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침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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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는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에게 신속하고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는 구실을 줄 수 있었다. [[유고슬라비아]]군대는 국경을 방어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방어 배치도 허술하였다. [[쿠데타]]를 주도하였던 공군은 [[4월 6일]] [[나치 독일]]의 공격이 시작된 지 몇 시간 만에 모두 진압되었으며, 동시에 시작된 [[베오그라드 공습]]으로 3,0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독일군은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 [[헝가리]]부대와 함께 신속하게 공격함으로써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왕국군|유고슬라비아 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인]]들은 독립을 주장할수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특히 [[크로아티아]]의 [[우익 단체|우익 집단]]인 [[우스타샤]]는 [[추축국]]에게 적극 동조 하였다. 공격 측의 사상자는 151명밖에 없었다. [[정전 (군사)|정전]]문서는 [[4월 17일]]에 조인되었다. 항전을 결심한 [[고급 장성]]은 제2군의 참모장이던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뿐이었다. 그는 소규모의 군을 이끌고 산악 지대로 들어갔고, 이들이 후에 [[체트니크]]를 구성하였다.
 
== 참고문헌 ==