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량 (오호 십육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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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량의 건국자 여광은 저족 출신으로 [[전진 (오호십육국)|전진]](前秦)의 장군이었다. [[383년]], 여광은 [[부견]](苻堅)의 명을 받아 서역 원정을 떠났다. 1월부터 원정길을 시작하여 하서(河西) 회랑을 진군, [[384년]] 7월 [[쿠차|귀현]](亀玆)을 정벌하고 서역 대부분을 영향권 아래 두었다. 이때 여광은 서역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승려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신병을 확보하였다. 이 당시 전진의 부견은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패배하여 몰락하고 전진은 혼란에 빠져 있었는데, 혼란으로 인해 교통이 두절되어 여광은 이 소식을 알지 못하였다. 서역 평정 이후에 부견의 명령이 오지 않자 불안을 느낀 여광은 휘하 장병 및 구마라습의 희망에 따라 정벌을 멈추고 [[385년]], 본국으로 귀환을 시작하였다. 양주(凉州)에 도착한 여광은 전진의 양주자사 양희를 격파하고 양주를 장악하였으며 사실상의 자립 정권을 세웠다.
 
[[386년]] 9월 여광은 부견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부견에게 시호를 올리고 연호를 고쳤다. 뒤이어 주천공(酒泉公)을 자칭하였으니, 일반적으로 이 시기부터 후량이 건국된 것으로 본다. 이 당시 양주에서는 [[전량]](前凉)왕실의 후예인 장대예(張大豫)가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하였는데 이 반란으로 여광은 서역과 교통이 단절되어 큰 곤란을 겪었다. 여광은 [[387년]] 말에 반란을 진압하는데진압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389년]]에 삼하왕(三河王)을 자칭하였다. 양주 일대의 여러 세력들을 복속시킨 여광은 걸복부의 [[서진 (오호십육국)|서진]](西秦)과 대립하였다. [[396년]]에는 국호를 대량(大凉)으로 정하고 천왕(天王)을 자칭하였다.
 
[[397년]], 여광은 서진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금성(金城 : [[간쑤 성]] [[란저우 시]])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독발부]]의 [[독발오고]]가 거병하여 금성을 점령하였고, 뒤이어 [[단업]](段業), [[저거몽손]](沮渠夢遜) 등이 반란을 일으켜 하서회랑 서쪽을 장악하였으며 수도 고장(姑臧 : [[간쑤 성]] [[우웨이 시]])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의 결과 독발오고는 [[남량]](南凉)을 건국하였고, 단업은 [[북량]](北凉)을 건국하여 양주는 분열되었다. 여광은 수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데진압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남량과 북량을 정벌하지는 못하였다.
 
[[399년]]에 여광은 병으로 태자 [[여소]](呂紹)에게 선위한 후 곧 사망하였다. 여소는 곧 이복형 [[여찬]](呂纂)에게 살해되었고 여찬이 천왕에 즉위하였다. 여찬은 남량과 북량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였으나 남량과 북량의 공조 체제로 인해 원정에 나서면 후방을 공격당하여 모두 실패하였다. 또한 주색에 빠진 여찬은 국정을 소홀히하여 후량의 국력은 크게 쇠퇴하였다. [[401년]], 여초(呂超)에게 살해되었고, 여초의 형 [[여륭]](呂隆)이 황제로 옹립되었다.
 
여륭의 치세에서도 후량은 계속 쇠퇴하여 남량과 북량의 침입을 받았으며 [[후진 (오호십육국)|후진]](後秦)의 침입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여륭은 후진에 복속하여 건강공(建康公)에 책봉되었다. 후진의 군대가 물러가자 다시 남량과 북량의 침략이 이어졌고, 여륭은 견디다 못해 [[403년]], 후진에 완전히 항복하여 나라를 넘겼다.
 
== 역대 황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