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국정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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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日本)의 쇄국(鎖國) ==
 
[[일본]]은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和親約)을 맺은 이후(以後), 영국(英國)·프랑스·러시아·네덜란드 등 서양(西洋) 제국(帝國)과 차례로 통상조약(通商約)을 맺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이룩하였다. 일본의 새 정부는 적극적(積極的)으로 개화정책(開化政策)을 받아들여서 일본을 근대화(近代化)하는 길로 나아갔다. 메이지 정부(明治政府)는 [[1868년]] 새로운 정부수립(樹立)을 조선에 알려오면서 수교(修交)할 것을 요청(要請)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과거(過去)의 관례(慣例)에 따라 일본 천황(天皇)의 존재(存在)를 인정(認定)하지 않았고, 또 국서(國書)에 "황상(皇上)" 등의 오만(傲慢)한 용어(用語)가 쓰인 것을 구실(口)로 이를 거절(拒絶)하였다. 당시(当時)의 집권자(執者) 흥선대원군은 개화(開化) 일본에 대한 위구심(危懼心)을 서양(西洋) 제국(帝國)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태도(態度)는 일본을 자극(刺激)하여 정한론(征韓論)을 대두시켰다. 일본 정부는 사신(使臣)을 보내어 재차 수교를 청(請)해 왔으나 조선의 완강(頑)한 거절(拒絶)에 부딪쳐 그대로 돌아갔다. 일본의 지도자(指導者)들은 정한론(征韓論)의 즉시(即時) 실천(実践)을 억제(抑制)하고 내치(內治)에 힘썼다. 그들은 근대화(近代化)의 추진(推進)으로 일본의 국력(國力)을 기른 뒤에 적당(適当)한 시기(時期)를 택(択)하여 조선(朝鮮)을 침략(侵略)하자는 방향(方向)으로 의견(意見)을 모았다.
 
일본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태도가 이같이 강경(硬)했던 것과는 반대로, 청나라와는 종래(従来)의 전통적(統的)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빈번(頻繁)히 일어나는 사건(事件)마다 청나라에 알리고 그 자문을 요청(要請)하였다. 그러나 밀려드는 열강세력(列勢力)에 대처(対処)하는 것만도 벅찼던 청나라로서는 조선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일 여유(裕)가 없었다. 이로써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경(硬) 일변도(一辺倒)로 기울어갔고 그 결과 조선은 조만간 겪게 될 새로운 사태에 대응할 만한 적극적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국제무대에서 완전히 고립상태(孤立状態)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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