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파: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4번째 줄:
젊었을 떄부터 명성이 있어 형주목인 [[유표]]가 초빙하려 했으나 거부했다.
 
208년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를 지배했을 떄 조조에게 가자 초빙되어 속관이 되었으며 조조의 명으로 [[장사]], [[영릉]], [[계양]]을 조조에게 귀순시켰다. 그러나 후에 [[유비]]가 그 삼군을 지배하자 교지로 망명하여 유비가 이 일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으나생각했다. 후에 촉 땅으로 이주하여이주하였다. 214년《초국선현전》에 유비가따르면, 촉을유파가 평정하자교지로 먼저망명하여 망명한성을 것을장으로 사죄하여고치고, 유비는사섭과 유파를맞지 질책하지않아 않았고장가 땅으로 갔다가 익주군에 억류되어 [[유장]]에게 보내졌으며, 유파의 아비 유상이 유장의 아비 [[제갈량유언 (후한)|유언]]을 효렴으로 천거했으므로 유장이 유파를 자주보고 칭찬하고기뻐하여 천거하여매양 유비는 유파를일이 있으면 찾아가 물었다가 하나, 배송지는 유언이 영제 시대에 이미 태상이었고 익주목으로 나갔으며 유상은 손견이 장사태수이던 시절 강하태수였으므로 유상이 유언을 효렴으로 추거할 수 없었다고 비판했다. 또 《초국선현전》에 따르면 유장이 장로를 막고자 유비를 맞아들일 것을 반대했으나 유장이 천거하여듣지 좌장군서조연으로않아 임명했다두문불출했다.
 
214년 유비가 촉을 평정하자 먼저 망명한 것을 사죄하여 유비는 유파를 질책하지 않았고, [[제갈량]]도 유파를 자주 칭찬하고 천거하여 유비는 유파를 천거하여 좌장군서조연으로 임명했다. 《초국선현전》에 따르면, [[장비]]가 유파를 뵙기를 청했으나 유파는 장비와 함께 말하지 않았으므로, 장비가 노여워했다. 제갈양은 유파에게 장비가 유파를 공경하고 사모하므로 유파에게 뜻을 돌리기를 청했으나 유파는 거부했다. 이를 들은 유비는 유파가 자신에게 쓰이지 않고 조조에게 돌아가려 하므로 노했으나, 제갈양은 끝까지 유파를 칭찬하였다. 당초 유비가 유장을 쳐 성도를 함락하니, 무리가 부고의 재물을 취했으므로 군수물자가 부족했다. 유파는 유비에게 돈을 부어 만들고 물가를 고르게 하도록 진언했고, 이를 따르니 몇 달 안에 부고가 충실해졌다.
 
219년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상서에 임명되었고, 220년 [[법정]]이 세상을 떠나자 법정을 대신하여 상서령까지 올랐다.
줄 19 ⟶ 21:
유장이 유비에게 항복할때 자신은 [[황권]]과 함께 관직에 오르는것을 거부했으나 유비가 직접 찾아오자 이에 감명받아 관직을 수락한다.
유비 사후, 정사에서는 222년 사망했으나 연의에서는 그 이후에도 등장하여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는 중참군으로 활약하였다.
 
==친척 관계==
*유요 (할아버지)
**유상 (아버지)
***유파
 
[[분류:186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