州)가 되었다.
 
* [[조선시대]]인 [[1413년]], [[조선 태종|태종]] 13년 현으로 강등당해 사천현(泗川縣)으로 고쳐졌다.
 
* [[1415년]] [[조선 태종|태종]] 15년 사천진이 설치되어 병마사가 현령을 겸임.
 
* [[1468년]] [[조선 세조|16년]] 사천진이 폐지 되어 병마절제사가 현감을 겸임하였다.
 
*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일본 장군 [[모리 요시시로]](毛利吉城)가 선진리에 왜성을 축조.
[[사천 해전|5월에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사천항의 일본군을 격파]]하다
 
* [[1895년]] [[23부]]府제로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현]](縣)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군 (행정 구역)|군]](郡)으로 승격되어 [[진주부]]관할 '''사천군'''이 되었다가
다시 [[13도제]]로 [[경상남도]]에 속하였다. 이시기에 옆의 [[곤미|곤양]]을 합병하였다가 재분할되었다.
 
* [[1912년]] 진주군 문선면과 [[고성군]] 남양면을 편입했다.
 
* [[1914년]] [[곤미|곤양군]]을 [[하동군]]과 분할편입하고 진주군의 축동면, 부화곡면을 편입하여 지금의 사천시의 영역이 이루어졌다.
 
{{참고|사천시|설명=1914년 이후의 역사와 현황에 대해서는}}
 
== 주석 ==
<references/>
 
{{토막글|한국의 지리}}
 
[[분류:한국의 옛 지명]]
[[분류:한국의 폐지된 행정 구역]]
[[분류:경상남도의 행정구역]]
[[분류:1895년 설치]]
[[분류:1914년 폐지]]
#redirect [[분류:사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